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투 게이머가 늙고 있다.. '81년생인데 25년째 막내예요'
"25년째 고기 자르는 담당이에요. 제가 81년생인데 모여서 고깃집에 가면 아직도 제가 고기를 잘라요. 제 밑으로는 명맥이 끊긴 거나 마찬가지고요."
세가의 대전 격투 게임 '버추어 파이터'의 한 오프 모임. 올해 43살인 박 모 씨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게임도 신작이 나오지 않은지 오래되긴 했지만, 박 모 씨는 애초에 어린 친구들이 들어오지 않으니 영원히 자기가 막내가 될 것 같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다른 격투 게임 종목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킹오브파이터즈'나 '스트리트 파이터', '철권' 등 인기 격투 게임 커뮤니티는 대부분 40대가 주력이다. 과거에 흥했던 오락실은 사라지고, 그 추억을 품었던 사람들은 오락실의 동반자처럼 늙어가는 모습이다.
젊은 세대가 유입되지 않는 격투 게임업계
지난해 아시안게임 '스트리트 파이터' 종목에서 금메달을 딴 김관우 선수는 79년생으로 올해 45살이다. 그나마 정부 시책으로 나이가 한 살 어려져서 40대 후반이라는 타이틀을 겨우 면했다. 이어 '철권' 계에서 최고의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무릎' 배재민 선수도 85년생으로 올해 39세다. 정부 시책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40대가 될 뻔했다.
지난해 '킹오브파이터즈 15' 종목에서 에보나 지스타 컵 파이터즈 스피리트에서 우승한 경력이 있는 강명구 선수도 85년생으로 무릎과 동갑이며, '철권' 시리즈 사상 가장 높은 완성도와 인기를 누렸다고 평가받는 '철권 태그 토너먼트'의 세계 최강자 '딸기' 김영준 선수도 1985년생으로 올해 마지막 30대를 보내고 있다. 국내 유명 격투 게이머인 풍림꼬마, 인생은 잠입, 네모도 다 85년생으로 나이 앞자리에 4자를 달기 직전이다.
이처럼 격투 게임 좀 한다고 주름잡으며 각 대전격투 게임의 최전선을 지키는 게이머들은 이미 40대이거나 40대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가장 신체적 나이가 좋은 10대 후반부터 20대의 '슈퍼 루키'가 나올 만도 한데, 격투 게임업계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이 같은 현상은 비단 한국뿐만이 아니다. 일본에서도 최신작인 '스트리트 파이터 6'의 세계대회를 보면 우메하라 다이고, 토키도, 마고, 후도 같은 선수들이 여전히 최정상에서 군림하고 있다. 우메하라 다이고는 81년생으로 43세, 토키도는 85년생으로 39세, 마고와 후도 또한 85년생으로 39세다. 이쯤 되면 격투 게임은 중년들이 주로 하는 게임이라고 오해가 생길 지경이다.
젊은 층에게 너무나 높은 격투 게임의 벽
격투 게임은 신세대가 접하기에는 너무 허들이 높다. 새로운 IP(지식 재산)로 등장한 격투 게임은 인지도가 없어서 새로운 인구 유입이 쉽지 않고, '철권'이나 '스트리트 파이터' 등 시리즈 후속작으로 출시되는 게임들은 이미 지난 버전의 고수들이 넘사벽(넘볼 수 없는 벽) 고인 물이 되어 버티고 있다.
뉴비(무 경험자)의 경우 기존 시리즈를 즐겼던 게이머들을 넘어서려면 보다 압도적인 격투 센스와 노력이 필요한데, 그 허들이 보통 높은 것이 아니다.
"온라인에 들어가 봤는데, 아주 다 나쁜 놈들입니다. 도대체 맞아주질 않아요. 신나게 때리기만 합니다. 3일 내내 개 패듯이 맞다가 그냥 접었어요"
막 격투 게임을 시작했다가 단념한 게이머들에게 물어보면 보통 이런 식의 대답이 돌아온다. '리그 오브 레전드' 같은 게임은 5명이 즐기면서 적당히 남 탓도 하고 또 잘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비비면서 플레이가 가능한데, 격투 게임은 오롯이 자신이 감당하고 나 홀로 맞아야 한다.
옛날에 오락실이었다면 주변에 사람들에게 물어보면서 판정이나 패턴을 익히겠지만, 제대로 된 스승도 만날 수 없이 맞기만 하다가 접는 것이 일상이다. 혼자 꾸준히 커맨드를 보면서 기술을 익히고 심리전을 익히는 과정도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또 하나 격투 게임에 접근하지 못하는 이유는 조작 체계의 이슈다. 격투 게임이 조이스틱이나 히트박스에 특화된 조작 체계를 가진 경우도 많은데, 이들 조작기기가 최소 10만 원대 중반, 비싸면 50만 원에 육박하면서 점점 허들을 높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젊은 층을 끌어들이려는 개발사들, 일부 효과는 있었으나
이렇게 골수 코어층으로 이용자층이 줄어들자 대전 격투 게임 개발사들도 젊은 층들을 위한 다양한 해법을 내놓고 있다.
일례로 캡콤은 자사의 최신작 '스트리트 파이터 6'에, 기존의 게임 아이덴티티였던 6 버튼 체계를 포기하고 인공지능을 활용해서 버튼 1개만 적당히 눌러도 기술이 나가는 등의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했다.
아예 초보자 용 다이나믹, 중급자 용 모던, 상급자용 클래식으로 조작 시스템을 나눠서 진입 허들을 낮췄으며, 사이버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기술을 익히고 성장하는 식의 RPG 시스템을 도입해 감정이입을 극대화하도록 했다.
반다이남코도 '철권 8'을 출시하면서 초보 이용자도 게임을 더 쉽게 즐길 수 있도록 스페셜 스타일 조작 방식을 마련했다.
스페셜 스타일은 앞선 작품인 ‘철권 7’에서 선보인 간단 콤보와 어시스트 기능을 합친 스타일의 조작 방식이다. 간단 콤보는 버튼 하나만 눌러서 콤보를 이어갈 수 있는 기능이며, 어시스트는 복잡한 커맨드 입력 없이 어시스트 버튼과 다른 버튼 조합을 통해 다양한 기술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기능이다. 이 기능을 활용하면 각 캐릭터를 대표하는 기술과 콤보를 간단 조작으로 쉽게 즐길 수 있다.
이러한 파격적인 변화로 '스트리트 파이터 6'은 지난 1월에 전 세계 판매량 300만 장을 달성한 바 있으며, '철권 8'은 출시 1개월 만에 전 세계 누계 판매량 200만 장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러한 각 게임사들의 노력에도 좁아진 격투 게이머 주류층을 넓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아무리 조작을 쉽게 설정하더라도 결국은 한계가 있고, 게임의 특성상 결국은 고인 물들이 지배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젊은 층을 끌어들이기 위한 보다 더 나은 방식은 없을까 하는, 게임사들의 고민이 더 깊어지고 있는 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