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부활한 파괴의 미학. 길티기어 이그저드 사인

이제는 스트리트파이터와 함께2D 대전격투 게임의 대명사로 자리하고 있는 길티기어 시리즈는1998년 플레이스테이션1 게임으로 처음 등장했다. 초창기에는 메탈 풍의 배경음악과 독특한 캐릭터가 눈에 띄는 좀 컬트한 느낌의 매니아 게임이었지만 2년 뒤 아케이드용으로 발매된 길티기어X가 그 당시 보기 드문 고해상도 그래픽으로 게이머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면서 인기 게임 시리즈로 자리잡았다.

한국에서도 길티기어X 드림캐스트판을 컨버팅한 PC버전에 이어 스토리를 더한 PS2용 길티기어 젝스 플러스, 콘텐츠를 대폭 추가한 PS2용 길티기어 이그젝스 샤프 리로드 등이 연이어 출시됐으며, 특히 길티기어 이그젝스 샤프 리로드는 이제는 고인이 된 가수 신해철이 한국판 BGM을 아예 새로 만드는 등 많은 공을 들여 엄청난 인기를 얻기도 했다. 심지어 길티기어 이그젝스 샤프 리로드 한글판 OST는 일본으로 역수출되는 현상까지 일어날 정도였다.

하지만, 이후에 등장한 신작들은 그저 캐릭터만 조금씩 늘었을 뿐 별다른 발전을 보여주지 못하고 전형적인 우려먹기 게임으로 전락했다. 물론 중간에 독특한 4인 동시 대전 기능을 넣은 이스카가 등장했었고, 2007년에는 갑자기 격투 장르를 버리고 3D 전략 액션으로 변신한 길티기어2 오버추어 라는 게임도 나왔지만 팬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이후 개발사인 아크시스템워크가 길티기어 판권을 잃고 블레이블루라는 대체 시리즈를 탄생시키면서 길티기어 시리즈가 끝나는가 했지만 극적으로 판권을 다시 찾아와 다시 부활시켰으며, 지금 소개할 게임인 길티기어Xrd SIGN은 애니메이션을 연상케 하는 고품격 그래픽으로 다시 예전 명성을 되찾아가고 있다.

길티기어 젝스 시절부터 고품격 2D 그래픽으로 유명한 시리즈였지만 그 이후에 보인 모습은 다소 실망스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새로운 작품이 나와도 기존 작품에서 콘텐츠를 조금 추가한 수준에서 그치다보니 게임명만 길어질뿐 별다른 변화를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신 기술로 새롭게 만들어진 길티기어Xrd SIGN은 다시 고품격 그래픽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나타났다.

길티기어Xrd SIGN의 그래픽은 이전과 같은 2D처럼 보이지만 언리얼 엔진3로 만든 3D 그래픽을 다시 2D로 전환한 것이다. 강력한 필살기를 사용하면 화면 구도가 3D처럼 변하면서 화려한 전개를 보여주고 승리나 패배 시에도 다른 장면으로 때우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화면이 이동하면서 캐릭터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말 그대로 2D의 장점을 유지하면서 만든 3D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다. 3D로 게임을 만들고 그것을 2D로 보여주는 것은 스트리트 파이터4가 이미 선보였던 기술인 만큼 혁신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길티기어Xrd SIGN의 그래픽은 스트리트파이터4에 비해 훨씬 세련된 느낌이다. 길티기어 시리즈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애니메이션 화면으로 착각할 수도 있을 정도다.

특히, 이런 느낌은 스토리 모드에서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길티기어Xrd SIGN의 스토리 모드는 아케이드 모드를 클리어하면 나오는 엔딩의 뒷 얘기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스토리 모드라고 하면 일단 대결을 한 뒤 이기거나 지면 그에 해당하는 뒷 얘기가 이어지는 형태가 일반적이지만 길티기어Xrd SIGN의 스토리 모드는 대결이 없고 그냥 보기만 하면 되는 애니메이션 같은 형식이다. 조작이 없다보니 조금 심심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화려한 화면과 인상적인 스토리 덕분에 보는 맛이 있으며, 길티기어 이그젝스 샤프 리로드 이후 10년만에 한글화되어 발매된 덕분에 인상적인 스토리를 아무런 문제없이 즐길 수 있다. 물론 한번 보면 다시 볼 일이 없겠지만.

또한, 매번 전작의 것을 재활용해서 불평불만이 자자했던 배경 음악도 이번에 Xrd 오리지널 음악으로 싹 바꿔버려서 전작을 해봤다고 해도 새로운 느낌으로 즐길 수 있다.

3D로 만들어지긴 했지만 그것을 다시 2D로 전환시켰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개틀링 콤보, 로망 캔슬 등 시리즈를 대표하는 시스템을 모두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시리즈 팬이라면 아무런 문제없이 적응할 수 있다. 다만, 예쁜 화면만 보고 호기심이 생겨 이 게임을 구입한 사람이라면 문제가 된다. 기술을 익히기 위한 트레이닝 모드, 실전에서 자주 생기는 상황을 재현하는 미션 모드, CPU를 쓰러트리면서 메달을 모으는 M.O.M 모드 등 혼자서 연습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제공되기는 하나 마음의 준비 없이 네트워크 모드에 들어갔다가는 길티기어 젝스 시절부터 꾸준히 연습을 해온 고수들의 먹잇감이 될 뿐이다. 조이스틱이라도 있다면 조금 낫겠지만 그냥 게임패드만 가지고 있다면 더더욱. 대중화된 철권과 달리 마니아만 즐기는 버추어파이터 시리즈가 그렇듯 이 게임도 예전부터 즐겨온 마니아들이 많아 그들이 초보자들에게 넘을 수 없는 진입장벽으로 자리잡고 있는 상황이다.

난이도 문제야 본인의 실력에 달린 것이니 논외로 하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여러모로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어 만족스럽지만, 몇가지 아쉬운 점이 있긴 하다. 작업시기가 촉박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후속작이나 DLC 판매를 고려한 것인지 쿠라도베리 잼, 바이켄, 미토 안지 등 기존에 등장했던 캐릭터들이 대거 삭제됐다. 신규 캐릭터가 추가되기는 했지만 삭제된 캐릭터가 더 많다보니 전체적으로는 게임의 볼륨이 줄어든 듯한 느낌이다.

또한, 일본판에는 있는 라이브러리 항목이 한글판에서는 삭제됐다. 라이브러리는 길티기어 시리즈의 설정, 스토리, 용어 들이 들어 있는 것으로, 길티기어 시리즈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유용한 항목인데, 워낙 많은 텍스트이기 때문에 번역이 어려웠는지 삭제됐다. 게임을 즐기는데 문제가 되는 항목은 아니지만 워낙 이 게임이 진입장벽이 높다보니 초보자들이 좀 더 쉽게 길티기어의 세계에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콘텐츠가 삭제된 것이 더욱 아쉽게 느껴진다.

이렇듯 길티기어 Xrd SIGN은 길티기어 시리즈의 부활을 알리는 게임답게 상당히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발매됐다. 몇가지 아쉬운 점이 있긴 하나 나머지 장점들이 그 단점을 충분히 덮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나다. 이 작품을 계기로 앞으로 나올 후속작들도 꾸준히 한국에 정식 발매돼 길티기어 시리즈 팬들이 좀 더 늘어나길 바라며 이만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