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갈라파고스 RPG 프로젝트. 페어리 펜서 F

갈라파고스. 이 세계의 대세와 따로 놀며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시장에 대해 비판 섞인 비유는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뉴스 등 공식 석상에서도 사용하는 보편적 표현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와 일본 양국의 게임 시장이라고 저 갈라파고스란 단어에 자유롭지 못 하여 이따금 비판이 나올 때마다 등장하여 눈에 익은 게이머들도 많을 터. 그런데 컴파일하트는 아예 이 갈라파고스를 프로젝트의 방향으로 삼아버리는 파격을 저지른다. 이것이 월드와이드 전개 같은 거 알 바 아니라며 특정 유저를 위해 제작한 RPG, '갈라파고스 RPG 프로젝트'이다. 이 갈라파고스 RPG 프로젝트의 첫 타자를 이번에 소개할 '페어리 펜서 F'(이하 페펜F)가 맡게 되었는데 자칭 장르가 '정통파 RPG'. 의미심장하다.

페어리펜서f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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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매 전에는 일본만이 만들 수 있는 일본의 정통파 RPG를 표방하며 자사의 인기 브랜드인 초차원게임 넵튠 시리즈 제작진과 함께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의 거장 아마노 요시타카(일부 원화)와 우에마츠 노부오(작곡), 헤이세이 라이더 시리즈를 비롯한 일본 특촬물과 애니메이션의 시나리오를 다수 맡은 이노우에 토시키(각본), 넵튠 시리즈를 비롯하여 여러 작품에서 일러스트레이터를 맡고 있는 츠나코 여사(작화) 등을 영입하여 관심을 끄는데 성공했고, 발매 후에도 괜찮은 평가와 유명세에 힘입어 정식 현지화 발매에 이르렀다. 패키지만 보면 'Boy meets Girl' 클리세에 일본산 RPG의 단골 소재 운명이니 미래이니 하는 걸 보면 분명 취지에는 부합해 보이는데 그 개성만큼이나 과연 재미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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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으로 들어가 첫인상과 전체적인 틀을 보면 컴파일하트의 넵튠 시리즈를 안 떠올릴 수가 없다. 일단 일러스트레이터부터가 같고 3D 폴리곤 퀄리티가 대동소이하다거나(연출은 더 화려해졌다) 턴제+입력 버튼 순서로 공격 패턴 조합하는 전투와 콤보시스템, 능력치가 올라가는 변신의 존재, 게이머의 선택으로 특정 던전에서 특수 효과 발생, 정해진 전투를 이겨가면서 보상을 챙기는 도전 모드까지 넵튠 시리즈를 해왔던 게이머라면 기시감을 느끼게 된다. 대신 그대로 가져온 것들은 하나도 없으며 본편에 맞게 세세한 밸런스 조정을 한 결과 페펜F에 와서는 안정적인 시스템으로 정착해 게이머가 굳이 손해 보는 점은 없다. 또한 능력치를 향상시킬 때 필요한 WP 포인트나 이것을 사용하는 강화 시스템, 특정 행동을 반복하여 업적 획득과 함께 소소한 능력치 상승, 무기에 장착하고 장착자와 함께 성장하며 능력치와 어빌리티를 부여하는 요성의 존재 등 단순 계산으로는 공부해야 할 내용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게임 안에서 해주는 간단한 설명, 플레이만으로 저절로 적응케 하는 디자인이 인상적이다. 갈라파고스라지만 그 안에서 쌓아온 노하우들이 세계와 비교할 때 결코 모자라지 않다는 걸 증명하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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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플레이의 흐름은 20세기 이전의 일본 RPG들, 그리고 여기에 영향을 좀 많이 받은 90년대 초중반의 국산 RPG들과 매우 흡사하다. 하나의 거점에 터를 마련하고는 개인적인 목표를 위해 퀘스트를 받고 정보를 모으기 위해 마을 사람들과 전부 말을 걸며 바깥으로 나와선 동료들을 만나고 스토리 진행에 필요한 아이템을 수집하기를 반복하다 점점 스케일이 커져가는 이 흐름은 이제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몇 몇 일본산 RPG 시리즈에서나 만날 수 있는 추억 속의 그 플레이 패턴들. 속된 말로 뺑뺑이라고 부르던 그것들이다. 그렇다고 불편하기만 하던 과거의 유물을 그대로 갖다 쓰진 않고 거점을 던전처럼 돌아다닐 필요 없이 바로 NPC를 선택해 대화한다든가 쓸데없이 퀘스트에 필요한 정보를 숨기는 일도 없고 무엇보다 특정 구간에서 반복 전투로 캐릭터 육성을 강요하는 난이도 급상승이 없어서 스토리를 따라가는 느낌이 강하지 반복 패턴에 따른 흥미 저하는 그다지 없다. 난이도 급상승이 없으면서 전반적인 전투 난이도 역시 무난하여 굳이 플래티넘 트로피를 노리지 않는다면 도전 모드인 슈스케의 탑 정복이나 퀘스트 랭크를 올리는 수고 같은 건 불필요. 후반에 등장하는 런처 어빌리티를 비롯한 다단히트 기술들로 무장해 시작부터 텐션 게이지를 충전한 다음 시작부터 클라이맥스를 알리는 페어라이즈&보컬 BGM 재생을 앞세워 돌진하면 스트레스 하나 받지 않고 엔딩까지 일직선이다. 컴파일하트가 권장하는 DLC 구입으로 치트에 가까운 고성능 방어구와 무기에 장비하는 요성까지 더하면 페펜F의 장르가 “바쁜 현대인을 위한 RPG”로 바뀔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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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플레티넘 트로피 획득을 비롯하여 게임에 있는 콘텐츠를 전부 즐겨보기로 마음먹으면 갈라파고스 RPG 페펜F의 숨은 면모가 드러난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지긋지긋하게 게이머들을 괴롭히는 이 확률 놀음. 과거에 플레이 시간 늘리겠다고 고육직책으로 넣은 것을 컴파일하트 역시 예산절약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 형태로 확률 놀음을 강요하여 게이머를 괴롭힌다. 퀘스트의 절반 이상이 토벌한 몬스터로부터 얻거나 훔치기(이마저도 확률 놀음인데 성공 보정치가 매우 낮을 뿐더러 훔치기를 할 수 있는 캐릭터가 전체 아군 캐릭터 8명 중 기본1명에 조건부 후반 영입 캐릭터 1명이 전부라 고통 받기 딱 좋다)로 해결해야 하는 것은 기본, 이전까지 기본적으로 제공했던 CG 갤러리와 음악 감상도 저런 아이템 수집으로 해결해야 한다. 특히 퀘스트 랭크 A를 만들기 위한 지긋지긋한 돌멩이 수집은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고 보람도 없는 전형적인 게이머 괴롭히기용 퀘스트라(S랭크에 필요한 토벌 퀘스트가 더 편하다니 말이 되는가) 페펜F의 갈라파고스 요소가 가장 안 좋은 방향으로 대폭발했다고 밖엔 설명할 길이 없다. 그밖에 트로피를 위해 억지로 공중 추격을 반복하거나 쓸 일도 없는 골드를 모으기 위해 DLC 던전의 힘까지 빌려야 하는 등 게임을 깊게 즐기기 보다는 반복해서 달성해야하는 부분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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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빛과 그림자 속에서 페펜F가 게이머를 유혹하고 게이머 역시 언제나 마음의 평안을 느끼는 부분은 매력적인 캐릭터들에 있다. 캐릭터 자체는 매우 뻔하다. 게이머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 믿음과 신뢰의 금발 미청년 신사부터 잠재력은 뛰어난데 생각이 없는 먹보 주인공, 주인공을 부리려는 까칠한 히로인, 애증에서 출발해 호감으로 끝나는 파트너, 겉으론 멀쩡한데 속은 매드 사이언티스트, 인간인지 의심되는 개그 담당, 똘마니, 수전노, 턴 페이스 등등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에서 으레 등장하는 역할들을 각자 맡아 딱 그만큼만 말하고 행동하며 스토리를 이끈다. 그러나 뻔한 캐릭터들이 모여서 무조건 재미없다면 ‘왕도’란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뻔하면 어떠랴 각 캐릭터들의 인간군상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스토리 줄기를 따라가면서 각자 캐릭터를 어필하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게이머를 홀리는 페펜F의 스토리는 분명 왕도의 그것이다. 스토리가 전반부와 후반부를 결정짓는 전환점을 거치고 나면 캐릭터들이 가지는 매력들이 더욱 숙성되고 게이머와 끈끈히 이어져 페펜F에 빠지도록 한다. 게임 각본을 맡은 처음 맡은 거라 생각하기 어려운 이노우에 토시키의 내공이 느껴지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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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가면라이더 시리즈의 각본을 맡을 때의 안 좋은 버릇이 여전히 남아 있어 이따금 캐릭터가 돌변한다든가 분명 전개에 따라서는 심각해지거나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을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하다는 듯이 얼버무리질 않나 앞에 했던 이야기와 뒤에서 이어지는 전개가 안 맞는 설정충돌이 벌어지질 않나 게이머를 아리송하게 만드는 부분이 잊을만하면 튀어나온다. 여기에 같은 장소에서 메인 이벤트와 서브 이벤트가 동시에 발생할 때 사라지는 개연성, 이벤트에서 다음 이벤트로 넘어갈 때의 끊기는 감각, 대체 이 이벤트가 왜 이 타이밍에 터져야 하는가 싶은 뜬금포 등등 전체 각본은 괜찮은데 그 과정에서 흠이 나타나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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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진 또한 남 말 할 처지가 아니다. 기껏 큰 포부를 가지고 거물들을 모셔와 놓고는 넵튠 시리즈에서 보여줬던 몬스터 색칠놀이와 같은 맵을 방향과 입구 위치만 바꿔가며 우려먹는 재활용 정신을 못 버렸다. 뛰어난 원화에 검증 받은 작화, 훌륭한 왕도 시나리오와 캐릭터, 반복 작업 할 때도 질리지 않는 OST 등 그동안 제반사정상 어려웠던 목표들을 성공적으로 일궈놓고 안 좋은 옛 버릇을 남기니 본새가 나질 않는다. 오죽하면 플레이 과정들을 복기했을 때 시나리오의 전환점마저 이러한 절약 정신에 영향을 받았나 싶을 정도겠는가. 덕분에 같은 모습에 색깔만 달라도 능력치, 드랍 및 훔치기로 얻는 아이템, 퀘스트 대상 여부가 바뀌어 매번 에너미 정보를 확인하기 일쑤고 던전을 돌아다니는 건 지역을 답파하는 느낌보단 집 앞 공원을 한 바퀴 도는 기분이다. 전대미문의 일방통행 던전도 게이머 괴롭히기용 미로도 바라지 않으니까 조금만 더 성의를 가지고 신경 써줄 순 없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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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페펜F을 재미있다. 이게 중요하다. 문제도 있고 실망한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플레이 내내 즐겁게 재미있게 시간 가는 줄 모른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준수한 완성도와 더불어 던전과 캐릭터 육성 그리고 전투 커맨드의 자유로운 조합이 플레이 시간이 20시간, 30시간이 넘어가도 지루하지 않게 해준다. 더욱이 모자람 없는 현지화를 거쳐 언어의 장벽을 해소한 RPG란 점 역시 대한민국 게이머로선 호감이 생길 수밖에. 플래티넘 트로피까지 가지 않아도 엔딩이 3종류로 나뉘어져 있고 2회차 이후에서는 새로운 전개도 있겠다(정확히는 1회차에서도 가능하지만 자기 고행 없이는 힘들다) 한 번 보고 또 봐도 만족스러운 스토리 전개가 있으니 추천감이 따로 없다. 취지와 포부에 충분히 부합한 컴파일하트의 역작, 그야말로 페펜F을 위한 평가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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