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했더니 네이처 논문 저자로 게재됐습니다”
“게임을 했더니 네이처 논문 저자로 게재됐습니다.”
게이머들이 미생물 진화 과정을 밝혀내고, 난제였던 단백질의 구조를 파악하는 등 과학계를 뒤흔들고 있다.
지난 4월 15일 제롬 왈디스풀(Jérôme Waldispühl) 캐나다 맥길대 컴퓨터공학과 교수 연구팀은 보더랜드3 이용자들이 100만 종 이상의 미생물 진화 역사를 밝혀냈다는 연구 결과를 냈다. 해당 연구 결과는 저명한 국제학술지 ‘네이처’의 자매지인 ‘네이처 나노바이오테크놀로지’에 발표됐다.
미생물은 우리 몸의 전반적인 건강 상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우리가 먹는 음식이나 운동량 등 기타 환경 요인에 따라 매우 다양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를 이용해 비만, 당뇨병, 염증성 질환 등 여러 가지 질병 해결의 열쇠로도 주목받은 바 있으나, 미생물의 종류가 너무 많고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아 최첨단 컴퓨터로도 이를 추적하기 힘들다.
이에 캐나다 맥길대 연구팀은 ‘게임’을 이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수백만 명의 열정적인 게이머의 도움을 받고자 한 것이다. 2020년 당시 연구팀은 기어박스와 협력해 ‘보더랜드3’에 간단한 퍼즐 게임인 ‘보더랜드 사이언스’를 추가했다.
‘보더랜드 사이언스’는 각 내장 미생물의 DNA를 색과 모양이 다른 4개의 블록으로 형상화한 뒤, 이용자들이 블록을 연결해 각 미생물 간의 유사성을 측정할 수 있도록 제작됐다. 모든 스테이지의 퍼즐이 DNA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만들어져, 퍼즐을 풀어갈수록 미생물 해석에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 게임인 만큼 퍼즐을 맞출수록 점수가 올라가고, 게임에서 활용할 수 있는 인 게임 재화도 제공된다.
결과는 놀라웠다. 약 450만 명의 게이머가 게임을 통해 1억 3500만여 개의 퍼즐을 풀어냈으며, 해당 정보를 기반으로 100만 종 이상의 진화 과정을 추적할 수 있게 됐다. 논문의 수석 저자인 제롬 왈디스풀 교수는 “여기에는 과학에 기여한 450만 명의 사람들이 있다”, “이 결과는 그들의 것이기도 하니, 자랑스러워할 필요가 있다”라고 밝혔다.
약 450만 명의 이용자는 ‘보더랜드 사이언스 게이머’라는 이름으로 논문 저자가 됐다.
사실 게이머들의 업적이 네이처에 실린 건 처음이 아니다. 2011년에는 ‘폴드잇’이라는 게임을 통해 이용자들이 단백질의 구조를 파악하기까지 했다.
‘단량체 프로테아제’라는 단백질 분해 효소는 에이즈와 암 등의 난치병의 치료제로 주목받았으나, 최첨단 현미경으로도 그 구조를 알아내기 힘들었다. 직접적으로 효소를 들여다봤을 때는 1차원적인 형태만 보이고, 컴퓨터로 3차원 구조를 형상화하려고 해도 약 10만 개의 단백질 구조를 모두 대입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 워싱턴대학교 게임과학센터는 게이머들의 직감을 믿고 UW 생화학과와 협력하여 ‘폴드 잇’이라는 게임을 제작했다. 실제 단백질 구성 원리에 따라 아미노산 사슬을 배열하고 뒤틀 수 있도록 하고, 퍼즐을 풀 듯 해당 사슬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이용자는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구조를 만들 때마다 높은 점수를 낼 수 있고, 다른 이용자들과 점수판을 통해 순위를 겨룰 수도 있다.
해당 게임에는 약 5만 7천여명의 이용자가 참여했고, 무려 3주 만에 프로테아제 효소 구조를 파헤쳤다. 과학자들도 10여년을 풀어내지 못했던 구조를, 게이머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알아낸 것.
놀라운 성과에 연구는 ‘온라인 게임을 통한 단백질 구조 예측’이라는 이름으로 ‘네이처 구조&분자생물학’에 게재됐고, 이용자들 역시 공동 저자로서 당당하게 이름을 올렸다.
이런 성과 덕분에 2020년에는 ‘코로나 치료제’를 찾기 위해 ‘폴드 잇’이 다시 활용되기도 했다. 과학자들이 밝혀낸 코로나바이러스 돌기 단백질의 세포 결합 부위를 기반으로, 해당 단백질에 결합하는 단백질 구조를 설계하기 위해서다.
몇몇 인상적인 퍼즐 솔루션은 워싱턴대 단백질설계연구소에서 약물 실험을 진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아쉽게도 긍정적인 결과는 파악된 바 없다.
완전한 코로나 치료제를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게임’을 통한 다수의 이용자와 공동 연구를 진행하는 행위가 알려지고, 하나의 방법으로 떠오른 만큼, 앞으로도 많은 연구가 게이머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한 게임업계 관계자는 “지루하고 버겁게 느껴지는 작업에 게임성을 일부 첨가하는 것만으로도 이용자들의 참여를 장려하고 의미 있는 결과를 낳는다. 앞으로 게임 이용자들이 어떤 활약을 펼칠지 기대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