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머들 '극성' 플레이에 개발사들 '대책없네'

"형인데, 좀 자제하면 안되겠니?"

최근 '그라나도 에스파다' 게시판에 최고 레벨급인 80레벨을 달성해서 더 이상 할 것이 없다는 글이 올라온 적이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업계 최강의 카리스마로 게이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김학규 대표의 답변은 "이제 50레벨 콘텐츠 만들고 있다. 제발 좀 자제해라!"라는 것이었다. 워낙 진솔하면서도 재치 있는 답변인 탓에 웃으면서 넘겼지만 어떻게 보면 게임 개발 속도와 게이머들의 레벨업 속도의 차이라는 게임업계의 딜레마를 한눈에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이 같은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작년 최대의 화제작으로 꼽혔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하 '와우')'의 경우 게이머들이 오픈 베타 테스트 기간에 만렙을 다 찍어버려 정작 상용화 서비스에 들어가자 더 이상 할 것이 없다는 게이머들의 항의로 몸살을 앓았다. '와우' 자체가 엄청나게 방대한 세계관을 자랑하는 게임이지만 바다를 헤엄쳐서 아직 개발 중인 도시 안으로 들어가거나 고수들과 함께 퀘스트를 빨리 깨버리는 편법을 사용해 하루 만에 고렙이 되는 등 개발사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국내 게이머들이 극성스런 플레이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일은 '대항해시대'도 마찬가지다. 이 게임 또한 엄청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게임이지만 '와우'와 마찬가지로 상용화 서비스 들어가기 전에 대부분의 게이머들이 만렙에 도달했으며 아직 열리지도 않은 북극과 동남아시아를 갔다 온 게이머들도 부지기수여서 개발사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개발자들은 게임 개발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게이머들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보니 그 속도를 맞추기 위해 무리를 하게 되고 무리를 하면 바로 콘텐츠의 질이 저하되고 각종 버그가 난무하게 된다. 게임회사들도 국내 게이머들의 플레이 속도가 빠르다는 것을 감안하고 일정을 잡고 있지만 하루에 20시간을 게임하는 사람들의 속도에 맞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토로한다. 물론 게이머들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 레벨업을 힘들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러면 단순 노가다 게임이라는 지탄을 받기 마련이라 이 또한 대응책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체력이 떨어지면 자동으로 물약을 먹여주고 사냥에 도움을 주는 버프 마법을 자동으로 걸어줘서 사냥 속도를 정상속도의 2배 이상으로 만들어주는 등 '매크로'라 불리우는 불법 프로그램의 기승을 막다보면 미리 준비해뒀던 콘텐츠도 업데이트하기 힘든 게 현실이라는 설명.

그래서 개발자들에게서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얘기가 바로 '제가 잠을 줄이는 수밖에 없군요'다. '하도 집에 안들어갔더니 회사에 있는 라꾸라꾸 침대가 아니면 잠이 안와요'라는 넋두리처럼 개발자가 목숨을 건 희생을 하지 않으면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이런 극성스런 게이머들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게이머들의 게임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한국 온라인 게임 산업의 수준이 발전하지 않았을 것이며 또 e스포츠 문화가 이렇게 빨리 정착될 수 없었을 것이다. 단적으로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들이 마린으로 럴커를 잡아내는 것을 보라! 불가능할 것만 같은 일들이 게임 속에선 이런 게이머들의 기적(?)같은 힘으로 속속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게임을 즐긴다면 게임의 재미를 진정으로 느낄 수 없다는 단점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게임의 재미라는 것은 단순히 레벨만 올리고 좋은 장비를 차는 것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퀘스트의 스토리를 읽는 것에서, 친구들과 아직 무리라고 생각했던 던전을 클리어하는 것에서, 또 이외에도 많은 곳에 재미가 들어있다. 무작정 레벨만 올리려고 치트나 매크로 같은 편법만을 추구하다가는 이런 재미를 몽땅 놓칠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솔직히 온라인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남들보다 더 고수가 돼서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게이머들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길을 걸을 때도 천천히 걸으면 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것처럼 게임도 천천히, 그리고 여유롭게 즐긴다면 뭔가 새로운 재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지금도 컵라면과 박카스, 그리고 라꾸라꾸 침대의 힘에 의지하면서 일을 하고 있는 개발자들을 위해서도, 게임 불감증에 걸릴 위험이 큰 극성 게이머들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고 싶다. "형인데, 이제 그만 자제 좀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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