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준의 게임히스토리] 20년간 군림한 제왕 '리니지'의 역사 Part.1
한국 온라인게임의 대중화를 연 작품이자 서비스의 역사가 곧 한국 게임 산업의 역사인 게임. 바로 엔씨소프트의 리니지에 붙는 수식어다.
리니지의 역사는 곧 국내 게임 시장의 성장과 일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8년 서비스 15개월 만에 국내 최초로 온라인 게임 100만 회원 시대를 열었으며, 단일 게임 최초로 2016년 누적 매출 3조 원을 돌파하는 등 국내 게임 산업에 유례없는 족적을 남긴 게임이기도 하다.
특히, 국내에서 역대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의 매출을 모두 더 해도 약 2조 원에 불과한 점을 고려하면 지난 20년 간 '리니지'가 국내외 게임업계에 미친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다.
여기에 출시 20주년인 2017년 선보인 '리니지M'으로 모바일게임 시장에 진출해 출시 첫날 이용자 210만 명, 매출 107억 원을 기록하며, 한국 모바일 게임의 모든 기록을 갈아치우는 위엄을 보여줘 국내 게임 시장에서 '리니지'라는 IP 파워를 유감없이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정액제 온라인게임임에도 현존하는 게임 중 손꼽히는 유료 콘텐츠 덕에 '린저씨'(리니지를 플레이하는 게이머를 통칭하는 말)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리니지는'아재들이 하는 게임'이라는 인식이 강한 게임이기도 하다.
하지만, 수 많은 혹평 속에서도 과거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부분이나, 얼마전 진행한 '리니지 리마스터'를 통해 다시 인기 온라인게임의 반열에 오르는 등 리니지가 가진 IP 파워는 단순히 매출로 설명할 수 없는 요소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
그렇다면 이토록 오랜 시간 그 위엄을 잃지 않고 있는 리니지는 과연 어떤 매력을 지닌 게임일까? 이번 히스토리에서는 2부에 걸쳐 리니지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리니지의 시작은 1997년 엔씨소프트의 초창기로 돌아간다. 많은 이들이 엔씨소프트가 리니지로 게임 사업을 시작한 게임 개발사로 알고 있지만, 사실 초창기 엔씨소프트는 인터넷과 관련된 외주를 받는 조그만 하청업체로 출발했다.
1997년 3월에 설립된 엔씨소프트는 국내 최초로 순수 인터넷 기반의 네츠고 서비스를 안정적으로 구축하는데 성공하면서 해당 분야에서 실력 있는 회사로 조금씩 입지를 굳혀가고 있었고, SK, KCC, 금호 등 유수 기업들로부터 수주를 받는 실력 있는 업체로 이름을 높여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엔씨소프트의 이사였던 김택진 현 대표는 하청보다는 자신만의 콘텐츠를 가지고자 했고, 당시 리니지를 처음 개발 중이었던 아이네트가 리니지의 개발팀을 타 회사로 넘긴다는 소식을 들은 후 끈질긴 장고 끝에 리니지의 개발자들을 인수하는데 성공한다.
이 초창기 개발자 중 리니지의 개발을 총괄하던 인물이 바로 온라인게임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송재경 현 XL게임즈 대표로, 당시 천재 개발자로 이름을 높이던 송재경과 네트워크 기술의 1인자로 불리우던 김택진의 만남으로 리니지는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녹록치 않았다. 1997년 당시 온라인게임을 개발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수준의 방대한 작업으로,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수준의 어려운 일이었다. 여기에 리니지의 개발 도중 추가 투자를 받지 못하면서 회사 상황이 급속도로 어려워져 김택진 대표가 자신의 집을 담보로 은행 대출을 받아 직원들 상여금을 지급할 정도로 여러 차례 위기를 겪기도 했다.
과금 선택도 중요한 요소였다. 모뎀에서 ADSL로 전환되기 시작했던 인터넷 과도기 시절에는 하이텔이나 천리안과 같은 PC통신의 서비스 내에 소속되어 부가사용료를 받는 것이 일상이었다. 김 대표는 통신 수익금의 30%를 내라는 당시 PC 통신사들의 정책에 큰 불만을 가졌고 당시 크게 확대되던 PC방에 주목하며 과감히 PC 인터넷 기반으로 과금체계를 선회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1998년 9월 시작된 '리니지'의 1차 테스트. 게이머들의 반응은 엔씨소프트의 기대를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텍스트로만 진행되는 머드 장르가 따로 존재할 정도로, 그래픽이 PC 게임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던 온라인게임 시장에 리니지는 수려한 그래픽과 다양한 온라인 콘텐츠를 선보이며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리니지'는 그래픽을 3D로 작업한 후 2D로 변환하여 활용해 동시대의 다중접속롤플레잉게임(MMORPG)들보다 우수한 퀄리티를 낼 수 있었다. 2D이기 때문에 여러 방향에 맞추어 동작이나 그래픽 이펙트를 활용하다 보니 용량이 커졌지만 이를 최적화하기 위한 작업도 잘 병행되었다.
또 적어도 1~2시간 이상은 접속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에 배경 색을 눈이 피로하지 않게 몇 번이고 조정했고, 게임 내 자원의 관리 및 서버 이상을 대비해 수십 명의 인원을 배치하여 실시간으로 서버 로그를 체크하면서 문제가 생길 경우 돌아다니는 펫 하나라도 모두 복원시켜줄 정도로 신경을 기울였다.
특히, '리니지'는 서비스 이후 국내 최초로 동시접속자 500명을 달성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는데, 지금이야 별 것 아닌 수치였지만, 당시 서버에 접속한 인원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소규모였던 온라인게임 시장에서 동시접속자 500명 기록은 남다른 것이었다.
리니지는 지금의 PC방 과금의 틀을 만든 게임이기도 했다. 당시 리니지 서비스를 준비 중인 김택진 대표는 과금 부분에 큰 고민을 했는데, '리니지'를 한 달에 30시간 이상의 개인 사용자에게 2만9천 7백 원의 정액을 내도록 했고 PC방에도 회선당 4만 4천 원에서 6만 6천 원의 월 정액을 부과하는 정책을 만들었다.
이는 20년 가까이 지난 현재 온라인게임의 PC방 과금 형태이기도 하며, 리니지의 시작과 함께 국내 게임 개발사의 수익 모델을 새로 만드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라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열풍에 힘입어 '리니지'는 서비스 이후 1998년 대한민국 게임 대상을 수상하며, 그 존재감을 알렸고, 1999년에 국내 게임 역사상 최초로 100만 회원을 달성하며 태동기였던 한국 게임시장의 서장을 열었다.
이러한 리니지의 성공은 기존 언론에서도 주목해 한국의 초고속 인터넷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일조하는 대표적 상징물로 떠오르기 시작했으며, 당시 벤처 기업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정부의 정책과 어우러지면서 엔씨소프트는 신 IT 사업의 성공 사례로 불리기도 했다.
이렇듯 승승장구를 이어가던 리니지의 인기는 예상치 못한 곳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당시는 익숙치 않았던 온라인 세계의 장점과 단점이 한꺼번에 발생하면서 게임의 사회적 이슈가 곳곳에서 발생한 것은 물론, 과열 양상으로 이어지기도 해 기업에서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영준의 게임히스토리] 20년간 군림한 제왕 '리니지'의 역사 Part.1는 2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