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주의에 절여진 게임 개발사들, 도널드 트럼프로 ‘정상화’되나?
지난 20일 도널드 트럼프가 제47대 미국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도널드 트럼프는 성별과 다양성 문제에 있어 보수적인 입장을 지속적으로 견지해 왔다. 그는 지난해 12월 22일 터닝포인트가 주최한 ‘아메리카페스트’에 참석해 “미국 정부의 공식 정책은 남성과 여성, 두 개의 성별만 존재한다”라고 단언하고, 취임 직후 다양성 장려 정책을 폐기하는 명령 2건을 내렸다.
이런 트럼프의 확고한 의지에 따라 서구권 게임업계를 지배해 온 PC(정치적 올바름, Political Correctness)주의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게임업계에는 다양성과 포용성을 강조하는 DEI(Diversity, Equity, Inclusion) 정책과 PC주의를 강하게 반영한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출시해 왔다. 다양성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나, 이걸 이용자들에게 강요하고 도덕적 우월성을 과시하는 듯한 행보를 보인 것이 문제였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소니의 콘코드다. 콘코드는 개발비용이 4억 달러(약 5,800억 원)의 투자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엄청난 자금이 투입된 히어로 슈팅 기대작이었다. 하지만 게임은 슈터 게임과 어울리지 못하는 ‘다양한’ 캐릭터 디자인과 난해한 게임 진행 메커니즘, 비싼 가격 등을 원인으로 출시 첫날에도 스팀 동시 접속자 수를 700명도 채 넘기지 못하고 이용자들에게 외면받았다. 이에 버티지 못한 게임은 출시된 지 2주 만에 서비스 종료 소식을 알리며 게임업계의 반면교사로 남게 됐다.
바이오웨어의 드래곤 에이지: 더 베일가드(이하 베일가드)도 PC 강요로 논란이 됐다. 게임은 2014년 GOTY를 받은 ‘드래곤 에이지: 인퀴지션’의 후속작으로 이용자들에게 큰 기대와 관심을 받았으나, 게임 전반에 걸쳐 PC요소가 들어간 선택을 강요하는 모습으로 몰입감을 떨어뜨린다는 비판을 받게 됐다. 게임이 주장하는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게임이 진행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 때문인지 게임의 평가도 예상보다 좋지 못했다. 베일가드의 이용자 수는 회사의 기대치의 50%에 불과한 150만 명에 그쳤고, 게임에 대한 기대감이 점점 하락하자 지난 24일 게임은 마지막 패치로 보이는 업데이트를 공개했다.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온 문서에는 ‘다레스 쉬랄(안전한 여행이 되기를, 일반적으로 작별을 의미)’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외에도 리플렉터 엔터테인먼트가 개발하고 반다이남코엔터테인먼트가 선보인 어드벤처 게임 ‘언노운9: 어웨이크닝’의 경우 배우 안야 차로트라가 모델인 캐릭터의 외모를 망가뜨려 출시하더니, 각종 버그와 처참한 퀄리티의 애니메이션 등으로 혹평을 받아 스팀 동시접속자 수 285명이라는 처참한 성과를 냈다.
이렇듯 PC 요소가 지나치게 강조된 게임들은 대부분 상업적으로 실패하는 것은 물론, 이용자들에게 과한 피로감까지 안겨주고 말았다. 일론 머스크 역시 “DEI와 ‘깨어있는 정신 바이러스’가 예술을 죽인다”라며 “게임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라고 입장을 밝혔을 정도다.
하지만 이제 트럼프가 취임하면서 서구권 게임업계에서도 변화가 생겨날 수 있다. 트럼프의 반 PC주의에 편승해, 게임의 본질적인 재미에만 집중할 수 있는 ‘명분’을 가질 수 있게 됐다는 분석이다.
한 게임업계 관계자는 기업의 입장에서 과한 PC주의는 이제 부담 요소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개발사들이 게임에 PC 요소를 삽입한 것은 변화하는 시대상에 맞추기 위함도 있지만, 게임의 소비자층을 넓히기 위해 다양한 공감대를 형성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게임의 본질인 재미를 놓치면서 과도하게 남발한 PC주의로 인해 이용자의 피로감은 점점 커졌고, 역효과로 PC에 대한 반발까지 생겨나는 상황이 됐다. 소비자층을 넓히기는커녕 주요 소비층이 떠나가면서 금전적으로 실패하는 게임들만 우후죽순 늘어난 것.
이렇다 보니 기업은 자사의 게임이 가진 본질적인 재미와 상업성에 무게를 두고 싶어지지만, 아무런 명분 없이 PC요소를 제거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자칫 기업에서 소수자를 탄압하거나, 배척하는 모습으로 곡해돼 큰 이미지 타격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들로 큰 움직임을 보이지 못했던 기업들이 트럼프의 움직임에 자연스럽게 편승해 서서히 게임의 본질적인 재미로 회귀하는 흐름을 보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액션 게임 로드 오브 폴른의 개발사인 CI게임즈 CEO 마렉 티민스키는 지난 13일 체형 명칭 변경 이용자 투표를 진행했다. 선택지는 캐릭터의 체형을 A와 B타입으로 표기하는 기존 방식과 남성과 여성으로 표기하는 새 방식이다.
설문에는 약 5만 명의 이용자가 참여했고 88.4%가 남성 및 여성으로 표기를 원한다는 투표 결과가 나왔다. 마렉은 최종 결과를 따를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이는 PC주의에 대한 이용자의 피로도를 알려주고, 게임사도 이용자의 니즈에 맞춰 천천히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한 게임업계 관계자는 “다양성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이를 이용자들에게 강요하면 피로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며 “트럼프의 반 PC 정책을 계기로 게임업계에서도 변화가 생겨날 것으로 보인다. 지나치게 과장됐던 PC요소들은 천천히 사라지고, 게임의 본질적인 재미요소가 강조되는 흐름이 나타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