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와 감상의 괴리, 영웅전설 섬의 궤적2
2014년 7월, 필자는 일본의 게임개발사 팔콤에서 제작하여 현지화 정식발매가 성사된 PS3용 RPG ‘섬의 궤적1’을 마치며 실망과 기대가 동시에 생기는 경험을 하였다. 하는 내내 즐거운 게임 플레이와 그 과정에서 펼쳐진 매력 넘치는 메인&서브 스토리에 빠져들었고 동시에 이런 게임을 개발할 능력을 가지고 다분히 고의적인 끊어먹기로 논란을 자초한 그 괘씸한 시도가 양립할 수 없는 두 감상을 섞어버린 것이다. 다음 내용은 정식발매 날짜로부터 3개월 뒤로 예정되어있던 ‘섬의 궤적2’(이하 섬궤2)에서 다룬다고 예고가 나온 바, 필자의 경우 막판의 폭풍전개에 기다리던 2달간 호기심과 답답함으로 속이 탔으니 2013년 9월부터 섬의 궤적1을 플레이한 일본 게이머들의 심정은 오죽했으랴. 그렇게 한일 양국의 게이머들을 괴롭히던 팔콤이 섬궤2를 발매하자 섬의 궤적1을 플레이 했던 게이머들은 오프라인, 온라인 가리지 않고 종적을 감추어 섬궤2에 달려들게 된다. 필자 역시 그 무리에 섞여서 발매 후 1주일은 정말 아무 것도 안 하고 섬궤2만 매달렸다. 플레이 시간 73시간. 기록된 시간 전부를 플레이에 쏟지는 않았으나 발매 직후에 사전 정보 없이 플레이한 것치곤 평균보다 더 열심히, 많은 내용을 확인했다고 자신한다.
그리고 이 73시간의 플레이 대부분은 수 년 간 거친 RPG 중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좋은 경험이었다. 그 원동력은 게임 안에서 펼쳐지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가능/불가능이 분명하게 정해져있어 선택과 집중이 가능한 플레이 패턴에 있다. 게임에서 등장하는 사람들, 주연 캐릭터들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을 돕는 조연, 나아가 마을 안에 자리 잡아 게이머에게 말 한 마디 던지고 마는 엑스트라 NPC에게까지 배정된 각자의 이야기와 그것들이 모여 완성되어가는 ‘에레보니아 제국’ 동부의 모습은 전편보다 더 방대해졌으며 보다 자세해졌다.
전편의 그 마무리로 인해 뿔뿔이 흩어진 동료와 학우들을 찾아가는 주인공의 행적을 중심으로 한 내전 묘사를 통해 게이머는 전편 이상으로 감정이입하게 된다. 동료들과 조금이라도 빨리 재회하고픈 마음부터 전편과 같은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내전으로 인해 뒤틀린 광경을 보며 생기는 안타까움, 작중 때때로 나타나는 내전의 폐해, 수혜자와 피해자의 대비, 서로 다른 입장과 정의의 충돌, 혼란 속이기에 더욱 빛나는 학생들의 분투에 이르기까지 팔콤은 어떤 묘사와 과정이 게이머의 마음을 흔드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서장을 시작으로 1장을 거쳐 막간을 지나 2장을 끝내고 종장에 다다르는 동안 무리수 없이 게이머를 이끄는 스토리를 선보이는 한편 캐릭터들의 매력이 너무 뛰어나다보니 다른 게임이었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자잘한 아쉬움들이 더 크게 느껴지는 면모마저 있다. 1장 막바지에 갈등을 풀어가는 과정, 2장 중반 하루가 급한 내전 상황 속에서 소재 구한다고 제국 동부를 유랑하는 여유, 틈틈이 묘사하는 주인공을 비롯한 학생들의 동기 등 게이머에게 동의를 구하거나 설득하려는 모습 하나 없이 자기들끼리 수긍하고 넘어가는 낌새는 게이머의 감정이입을 돕는다고 감싸주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러나 이것은 보다 완벽한 개연성을 바라는 게이머 입장에서 나타날 수 있는 아쉬움이지 섬궤2의 단점으로 치부하기엔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 한다. 일찍이 비슷한 성향의 작품을 경험했다면 클리셰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준이며 이런 걸 비판 대상으로 삼기엔 게이머가 보고 듣고 즐겨야 할 이야기가 너무나 많아서 어딘가 적어놓지 않으면 금방 잊어버릴 정도다. 엑스트라의 일대기를 놓치지 않겠다고 이동 가능한 지역을 정기적으로 돌아다니며 마라톤하기 바쁜 게이머들에겐 더더욱 대수롭지 않은 부분.
이 부분에 대해선 플레이에서 느끼는 재미가 결정적 역할을 해주고 있다. 단순히 할 일이 많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섬궤2의 플레이 패턴은 전작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며 대상 캐릭터만을 심도 있게 묘사하는 인연 이벤트, 메인 스토리를 진행하면서 짬짬이 해결하는 서브 퀘스트의 비중이 줄어들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섬궤2가 재밌는 까닭은 명확한 방향성과 추진력 덕분이다. 게이머는 전작의 주 무대였던 ‘토르즈 사관학교’의 재건과 내전 종식이란 1순위 목표를 위해 플레이하기 때문에 전작 같은 다채로운 이벤트가 없어도 분명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만 받는다면 그 다음이 궁금해 몇 시간이고 붙잡을 수밖에 없다. 팔콤은 이 부분을 정확히 노려서 플레이 내내 목표를 상기시키며 스토리 흐름을 여기로 귀결시켰고 덕분에 진도가 안 나갈 때마다 짜증이 나면 났지 콘텐츠 부족을 성토할 겨를이 없다. 섬궤2에 집중하다보면 분명 설득력이 떨어지는 개연성임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스토리나 캐릭터 육성을 위해 필요할 테니까’라며 스스로 수긍하는 자신을 쉽게 볼 것이다.
플레이에 추진력을 실어주는 전투 시스템 쪽은 전작의 데이터를 대부분 재활용해 외형의 변화를 포기한 대신 대대적인 밸런스 조정으로 변화를 노렸다. 일단 여타 RPG의 체술에 해당하는 ‘크래프트’와 마법에 해당하는 ‘아츠’의 위상이 많이 바뀌었다. 전작에서 전장을 호령하던 크래프트 쪽은 적들의 회피율을 높이는 동시에 위력을 책임지던 쿼츠, 장비의 효능이 바뀌며 활용 방법이 바뀌었고 아츠 쪽은 첫 공격의 위력을 두 배로 높이는 ‘폭포’ 등 쿼츠의 추가, 환수를 토벌하면 사용할 수 있는 고성능의 로스트 아츠 등장, 아츠 사용에 따른 제약 완화 등으로 상향 되었다.
그렇다고 이번엔 아츠의 세상이 온 것은 아니고 회피로 크리티컬 발생, 일부 크래프트 성능의 강화, 그리고 ‘오버라이즈’라 하여 단기간 동안 캐릭터의 스테이터츠를 회복하고 능력치를 강화하는 수단이 생기면서 어느 쪽이 강하다기 보단 전투 전체가 공방을 주고받는 대신 단번에 밀어붙이며 속전속결로 끝내는 경향이 강해졌다. 적들의 공격력이 강해져 방어성향이 양화된 이유 역시 이러한 기획 의도의 결과라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전작의 마지막에 맛보기로 등장한 기신전 역시 동료의 서포트를 받도록 바뀌어 더 쉬워졌다. 나쁘게 말하면 밸런스 붕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가능한 밸런스 구현이 어렵다면 차라리 이번 섬궤2처럼 게이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방향을 틀어서 전투에 발목 잡히지 않는 쪽이 플레이를 위한 추진력을 얻기엔 더 적합하다. 만약 전투가 여기서 더 어렵거나 고민해야 했다면 섬궤2의 플레이를 ‘재밌는 RPG’라 단정하지 못 했을 것이다. 섬궤2의 플레이 패턴과 동기부여의 조화는 재밌는 게임의 모범답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하여 일주일 내내 플레이하며 이윽고 종장을 끝마친 필자의 감상은 딱 한 마디였다. “우롱당했다.”. 자괴감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는 막판 전개와 메시지는 단순히 화나는 것을 넘어 게임을 플레이하는 행위 자체를 후회하게 만드는데 충분했다. 이딴 걸 보려고 일주일을 바쳤단 말인가. 지금 돌이켜보면 종장에 다다르면서 그 낌새는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다. 2회차 특전이 아니면 전부 살펴볼 수 없는 인연 이벤트에 너무나 중요한 내용이나 설정을 풀어놓고는 메인 스토리에선 비중이 사라지는 주연들의 모습하며, 게임의 끝이 다가오고 있는 게 뻔히 보이는데 해결되는 이야기보다 쌓이는 이야기가 더 많지, 얼토당토않은 면죄부를 남발하질 않나 더해서 점점 판에 박혀가는 연출들까지. 플레이 할 당시엔 그동안 즐겨왔던 퀄리티가 있으니 믿는 마음으로 애써 무시했으나 전부 복선이었다. 뜬금없는 무리수를 동원해가며 억지로 밀어붙인 아무 것도 안 남는 이야기. 게이머를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달려가다 넘어지며 닿지 못 한 결말. 제작진이 손수 나서서 게이머의 플레이가 무의미했고 무가치했다 인증해주는 용두사미의 극치. 이런 피날레를 위한 조짐 말이다. 어쩌면 전작의 엔딩은 이를 위한 예행연습이었을지도 모른다.
머리가 완전히 표백당한 상태로 이어지는 외전과 후일담은 더 가관이었다. 동선 자체가 짧아서 그렇지 종장 마지막 던전보다 더 복잡한 외전의 던전 구조와 무작위로 길이 바뀌는 후일담의 던전 구조 같은 건 나중 문제였다. 그동안 궤적 시리즈를 즐겼다면 아니, 멀리 안 가고 2012년 PS VITA용으로 정식 발매한 ‘영의궤적 에볼루션’만 플레이했어도 사약 한 사발 들이키는 느낌의 외전 스토리 플롯, 뭘 잘했다고 자기들끼리 웃고 울며 마무리 짓는 후일담의 캐릭터들은 정말 가관이다. 정작 가장 큰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게이머는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짓밟혀 방치중인데 말이다. 외전에선 전작 캐릭터들의 풀3D 모델링, 후일담에선 그동안 스쳐지나갔던 동료들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단 존재의의가 있으나 종장이 끝난 시점에서 이미 제작진에게 뒷수습할 의지는 조금도 없었기 때문에 명백한 사족이다. 후일담에서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고 실토하는 연출을 보고 있자면 제작진 스스로도 자기들이 어떤 게임을 만들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섬궤2를 끝내고 약 2주 동안 그 어떤 게임도 건들지를 못 했다. 어떤 게임을 해도 섬궤2처럼 한 번 뿐인 내 시간을 낭비하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필자의 경우 섬궤2 바로 직전에 한 게임이 겉만 멀쩡하고 총체적 부실로 사람 잡던 G사의 20주년 기념작 RPG였기에 그 후유증은 더했다. 그러다가 혹시 플레이에 문제가 있었나 확인하기 위해 당시 공개된 공략들과 다른 게이머들의 감상을 마구잡이로 긁어모았다. 그 결과 필자의 증상은 더 나빠졌다. 게임의 이해와 몰입에 반드시 필요한 내용들을 인연 이벤트나 숨겨진 퀘스트에 몰아넣어 2회차, 3회차 플레이를 강제한 것도, ‘체호프의 총’은 알 바 아니라는 태도로 일관하며 복선 쌓기에 급급한 것도, 게임 플레이를 부질없게 만드는 그 마무리도,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위해서라면 게이머는 안중에 없다는 것도 전부 팔콤과 그 휘하 제작진들의 꿍꿍이였다는 것이 밝혀질 때마다 몇 년간 평안했던 복창이 몇 번이고 터지는 경험을 해야 했다.
혹시나 싶어 앞서 적자면 섬궤2를 플레이하고 작품을 분석하거나 다음을 예상하는 게이머들을 폄하할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다. 섬궤2를 플레이하고 거기서 유의미한 결과물을 뽑아내려는 그 시도는 게임을 하나의 문화로서 향유하는 모범적인 태도이며 부러운 동시에 칭찬하고 싶은 모습들이다. 그러나 이런 모습과 그 시발점인 섬궤2를 비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게임이란 모름지기 경쟁을 통해 우월한 결과와 보상을 받는 과정이 필수다. 경쟁이 다른 게이머와의 경쟁이냐, 게임(혹은 제작진)과 게이머와의 경쟁이냐, 나 스스로와의 경쟁이냐의 차이일 뿐 이 세상에 경쟁이 없는 게임은 없다. 또한 보상이 거쳐온 경쟁과 비교했을 때 턱없이 부족한 게임 혹은 경쟁에서 게이머를 이기려드는 게임을 보고 우리는 저질 게임이라 부른다.
그럼 섬궤2를 보자. 처음부터 게이머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경쟁에서 지도록 설계하며 부정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게이머의 면전에다 보상은 한 푼도 없다 선언해버린다. 단순히 제작진의 능력 부족이었으면 체념이라도 하지 종장에 이르기까지의 스토리의 큰 흐름을 설계하는 능력은 물론이요 내전에 희생당한 민간인들의 묘사나 NPC를 통해 입장이 다른 대국과 소국을 비교하는 묘사처럼 디테일을 챙기는 능력까지 겸비한 섬궤2의 제작진들이 게이머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를 능력 없어 못 만들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안 한 거다 이건. 저질을 뛰어넘는 악질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섬궤2에서 제작진이 담고 싶었던 메시지와 의도를 높게 쳐주는 평가가 나올 텐데 이 시도만 놓고 보면 필자 역시 동의하는 바이다. 10년 넘게 이어가는 장기 프로젝트에서 한 번쯤은 해볼 법한 새로운 도전, 시리즈의 전환점으로 삼을만하다. 하지만 전편을 그렇게 끊고 게이머들을 1년 속앓이 시킨 이 타이밍에선 하지 말아야 했다. 게임이 우습나? 게이머가 만만한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쏟아내고 끝내는 건 학예회에서나 할 짓이다. 놀이를 사고파는 상업 시장의 형성과 함께 게이머와 게임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게임이 하나의 문화로 정착해가는 지금 시대에 와서 이 따위의 행태는 좋게 봐주기 어렵다. 게이머는 소비자이며 게임과 어깨를 함께하는 동반자이다. 게임은 게이머가 플레이 하면서 가치가 생기는 상품이자 작품이거늘 이런 게이머를 무시하는 섬궤2를 무작정 용인한다면 필자는 더 이상 게임을 ‘문화’라고 주장할 자신이 없다. 상하관계를 강요하면서 자기들은 마음 내키는 대로 뒷수습 없이 일을 벌이고 따라올 게이머만 따라오라는 식으로 배짱부리는 섬궤2의 무례한 방법론 어디에 문화가 있고 사람이 있단 말인가. 여태껏 사람들에게 저질 게임이라 욕먹은 수많은 게임들이 게이머들의 플레이를 외면하면 외면했지 섬궤2처럼 모멸하지는 않았다. 괘씸한 짓도 정도껏 해야지.
그런 의미에서 섬궤2는 플레이하는 재미는 보장하지만 도저히 누구에게 추천할 수 없는 작품이 되겠다. 수만 명에 이르는 게이머의 멘탈을 산산조각 냈음에도 계속 입에 오르내리는 매력적인 캐릭터 조형, 더할 나위 없는 RPG에 적합한 스토리와 시스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믿음직스러운 음악, 개선된 3D 모델링&모션을 가지고 이런 마무리를 지을 때 제작진들은 과연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동안 해왔던 것이 있으니 당장의 비판을 걱정하기보단 앞을 내다보는 자기들의 혜안에 자화자찬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실제로 팔콤의 기대처럼 섬궤2의 의도를 헤아려 다음을 기다리는 게이머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고. 그러나 영화 ‘아저씨’를 보면 “내일만 사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한테 죽는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팔콤이 앞으로도 섬궤2처럼 내일을 보는 게이머만 챙긴다면 언제 오늘을 즐기는 게이머에게 외면당해 몰락해도 놀랄 일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