소니 'PSP', 닌텐도 휴대용 게임기에 전쟁 선포

2004년 6월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가스에서 열린 게임 전시회 'E3'의 소니 전시장. 소니가 그동안 비밀 프로젝트로 진행해 오던 휴대용 게임기 'PSP™(PLAYSTATION® Portable)'의 실체를 공개한다고 하자 수많은 관람객들이 몰려들었다. 이 'PSP™'를 위해 '플레이스테이션2(이하 PS2)'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플레이스테이션3(이하 PS3)'의 개발 스케줄까지 연기했다고 하니 가히 소니가 'PSP™'에 쏟아붇는 노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소니의 계획은 'PSP™'를 21세기의 워크맨으로 키워낸다는데 있다. 과연 소니의 야심찬 계획이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인지 현재까지 공개된 정보를 토대로 'PSP™'을 검증해보자. 기술확보와 교체시기가 'PSP™' 탄생 배경 'PSP™'가 등장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휴대용 게임기 시장의 성장에 있다. 1997년부터 소니가 'PS'와 'PS2'로 가정용 게임기 시장을 제패하고 있을 때에도 휴대용 게임기 시장만은 닌텐도가 독과점 체제를 굳히고 있었다. 이 휴대용 게임기 시장이 이제는 전체 게임기 시장의 1/3에 육박할 정도로 커버린 것이다. 이런 황금시장을 소니가 지켜보고만 있겠는가? 소니가 휴대용 게임기를 만들 것이라는 소문은 꾸준히 들려왔었다.


그림 1. 가정용 게임기 시장과 휴대용 게임기 시장의 판매량 추이


그런데 왜 하필 2004년에 와서야 'PSP™'를 공개했을까? 여기엔 크게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첫번째 휴대 게임기 시장의 교체시기다. GBA가 등장한지도 어느새 만 3년이 다돼간다. 이제 슬슬 게임기에 대한 교체 수요가 일어날 수 있는 시점이 된 것이다. 이 교체기는 2000년 무렵에도 있었지만, 당시 소니로서는 'PS2' 발매와 성공이 최우선 과제였으므로 휴대용 게임기 시장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두번째 목표 성능을 달성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했다. 소니가 휴대용 게임기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닌텐도를 이기려면 확실한 비교우위를 차지해야만 한다. 과거 'PS2'가 그랬던 것처럼 강력한 성능은 시장의 판도를 좌우할만한 주요 변수가 되기 때문. 따라서 소니는 휴대용 게임기에서 'PS2' 수준의 3D화면이 구현되기를 원했다. 소니는 이 기술이 집적도 90nm 수준의 반도체 기술이면 달성 가능하다고 판단했으며 2003년 말 드디어 90nm 공정의 반도체 생산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소니는 'PSP™'에 대한 자신을 가지고 2004년 말 드디어 그 모습을 공개하게 된다. 'PSP™'는 최첨단 반도체의 집합 장소 위에서 언급했듯 소니가 자신을 갖는 큰 이유중의 하나는 반도체 기술에 있다. 그럴만한 것이 현재 전세계에서 90nm 공정의 CPU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업체는 인텔과 소니, 삼성 정도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소니는 대량 생산 공장도 직접 가지고 있어 경쟁 업체보다도 더 싼 가격에 찍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럼 과연 90nm 공정에서는 어느 정도까지 칩을 만들 수 있을까?


그림2. 반도체 공정 미세화에 따른 PS2의 칩 크기 변화


일반적으로 공정이 미세화될수록 같은 기능을 가진 칩을 더 작게 만들 수 있으며 칩 크기가 작아질수록 더 싸게 생산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그림2를 보면, 90nm 공정에서는 EE칩과 GS칩을 합친 칩이 불과 예전 PS2용 GS칩의 1/3미만 크기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휴대 기기에 넣을 수 있는 칩의 면적은 100㎟ 정도까지이므로 (실제로 소니가 개발한 PDA 'CLIE'에 들어가는 '핸드헬드 엔진'이 그 정도 사이즈였다) 그림2에 나오는 EE+GS칩을 그대로 'PSP™'에 넣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EE+GS칩은 휴대용 기기 전용으로 설계된 칩이 아니었으므로 소니는 'PSP™' 전용 칩을 새로 설계하게 된 것이다. 이 칩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듀얼 코어 시스템은 EE보다 두배? 그림3에 'PSP™'의 CPU 내부 구조를 그려 보았다.


그림 3. PSP™ CPU의 내부 장치 구성도


'PSP™' CPU에서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코어가 두 개 (Main core와 Media engine) 들어 있다는 것이다. 두 개 모두 'PS' 전통의 MIPS 계열 코어(PS와 PS2도 MIPS 계열이다)를 사용하고 있는데, 최고 동작 속도가 'PS2'의 EE(298Mhz)보다도 높게 설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두 코어의 성능을 합해서 EE보다 두 배 이상의 성능이 된단 말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는 않다. 먼저, 저 두 개의 코어 중에서 게임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코어는 메인 코어뿐이다. 미디어 엔진은 동영상이나 음악 등, 한정적인 역할만 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프로그래머가 마음대로 조작할 수 없는데, 대신에 소니는 미디어 엔진을 특화 시킨 사용법(라이브러리)을 프로그래머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음악이나 동영상 처리 같은 잡일은 미디어 엔진이 알아서 할 테니 게임 제작사는 메인 코어만 만지면 되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역할 분담은 결과적으로 게임 개발사 부담을 덜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PSP™' 코어의 성능이 EE를 능가하기 힘든 두 번째 이유는 메인 코어에 붙어 있는 벡터 연산 장치의 성능(2.6GFLOPS)이 EE의 VU(6.4GFLOPS)에 못 미치기 때문이다.(벡터 연산 장치는 물리 연산이나 폴리곤 변환 등에 사용된다) 대신, 프로그래밍하기는 쉽게 되어 있다. (PS2가 너무 복잡한 하드웨어였다는 것에 대해 소니의 반성이 있었던 것 같다.) 마지막 이유는 버스의 대역폭(2.6GB/sec)이 EE(3.2GB/sec)보다 좁기 때문인데 실제 생활에서도 버스가 좁으면 많은 승객을 태울 수 없듯이 CPU 버스도 대역폭이 좁으면 많은 데이터를 처리하기가 힘들게 된다.


GPU가 바로 'PSP™'의 숨겨진 능력 코어만 봐서는 PSP™가 기껏해야 플스2의 2/3 정도 성능밖에 낼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PSP™'에는 숨겨진 능력이 더 있으니 그것이 바로 'PSP™'의 GPU(그래픽 특화 CPU)다. 사실 'PS2'의 GPU라고 할 수 있는 GS는 EE에 비해 기능이 형편 없었다. 속도는 엄청나게 빨랐지만(렌더링 유닛이 16개나 들어있다), 지원하는 기능이 너무 미비했던 것이다. 텍스처도 마음대로 못쓰고 노말 맵도 쓸 수 없는 이른바 PC로 치면 속도만 빠른 '리바 TNT'라고나 할까. 그런데, 이번 'PSP™'의 GPU는 GS에 비해 기능적으로 상당히 충실해졌다. 'PS2'에서는 VU에서 일일이 처리해야 했던 곡면 처리나 폴리곤 애니메이션 기능을 GPU에 내장시켰으며 범프 매핑 등의 텍스처 특수 처리 기능도 내장되어 있다.


그림4. PS2 와 PSP™에서의 처리 분담의 차이


그림4에는 일반적인 게임 프로그램의 처리과정을 그려 보았는데 'PS2'에서는 대부분의 처리가 EE에서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이 점 때문에 실제로 EE부분의 처리를 프로그래밍하는 것이 상당히 고달픈 작업이 되었고 EE와 GS 사이에서 병목 현상이 많이 발생하곤 했다. 그런데 'PSP™'의 경우는 GPU가 폴리곤 부분의 작업을 분담하도록 설계 되어 있어 메인 코어의 부담을 덜 수 있게 되었으며 구조적으로도 훨씬 깔끔해졌다. 이것은 마치 최근의 PC구조와도 유사한데 실제로 'PSP™' GPU의 '서피스 엔진'과 '렌더링 엔진'은 각각 PC GPU의 '버텍스 셰이더' '픽셀 셰이더'와 상당히 흡사한 구조로 되어 있다. 게다가 소니는 '서피스 엔진'과 '렌더링 엔진'을 쉽게 활용하기 위해 라이브러리를 개발자들에게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PS2'에 비해 훨씬 손쉽게 게임기의 성능을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PSP™는 게임기+미디어 플레이어 소니가 PSP™를 21세기의 워크맨이라고 부르는 데는 까닭이 있다. PSP™는 게임기뿐 아니라 미디어 플레이어로서의 기능도 뛰어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게임을 위한 성능보다도 뛰어난 미디어 성능을 갖추고 있는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가 바로 VME(Virtual Mobile Engine)와 AVC이다. VME는 본래 소니의 네트웍 워크맨에 들어가던 장치로서, ATRAC같은 압축된 음원의 처리나 음장효과를 내는 역할을 한다. 'PSP™'에 들어있는 VME는 VME의 본래 기능을 향상시킨 버전으로서 7.1채널, 3D사운드 등의 초특급 기능까지 가지고 있다. 한편, AVC는 현존하는 최고의 동영상 압축 코덱으로 DiVX나 WMV 등 일반적인 MPEG-4 계열 코덱보다도 두 배 가량의 압축률을 자랑한다. 이것은 아직 PC에서도 보급이 거의 안된 기술인데 벌써 하드웨어로 등장한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PSP™' 게임에 대한 기대 이상의 자료를 종합해보건대, PSP의 성능이 PS2에 근접하며 어떤 면에서는 능가한다고 공언해온 소니의 발언은 허황된 얘기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소니의 발표 자료를 보면 GPU 성능이 최대 초당 3천3백만 폴리곤 정도라고 나와 있는데, 스펙상으로만 보면 오히려 PS2의 3천 5백만 폴리곤 보다 현실적인 수치일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미디어 쪽의 기능은 현존하는 어느 게임기나 미디어 플레이어보다도 뛰어난 성능을 갖추고 있지 않은가? 그야말로 2004년 시점에서 휴대 기기에 넣을 수 있는 최고의 기술력을 집약한, 소니의 회심작이라고 할만 하다. 물론, 기술적으로 뛰어난 제품이라고 해서 실제 게임들도 뛰어나리라는 보장은 없다. (PS2에서는 설계자가 예상치 못한 병목 현상들 때문에 게임 개발자들이 곤욕을 치렀다) PSP의 경우 아직 제품 규격이 완전히 확정된 것이 아니며, 배터리 문제라던가, 메모리 부족(메인 메모리 32MB 중에서 일부를 OS가 사용해버리며, VRAM이 2MB 뿐이다), 느린 버스 등 불안 요소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봤듯, PSP 설계에서는 PS2에서의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개발자의 편의성을 높일 수 있도록 한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그렇다면 최소한 드림캐스트 이상, PS2에 버금가는 수준의 게임들을 PSP에서 기대해봐도 좋지 않을까? 2004년 'E3'에 출전한 'PSP™' 데모들 2004년 E3에서 아직 실제 하드웨어는 개발자들에게 전해지지 않았으며 'PSP™'의 메인 메모리를 32MB로, VRAM를 4MB로 늘리기로 했다는 소식도 E3에서 처음 들은 개발자가 상당 수 있었다고 한다. E3에 등장한 데모들은 대부분 PC에서 동작하는 소프트웨어 에뮬레이터(상당히 느리다)로 개발된 것이며 개발자들은 최악의 시나리오(실제 PSP™가 예상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것) 에 대비해서 게임의 사양을 낮춰 잡고 개발했던 것 같다. 따라서, E3에 등장한 데모 영상만을 가지고 'PSP™'의 성능을 논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다만, 에뮬레이터가 제공하는 기능적인 부분은 'PSP™'에 근접했다고 판단된다. 다음은 'E3'에서 'PSP™'로 실제조작이 가능했던 데모들 중 기능적으로 특이한 몇 가지 것들을 소개한다. Duck in water 데모


물위에 오리나 배가 떠다니는 것을 시뮬레이션한 데모이다. 초기 PS2 발표에도 유사한 내용의 데모가 출전한 적이 있는데, 개발자가 동일인물이다. 이 데모에서는 물결의 움직임을 '서피스 엔진'에서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오리가 물에 비치지 않는 점은 아쉽다. Harmonic city 데모


PC에서도 아직 구현 초기 단계인 실시간 '전역조명'(Precomputed Radiance Transfer) 기술을 보여주는 데모이다. PC의 경우 이 기술을 사용하려면 GPU의 '버텍스 셰이더'가 필수적인데 'PSP™'에서는 메인 코어의 VFPU를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김용하 객원기자(ysoya@naver.com) 조학동 기자 (igelau@gamedong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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