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하겠어? 들켜도 못 본 척해줄까?”, 이지모드로 이용자 도발하는 게임들!
빨리빨리의 민족, 끈기의 민족 등 한국인을 수식하는 별명은 많지만, 필자는 ‘승부욕’의 민족이야말로 우리나라 사람들을 가장 잘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작은 내기 하나에도 열정을 불태우고, 게임이나 스포츠에서는 승패에 목숨을 거는 듯한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인이라면 이지모드를 고를 수 없을 만한 게임들이 있다. 단순히 난도를 낮추는 것을 넘어, 이지모드를 선택하는 순간 이용자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승부욕을 자극하는 독특한 게임들이다.
대표적으로 메탈기어 솔리드 V: 팬텀 페인(이하 팬텀 페인)에는 ‘치킨 모자(치킨 캡)’이라는 전설의 이지모드 아이템이 있다. 팬텀 페인은 2015년 출시된 잠입 액션 게임으로, 게임 특성상 적 기지에 몰래 숨어 들어가야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잠입에 실패해 적에게 들키고 여러 번 게임 오버가 될 경우, 게임은 ‘치킨 모자’ 아이템 사용을 권유한다. 이 모자를 착용한 이용자는 적에게 들켜도 세 번까지는 무사히 넘어갈 수 있다.
평범한 이지모드용 아이템인 것 같지만 핵심은 모자의 생김새와 적의 반응에 있다. 치킨 모자는 이름 그대로 닭 모양으로 생겼고, 착용하면 진지한 캐릭터의 표정과 대조되는 깜찍한 생김새의 아이템이 인 게임에도 반영된다. 이 모자를 착용한 상태로 게임을 클리어하면 컷씬에서도 주인공이 닭 모자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지모드를 선택하는 순간 게임의 장르가 진지한 액션에서 코미디로 변하는 굴욕을 맛보게 된다.
적들의 조롱도 감내해야 한다. 모자를 착용한 상태로 적에게 발각되면 모자에 있던 닭이 꼬꼬댁~ 소리를 내는데, 이 모습을 본 적들은 킥킥 비웃으며 주인공을 무시하거나 황당하다는 듯 손을 흔들며 그냥 보내준다. 캐릭터는 무사하지만, 체면이 죽었다.
팬텀 페인이 준비해 둔 시스템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만약 치킨 모자를 착용하고 나서도 잠입에 실패하면 굴욕의 ‘병아리 모자’가 제공된다. ‘병아리 모자’를 착용하면 적들은 이제 비웃지도 않고 숙연하게 주인공을 무시해 버린다. 공격하거나 앞을 지나가도 반응해주지 않는다. 이 상태로 게임을 클리어해도 포인트가 0점 처리되니,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라면 이지모드를 선택하기 어려우리라 본다.
소니의 차량 전투 게임 트위스티드 메탈 2도 이용자를 신랄하게 도발한다. 이 게임을 이지모드로 플레이하면 첫 번째 보스를 잡는 순간 그대로 게임이 멈춘다. 구체적으로, 게임 화면에는 멈춤(STOP) 표지판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어서 더 이상 게임을 진행할 수 없다.
화면 아래 표시되는 내레이션 자막은 “‘패배자’는 이 구역 너머로 진입할 수 없습니다. 일반이나 하드 모드로 진행하세요”라고 현 상태의 해결법을 알려준다. 이지모드를 하는 이용자는 게임 진행조차 할 수 없다는 도발이다.
워낙 과감한 설정인 탓에 게임은 ‘약한 자를 상대하지 않는 게임’, ‘컨트롤 안 좋으면 입구 컷’, ‘어린이/노약자 출입금지’ 등의 별명도 가지게 됐다.
다크소울보다 어렵다고 이름을 날린 닌자 가이덴 시리즈의 ‘닌자 가이덴 블랙’도 이지모드를 순순히 제공하지 않는다. 게임은 이용자가 짧은 시간 안에 여러 번 죽으면 “닌자의 길을 포기하겠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이지모드를 권유한다. 자존심이 조금 상해도 게임 난도가 어려운 만큼 별 의심 없이 이지모드를 선택할 수 있지만, 진짜는 그 이후에 있다.
이용자가 이지모드로 도달할 경우 동료 캐릭터가 주인공을 조롱하면서 검에 핫핑크 리본을 달아준다. 해당 아이템을 착용하는 순간 이따금 동료 캐릭터들이 주인공에게 야유하고, 메인 화면의 이미지가 주인공인 류 하야부사 대신 그의 제자인 아야네로 교체된다. 이지모드 한 번 했다고 주인공 자격까지 잃는다.
한편, 닌자 가이덴의 디렉터 이타가키 토모노부는 “류 하야부사(주인공)는 이미 슈퍼 닌자입니다. 그가 죽는다면 당신의 책임입니다. 분하면 실력을 키우세요”라는 도발성 멘트로 화제가 된 바 있다.
마지막으로 FPS 게임인 울펜슈타인: 더 뉴 오더(이하 울펜슈타인)는 이지화면 선택 창에서부터 이용자들을 자극한다. 게임은 ‘이지모드’라는 단어 대신 ‘아빠, 저도 해봐도 돼요?’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이미지에 공갈 젖꼭지를 물고 아기 모자를 쓰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을 삽입해 버린다. 모드 설명에는 해당 모드를 선택하는 이용자를 ‘뼈대 없는 게이머’라고 조롱하기도 한다. 이지모드를 통해 게임을 즐기는 이용자는 어린아이와 다름없다고 하는 셈이다.
참고로 울펜슈타인의 다른 난도 표기도 범상치 않다. 이지모드 다음인 난도는 ‘때리지 마’, 일반 모드는 ‘덤비라고 해!’, 하드모드는 ‘나는 죽음 그 자체다!’, 헬 난도는 ‘위버’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때리지 마’ 난도는 주인공이 공갈 젖꼭지를 물고 있지는 않지만 캐릭터의 표정이 울상이 된다. 난도 선택 창에서부터 도발을 하니, 대부분의 게이머는 이지모드를 선택하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