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작과 확연히 달라진 드래곤 에이지2

1970년 최초의 RPG Dungeons & Dragons(이하 D&D)가 등장한 뒤로 각종 RPG는 많든 적든 영향을 안 받으려야 안 받을 수가 없었다. 아예 D&D룰을 적용한 게임을 내놓는 경우도 있었는데 바이오웨어에서 제작한 인기 RPG 발더스 게이트 시리즈나 네버윈터 나이츠 시리즈가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 이렇게 D&D룰 기반의 게임으로 성공한 바이오웨어가 2009년 D&D룰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 정통 판타지 RPG 드래곤 에이지: 오리진(이하 드에1)을 발매해 대성공을 이뤘고, 2011년 이 드에1의 정통 후속작 드래곤 에이지 2(이하 드에2)가 등장했다. 여러 가지 의미로 달라져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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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로 흥해서 D&D를 벗어나려는 바이오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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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에서 이룬 방대한 세계관 설정은 이번에도 여전하다. 그걸 느끼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게임은 편하고 봐야 해
정통 RPG라면 뭔가 거창하고 할 일이 많아 배워야 할 부분이 쌓이곤 한다. 전작 드에1이 여기에 아주 충실했는데 드에2에선 반대로 게이머가 해야 할 일들을 상당 부분 솎아냈다. RPG의 핵심인 역할극 요소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역할 연기란 RPG의 특징을 잘 살리려면 그만큼 많은 종류의 역할과 이를 뒷받침하는 각종 설정 및 환경이 필요하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방대한 세계관이 생긴다. 그러나 드에2는 처음부터 끝까지 게임의 배경을 '커크웰'이란 도시로 한정해 스토리의 범위를 압축시켰다. 이렇게 게임 배경이 좁아지면 반비례로 깊게 파고 들어가야 할 내용이 많아질 법도 한데 게임 안에서 흐르는 총 10년의 세월을 기-승-결로 끊고는 그 사이를 간단한 해설로 처리해 게임의 무게를 가볍게 했다(커크웰이란 도시 내부의 방대한 설정은 용어사전에서 재미 삼아 읽어보는 정도의 비중만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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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간 한 사람의 인생역정이 펼쳐질 커크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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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이벤트, 동료 관리 모두 편의성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


세계관만큼 RPG에서 비중이 높은 캐릭터들의 취급도 마찬가지다. 우선 주인공부터 드에2에 등장하는 수많은 종족 중 가장 보편적인 인간으로 고정시켰고 여기서 고르는 직업은 전사, 도적, 마법사 딱 세 가지(해당 직업군 안에서 세부적인 역할이 달라지긴 한다). 주인공의 외모를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또 스토리 진행 중 나타나는 여러 선택지는 선택지별로 선, 악, 유머, 매력 등 다양한 성향을 표시했고, 향후 스토리 전개가 변하는 선택지의 비중이 줄었다. 선택지의 내용으로 고민할 부분이 줄어든 것이다. 심지어 동료들의 성장은 파티의 참가 유무 없이 동일하고, 장비들 중 갑옷은 캐릭터별로 고정해 호감도 관리를 빼면 동료에게 신경 써야 할 일이 줄었다(일부 동료는 무기까지 고정이다). 이렇게까지 게이머가 관여할 부분을 가지치기해서 게임을 가볍게 만든 이유는 딱 하나 말고는 설명이 안 된다. 바로 '편의성'이다. 무거운 게임이 재미있을지언정 더 편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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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으로 진행되는 이벤트. 그래서 피칠갑 모습으로 이벤트를 보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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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 내내 푹푹퍽퍽 치열하게 싸우는 묘사가 일품


이 편의성을 지향한 드에2의 장점이 빛을 보는 건 전투와 각종 안내다. 드에2의 전투는 액션 RPG처럼 전투 내내 직접 캐릭터를 조작하여 진행한다. 기존 RPG의 능력치, 지형에 따른 공방을 액션 게임 같은 화려한 연출로 즐기다보면 전투가 지루해질 틈이 없다. 전투가 이렇게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니, 각종 경우의 수를 조합하는 전략적인 플레이보단 때에 따라 즉각적인 상황 판단이 더 중요하며 전투 난이도가 게이머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게 됐다. 전체적인 전장의 모습만 잘 살펴봐도 전투를 쉽게 풀어나갈 수 있을 정도. 플레이어가 조작하는 캐릭터를 제외한 파티 동료들이 미리 설정한 작전에 충실한 점도 전투를 편하게 만드는데 일조한다(캐릭터마다 상세한 작전 명령을 내릴 수 있고 스킬 추가시 자동으로 작전이 갱신되니 가능한 일). 정 스피디한 전투가 버거우면 메뉴를 열어 게임을 잠깐 멈추고 전황을 살펴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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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도 어렵지도 않아 매우 재미있는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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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눈에 알 수 있는 캐릭터 육성


안내 시스템의 편의성은 RPG가 어렵단 편견을 한 방에 날려버릴 만큼 훌륭하다. 각종 NPC와 구조물부터 퀘스트 이동 지역까지 알려주는 맵, 한 눈에 보이는 직관적인 스킬트리와 능력치 설정, 언제든지 변경 가능한 난이도, 패드로 쉽게 조작 가능한 인터페이스 모두가 딱딱 들어맞는다(마우스를 써도 불편한 일부 RPG들은 본받으라고 일침을 넣고 싶을 정도). 스킬 단축 버튼이 최대 6개로 제한된 건 아쉽지만, 직접 메뉴를 열어 스킬을 쓰는 것조차 간단하기 때문에 큰 문제는 안 된다.

누굴 위한 변화인가
전통 판타지 RPG의 모범작이던 드에1이 이렇게 유행에 맞춰 가볍게 즐기는 게임으로 바뀌자 전작의 팬들은 엄청난 반발을 일으켰다. 갑작스런 변화를 받아드리지 못하고 폭력적으로 변한 게이머들이 문제가 아니라 드에2의 변화점이 그만큼 전작인 드에1, 나아가 RPG란 장르의 민감한 사항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RPG의 본분에 충실해 더 다양한 이야기와 캐릭터들이 등장해도 모자랄 판에 게임 진행은 대부분 도시 하나에 묶이고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낼 10년이란 장대한 세월을 툭 툭 끊어서 일부만 보여주니 기존 RPG 마니아들이 들고 일어나는 건 당연하다. 설상가상 게임 발매 직후 제작사 바이오웨어와 기존 팬 사이에 벌어진 알력 다툼은 점입가경의 경지를 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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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 내내 드에2가 RPG라고 하기엔 좀 가벼워서 괜찮을까 싶었다.
이런 느낌 자체가 RPG란 장르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단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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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게임 제작사와 게임 팬이 싸워서 남는 건 상처뿐


그러나 드에2가 가벼워졌다고 게임의 질이 떨어졌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즐기는 사람이 많아지도록 이루어진 변화가 게임을 망쳤다면 반대로 아무나 게임을 못 하게 하염없이 게임을 살찌워서 무겁게 만들어야지 게임의 질이 좋아지는 걸까? 과거 RPG가 다양한 역할극을 담아내어 인기를 끌었지만, 현재 게임계의 주류는 편의성을 기반으로 한 속도감 넘치는 게임들이고 알아야 할 내용들이 너무나 많은 RPG는 점점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물론 느긋하게 즐기는 게임을 좋아하는 고정 팬들이 있다). 그래서 MMORPG 등 다양한 변화가 RPG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데 드에2의 변화를 이러한 관점에서 평가하지 않고 그저 전작과 다르다거나 과거 RPG 성향을 잃었다고 폄하하는 건 드에2의 본질을 흐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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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머들이 광활한 대서사시 대신 한 지역의 드라마를 원한다면, 게임은 그렇게 바뀌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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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 존중과 취향 고집은 별개의 문제


드에2가 이끌어낸 변화는 분명히 게이머들이 게임을 더 쉽고 재밌게 즐기도록 도와준다. 박진감 넘치는 전투 시스템 변화는 말할 것도 없고 장황한 설정이나 스토리를 강요하지 않아 RPG를 처음 즐기는 사람에게 안성맞춤인 구성이다. 과거처럼 단순히 선과 악으로 나뉜 이분법 대립 구조를 버리고 여러 캐릭터들이 각자의 처지에서 얽히고 설키며 만들어가는 입체적인 드라마 연출, 그저 같이 싸우는 동료를 넘어서 대화와 퀘스트를 통해 교류를 쌓는 드에2의 커뮤니케이션은 스토리텔링을 선호하는 상당수의 게이머들에게 매력적인 요소다.

진짜 문제는 완성도다
드에2가 정말 비판을 받아야 하는 건 완성도다. 제작사 바이오웨어는 인터넷에서 캐주얼 팬베이스를 노린다는 걸 공언하면서 드에2를 가볍게 만들었지만, 정작 드러난 건 편의성을 가장한 게이머를 기만한 미완성 작품이다. 가장 먼저 지탄 받아야 마땅한 건 바로 버그. 대체 제대로 테스트는 하고 출시한 건지 의심스러울 만큼 산더미처럼 버그가 쌓였다. 오타가 나거나 문법이 안 맞는 문장은 애교다. 게임 시스템의 근본을 흔드는 버그들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티가 역력하니 미국판 '만들다 말았다'라 해도 할 말 없는 수준이다. 특히 게임 후반부인 Act.3에서 퀘스트, 아이템 습득 버그가 많아 뒷마무리를 안 하고 출시했단 의구심을 버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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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뭐 하시나요?"
"아, 퀘스트 보상 복사중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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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그가 퀘스트 보상 뻥튀기,
스킬 포인트 적립으로
끝났으면 말을 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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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를 든 상태에서 몸이 굳어 이벤트 내내
저 꼴로 있어야 하는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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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막바지에서 이렇게 게임이 멈추면
환장할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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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보상인 경험치와 골드가 특정 조건에서 계속 지급되거나(레벨에 따라 적들이 강해지기 때문에 남용하면 게임 진행이 불가능해진다)스테이터스&스킬 포인트 리셋 포션을 사용하면 세이브/로드 조건에 따라 포인트가 적립되는 버그는 게임이 더 편해질 수 있으니 넘어간다 쳐도 특정 동료의 버프가 해제될 시 영구적으로 능력치가 저하된다거나, 동료의 무기를 교체할 때마다 인벤토리가 줄어들어 복구가 안 되는 버그는 명백히 치명적인 버그. 이벤트에 따라서 강제로 버그를 뒤집어쓰는 경우가 있어 게임을 제대로 진행하기가 버겁다. 여기에 일부 퀘스트 진행이나 전후사정이 뒤죽박죽 섞이질 않나, 아예 퀘스트 진행이 안 되고 나와야 할 아이템이 안 나오기까지 하니 RPG란 장르 자체를 즐기기가 힘들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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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내내 보게 될 던전 디자인. 전부 같은 장소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이거 무서워서 살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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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트 1, 2, 3 모두 재미있어진다 싶을 때 끝나버린다


버그 말고도 미완성으로 내놓은 흔적은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가령 게이머가 원하는 편의성은 던전에서 불필요한 미로나 함정 없이 쾌적한 플레이가 가능한 공간이지만, 드에2가 보여준 건 일직선인 던전을 쓰고, 쓰고, 또 쓰다 가끔 입구와 출구를 바꿔도 맵의 구조를 외워버리도록 만들어버리는 지독한 재탕이다. 심지어 관계가 없는 퀘스트조차 같은 장소에서 몇 번이고 이뤄지니 게임에 감정이입을 할 수가 없다. 비록 게임의 배경이 하나의 도시라 해도 도시 내에 수많은 구역이 있는 만큼 몇 가지 구역을 재탕하는 행위의 근거는 못 된다. 전체적인 스토리 라인이 강산도 바뀔 10년이건만 이야기가 좀 진행됐다 싶으면 결론을 내고 다음 시간대로 넘어가 마치 처음과 끝만 강조하는 느낌이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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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내내 사자성어 '용두사미'가 생각났다. 마침 게임도 '용의 시대'니 딱 어울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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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드에2의 평가를 깎은 건 변화를 못 받아드린
게이머가 아니라 게임을 제대로 못 만든 제작사 탓이다


제작사 바이오웨어 측에선 4월 중으로 PC, PS3, XBOX360 기종 별로 약 100가지 버그를 고치는 패치를 발표했지만, 이미 게임을 진행한 세이브 파일에는 미적용이라 완전한 해결책이 못 된다. 게다가 이미 패치가 이루어진 기종에서 패치 후에도 해결되지 않는 버그가 발견되어 패치의 신용도가 더욱 떨어지는 상황. RPG의 새로운 모델로 자리 잡을 만한 게임이 제작사의 무성의한 관리로 가치가 떨어지는 건 참 안타까운 일이고 동시에 화가 나는 일이다. 훗날 드에2의 버그들이 전부 해결되고 맵팩 등 게임 내용이 확장된다면 발매 직후 쏟아진 게이머들의 평가를 재고해볼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드에2를 온전히 즐기기란 매우 고단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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