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P는 아직 살아있다. 원피스:로맨스 던 모험의 새벽

PS VITA의 등장 후 황혼기 소리를 듣는 PSP이지만 2013년에 들어서도 여전히 정식 발매 게임을 내놓으면서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그 첫 타자로 나선 게임이 인기 만화 원피스를 소재로 한 턴제 RPG 원피스: 로맨스 던 ~모험의 새벽~(이하 로맨스 던). 30가지가 넘는 원피스 원작 게임들 중 RPG가 생소한 장르는 아니지만(로맨스 던까지 포함하면 총 9가지) 원더스완 컬러, PS1, GBA 등 최소 두 세대 전 기종들에서 맥이 끊긴지 오래고, 기술과 기기 성능의 발전을 등에 업은 액션과 모험 장르가 원피스 게임의 흥행을 주도했단 점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이다. 현실의 벽에 부딪쳐서 그렇지 원피스란 원작을 게임으로 소화하려면 RPG보단 다른 장르가 더 적합하단 반증이 나온 마당에 액션 게임을 소화할 수 있는 PSP에서 굳이 RPG로 제작할 이유는 없으니까 말이다.

원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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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로맨스 던은 '나만 할 수 있는 모험이 있다'란 표어를 내세우면서 '원피스 체감 RPG'를 자청했다. 호언장담한대로 로맨스 던의 원작 재현은 아주 충실한 편. 아니, 게임의 다른 요소에게 영향을 받지 않도록 철저하게 분리시키면서까지 원작을 있는 그대로 따라가니 원작 나열이란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하늘섬, 데이비 백 파이트 등 일부 에피소드를 아예 빼기는 했어도 구현한 에피소드는 원작과 판박이. 명백히 레벨 디자인 오류라고 밖에 볼 수 없는 돈 클리크 보스전을 제외하면 일부러 전투를 피하지 않는 한 무난하게 메인 스토리를 즐길 수 있으므로 난이도 조절도 합격점이다. 스토리 진행이 애니메이션 작화를 배경삼아 캐릭터들의 얼굴 칸과 말풍선을 보여주는 방식이라 원작의 연출까지 재현하진 못 했어도 눈과 귀가 즐거운 30분 분량의 신규 작화 애니메이션을 수록한 원피스의 하이라이트 이벤트들이 그 역할을 대신하여 원피스의 매력을 느끼기엔 충분하다.

원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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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게임 본편은 본격적인 던전 탐험으로 만들었다. 여타 RPG에 등장하는 퀘스트와 서브 스토리, 기타 잔재미를 일절 배제하고(스토리와 상관없는 일반 던전이 퀘스트 포인트란 이름을 쓰긴 한다) 새 지역에 상륙하여 스테이지를 돌아다니는 탐험-탐험에서 만나는 적들과의 턴제 전투- 스테이지 클리어를 위한 보스전 세 가지에만 집중하여 원피스를 몰라도 게임의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 '그랜드 택틱컬 배틀'이라 하여 액티브 턴제로 시시각각 변하는 전황에 간단한 버튼 조작만으로 대응하는 전투 시스템은 강력한 필살기를 연속으로 사용하는 그랜드 체인처럼 전략성과 편의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데 성공하였고, 전투를 통해 캐릭터의 능력치 및 기술들이 성장해가는 변화가 체감하기 편해 반복 전투 또한 그다지 지루하지가 않다. 메인 스토리와 일반 던전을 돌아다니며 얻는 아이템으로 능력치나 외모가 변하는 액세서리를 다수 제작할 수 있어 스토리와 동떨어진 게임 진행임에도 동기 부여 역시 충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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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콘텐츠의 절대치가 부족한 문제는 게이머의 기선을 잡아두면서 해결하였다. 스테이지를 이동하는 중엔 아이템 합성과 상점 이용만, 던전 스테이지 안에선 탐색과 전투만, 스토리는 에피소드&이벤트 포인트에서만 진행도록 못 박아둬서 애초에 게이머가 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진행만 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얄밉다면 얄밉다고 할 법한 꼼수인데 탐험하면서 아이템을 맞춰가는 재미나 전투를 벌이며 성장하는 재미, 어느 쪽도 집중력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재미를 보장해, 게임 플레이를 방해하는 문제로 커지진 않았다. 데이터 인스톨을 기준으로 게임의 로딩 속도나 등장 캐릭터가 많아질 때 간간히 나타나는 프레임 드랍도 발생 시간이 길지 않아 퍼포먼스도 문제없긴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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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로맨스 던의 문제점은 다듬지 못 한 투박함에서 발생한다. 익숙해지기 전까진 재미있지만 어느새 기시감이 드는 단조로운 패턴을 고수하여 분량만 잔뜩 늘려가는 후반의 스테이지 구조, 상대의 HP를 겉모습만 보고 대충 파악하거나 아이템 합성 공식을 상당수 직접 연구해야하는 정보 제공의 부재, 그랜드 스트림 액션이란 이름으로 RPG랑 어울리지도 않고 원작을 잘 살려주는 것도 아닌 QTE(Quick Time Event) 도입으로 이질감을 불러일으키는 등 게임을 완성하기 전에 정말 이 게임에서 필요한 것인지, 게이머들이 좋아할 요소인지 검토해줬으면 하는 부분들이 게임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안 그래도 최대 1.8G 밖에 못 쓰는 UMD의 저장 용량에 30분 분량의 신규 애니메이션을 수록했는데 좀 더 선택과 집중으로 데이터를 알차게 사용했다면 지금의 로맨스 던보다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

원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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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원작을 훼손하거나 모욕하기까지에 이르는 재미없는 게임까지 나오는 복불복 캐릭터 게임 시장 속에서 로맨스 던의 일편단심 원작 중시와 재미에 충실한 던전 탐험 RPG 구현은 분명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철저하게 분리하는 과정에서 로맨스 던을 '원피스 체감 RPG'가 아니라 '원피스 스킨 RPG'로 완성해버렸단 평가를 피하기는 어렵다. 만약 로맨스 던이 원피스 캐릭터와 원피스의 묘사를 배제하고 오리지날 캐릭터를 내세웠어도 게임이 달라지지 않았으리라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로맨스 던에서 게임 본편과 원피스란 원작이 동떨어져있다. 명색에 캐릭터 게임이라면 다듬기 힘든 요소를 아예 가지치기 하고 남은 자리에 게임 본편과 원피스를 조금이라도 더 엮어주려고 노력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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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로맨스 던이 원피스란 원작과 동떨어지는 걸 감수하면서 충실한 던전 RPG를 담아 원작 원피스가 게임 플레이보다 중요한 게이머가 아니라면 큰 불만이 생길 일은 없다. 가볍게 메인 스토리만 정주행해도 좋고(난이도도 무난한 편이고, 2회차 특전과 변화가 적어 굳이 1회차에서 다 챙길 필요가 없다) 시간 날 때 틈틈이 항로를 열어나가 던전을 제패하거나 아이템과 전투로 캐릭터를 성장시키면서 길게 놀아도 좋은 게임이다. 원피스 세계에서 일어난 일들을 지켜본다는 의미라면 지금의 로맨스 던도 원피스 체험 RPG이란 표어가 부끄럽지 않다. 어쩌면 로맨스 던의 아쉬운 부분들은 필자의 투정일지도 모른다. 더 재미있는 게임으로 원작에 더 다가가고 싶어 하는 원작의 팬이 남기는 그런 투정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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