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인물열전 ( 자 )
삼국지 인물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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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지의 등장인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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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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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료
위의 장수로 자는 문원이다.
여포의 수하 장군으로서 각지를 돌아다니며 싸웠다. 여포가 죽은 후에는 조조를 섬겼다.
합비를 수비하고 있었을 때는 겨우 병력 8백으로 10만이나 되는 오군을 격퇴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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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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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張飛)?-221년
중국 삼국 시대의 촉의 무장. 자는 익덕(翼德). 하북성 탁군 출신.
유비, 관우와 함께 의형제를 맺어 평생 그 의를 저버리지 않았으며, 후한말 동란기의 수많은 전쟁터에서 절세의 용맹을 떨쳤다. 유비의 익주
공략 때는 주력을 이끌고 큰 공을 세워 파서태수가 되었다. 위의 명장 장합이 장노를 무찌르고 파서로 밀고 들어오자 역전 끝에 이를
격퇴하였다.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거기장군, 사례교위에 임명되었다. 그 후 유비가 죽은 후 관우의 복수를 위하여 오를 치려는 동정에 종군할
준비를 하던 중 부하에게 암살되었다. 관우와 더불어 당대 최고의 용장으로 일컬어지며, 특히 형주에 있던 유비가 조조의 대군에 쫓겨 형세가
아주 급박하게 되었을 때 장판교 위에서 '내가 장익덕이다'하고 일갈하여 위군을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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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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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張昭) 156-236년
오나라의 건국 공신. 자는 자포(子布). 팽성 사람.
어려서부터 박식하기로 이름나 서주자사 도겸의 부름을 받았으나 거절하여 감금된 일이 있다. 그 뒤 황건적의 난을 피해 강남으로 이주했다가,
197년에 손책이 강동에 발판을 마련했을 때 그 참모가 되었다. 200년, 손책의 유촉을 받은 그는 비탄에 잠긴 손권을 꾸짖어 상복을
군복으로 갈아입게 하고 전군을 순찰시켰다. 그 후 주유 등과 협력하여 젊은 손권을 잘 보좌했다. '춘추좌씨전해', '논어주' 등의 명저를
저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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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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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송(張松)?-212년
유장의 모사.
208년 7월, 형주를 빼앗은 조조에게 전승을 축하하러 갔으나 풍채가 좋지 못해 무시당하고는 그 자리에서 유비를 찾아가 예우를 받고 또
유장에게 냉대를 받던 법정과도 친교를 맺었다. 211년, 한중의 장노 토벌에 나선 조비에 대한 대비책으로 유비와 함께 한중을 치도록 유장에게
진언하고 그 사신으로 법정을 추천했다. 이어서 법정과 함께 유비의 촉 탈취 계획을 추진시켰으나 형인 장숙의 밀고로 유장에게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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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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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張繡)
후한말의 군웅의 한 사람. 장제의 조카.
양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변장, 한수의 군사를 무찔러 이름을 날렸다. 장제가 죽은 뒤 그 군대를 인계받아 일단 조조에게 투항했으나, 아내를
빼앗긴 원한으로 다시 반하여 원에서 조조를 패주시키고 조조의 장남 조앙을 죽였다. 이어서 유표와 동맹하여 조조를 괴롭혔으나 178년 5월에
조조군에게 패했다. 다시 이듬해 11월, 관도의 싸움 때 모사 가후의 진언에 따라 조조 휘하에 들어가 큰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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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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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온(張溫)
후한의 중신.
조등의 천거로 출세한 인재의 한 사람이다. 황건적 토벌군 사령관 주준의 경질을 영제에게 상서하여 철회시키고, 184년말 양주에서 변장, 한수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동탁의 작용으로 반란군을 미양에서 격파했는데, 이를 추격한 6개군 중 5개군이 패배하고
동탁의 군사만이 무사히 귀환했다. 그 후 명령 위반으로 동탁의 처형을 주장하는 손견의 진언을 물리쳤으나, 장안 천도 후 동탁에게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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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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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완(蔣琬)?-245년
촉의 중신. 자는 공담(公啖). 상향 사람.
제갈량의 출전중 성도에 머물면서 원정군의 식량 보급에 만전을 기해 제갈량으로부터 나의 오른팔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234년,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중태에 빠지자 그 후계자로 지명되어 국정의 전반을 맡았다. 그는 제갈량과 같은 위엄은 갖지 못했으나, 침착한 집무 태도로 제갈량이
없는 촉의 동요를 막고 피폐된 국력 회복에 전력했으나, 병이 들어 전권을 비위에게 넘겨 주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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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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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포(張苞)
장비의 아들.
아버지가 죽은 뒤 관우의 아들 관흥과 함께 유비의 총애를 받으며 크고 작은 싸움에 공을 세웠다. 후에 사마의의 선봉 곽회를 공격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고 그 상처가 도져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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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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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합(張哈)
조조의 명장. 자는 준개. 막 사람.
원래 한복 휘하에 있었으나 그가 죽은 뒤 원소에게 투항하여 그의 공손찬 격멸에 큰 공을 세웠다. 관도의 싸움 때 원소와 의견이 맞지 않아
조조에게 투항한 후 각지를 전전하면서 잇달아 승리를 거두었다. 215년, 한중의 장노 토벌에 선봉대의 역할을 하고 하후연과 함께 한중을
수비했으나, 217년 유비, 법정에게 패하여 한중을 잃었다. 231년, 사마의가 총대장으로 부임하자 그와 자주 충돌했고, 이 해 제갈량의
움직임을 견제하기 위해 사마의의 명령으로 약양으로 후퇴하는 제갈량을 몰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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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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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위(全韋)
동오의 장수.
위의 제갈탄이 사마씨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동오의 군대를 이끌고 이를 도우러 나갔다. 그러나 수춘성에 이르다가 사마소의 포위군에게 패하여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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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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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程普)
오나라의 장수. 자는 덕모(德謀). 토은 사람.
오나라 장수중에서 가장 연로하고 인물 등용이 뛰어나 존경을 받았다. 손견을 따라 황건적을 무찌른 후 더욱 신임을 받고, 그가 죽자 손책과
함께 거의 모든 전투에 참가했다. 또 손책이 죽자 그의 아들 손견을 잘 보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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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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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丁奉)
오의 장수. 여강 안풍 사람으로 자는 승연(承淵).
제갈량이 남병산에서 동남풍을 빌고 떠나는 것을 서성과 함께 추격한 때문에 적벽가에 나오는 이름이다. 계략이 있어 능히 대사를 처단하고 전투에
용감하여 여러차례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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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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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程昱)
위나라의 모사. 자는 중덕(仲德). 동아 사람.
194년 조조가 두번째 서주 공격에 나섰을 때 장막과 진궁이 배반하여 근거지인 연주를 여포에게 넘겨 주었다. 이때 정욱은 순욱과 함께 진성과
다른 두 현을 확보하고 조조를 맞아들였다. 귀환한 조조는 사기가 떨어져 원소의 제의를 받아들여 인질을 보내 손잡으려 했으나 정욱은 이를
꾸짖으며 조조를 격려했다. 196년, 헌제를 맞아들이자는 조조의 제안에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순욱과 함께 적극 찬성했다. 또 유비를
경계해 그에게 군사를 맡기는 데 반대하고 그를 죽이자고 진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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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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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丁原)
여포의 상관.
병주자사 시대에 여포를 발견하고 부관으로 삼았다. 하진이 환관을 없애고자 군웅을 낙양으로 불러들일 때 그의 명에 따라 낙양 교외의 맹진에
불을 지르고 혼란에 빠진 낙양의 치안 유지를 담당했다. 그러나 동탁의 꼬임에 빠진 여포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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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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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趙雲)?-229년
유비의 맹장. 자는 자룡(子龍). 진정 사람.
처음에는 공손찬 휘하에 있다가 나중에 유비의 신하가 되어 용맹을 떨쳤다. 유비가 장판에서 조조에게 쫓겨 유아였던 아들 선과 감부인을 버리고
도망갔을 때 조운이 단신으로 이를 구출했다. 214년에는 성도 공격의 일익을 담당하여 출전했고, 219년에는 한중 공방전에서 정찰 도중 위의
주력 부대를 만났으나 뛰어난 전술로 후퇴에 성공하여 유비의 찬탄을 받았다. 221년, 유비가 손권을 공격할 때 반대를 무릅쓰고 강주 수비에
나서 공을 세웠고, 228년에는 제갈량이 기산에 출전할 때 등지와 함께 양동 작전으로 기곡에 진주했다가 조조의 대군을 만나 소수의 군대로 잘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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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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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예(曹叡) 205?-239년
위의 제 2대 황제. 자는 원중(元仲).
문제의 태자로 226년에 즉위하고 명제가 되었다. 아버지의 유조에 의해 조진, 조휴, 사마의, 진군 등이 보좌했다. 그는 침착과단한 인품으로
부화의 무리를 물리치고 스스로 정치를 행하였다. 즉위초, 오와 촉이 연합하여 위를 공략했으나 사마의 등 무장을 파견하고 자신도 전투에
출신하여 오를 격퇴했다. 그러나 만년에는 사치에 빠졌고, 그가 죽자 양자로 삼았던 제왕인 방을 보좌하던 자들의 내분으로 사마씨가 실권을 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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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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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曹仁) 168-223년
조조의 종제. 자는 자효(子孝).
관도 싸움때, 유비가 허도 남쪽에서 반란을 선동하자 이를 진압하고 적벽대전 후 서황과 함께 강릉에 머물러 추격군을 막았다. 그 후 번선에
근거하여 관우의 공격을 잘 막았으나, 220년 손권이 공격해 오자 성에 불을 지르고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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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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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曹操) 155-220년
삼국시대 위왕조를 세운 인물. 자는 맹덕(孟德). 묘호는 태조. 시호는 무황제. 패국의 초 사람.
환관의 양자의 아들인데, 황건난 평정에 공을 세우고 두각을 나타내어 마침내 헌제를 옹립하고 종횡으로 무략을 휘두르게 되었다. 화북을 거의
평정하고 나서 남하를 꾀했는데, 건안 13년 손권, 유비의 연합군과 적벽에서 싸워 대패, 이후로 그 세력이 강남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같은
해 승상, 동 18년 위공, 동 21년 위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정치상의 실권은 잡았으나 스스로는 제위에 오르지 않았고, 220년 정월
낙양에서 죽었다. 조조는 또한 문학을 사랑하여 많은 문인들을 불러들였으며, 자신도 그 아들 조비, 조식과 함께 시부의 재능이 뛰어나, 이른바
건안문학의 흥륭을 가져오게 하였다. 후세에 조조는 간신의 전형처럼 여겨져 왔는데, 근년에 이르러 중국 사학계에서는 그의 재평가를 둘러싼
논쟁이 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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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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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曹彰)?-222년
조조의 둘째아들. 자는 자문(子文).
조창은 수염이 노란 아이란 뜻으로 '황수아(黃鬚兒)'라고 불리웠는데,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했고, 힘이 남달라 주먹으로 사나운 짐승을
때려잡을만 했다고 한다. 이렇게 무에만 힘을 쓰는 조창에게 조조가 많이 타일렀다고 한다. 또한 조창은 곽거병과 위청(衛靑)을 존경했다고
한다.
조비, 조식이 아버지의 문재를 이어받았다면, 그는 무재를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는데 형인 조비가 제위를 물려받자 음으로 양으로 박해를 받다가
불우하게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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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 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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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曹洪)?-232년
조조의 사촌 동생. 자는 자렴(子廉).
조조가 형양에서 동탁의 부하 서영에게 패했을 때, 부상당한 조조를 자기 말에 태우고 자신은 걸어갔다. 195년, 헌제가 안읍에 피난했을 때
조조로부터 헌제를 맞이하라는 명령을 받고 안읍으로 향했으나 도중에 방해를 받아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관도싸움에서 조조가 오소로 출격하자
본영을 잘 지켜 적장 장합, 고람의 공격을 방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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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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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周瑜) 175-210년
오의 장수. 자는 공근(公瑾). 서성 사람.
손책과 같은 나이로, 어렸을 때부터 그와 둘도 없는 친구였다. 또 손책이 부친 손견을 잃은 뒤부터는 장소와 함께 손책을 보좌하여 오나라의
기초를 공고히 했다. 200년에 손책이 죽고, 19세의 손권이 뒤를 이었을 때, 그는 장소, 정보 등 문무관과 함께 손권을 보좌했다.
208년에 조조가 형주를 공략하고 남하했을 때는, 조조와의 강화를 주장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은 가운데 노숙과 함께 단호히 싸울 것을
주장하고 필승의 이유를 들어 손권으로 하여금 싸움에 나서도록 했다. 적벽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후 남군태수가 되었다. 그는 익주의 유장이
한중의 장노 공격에 고심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익주를 쳐서 장노를 평정하고 이어서 마초와 동맹하여 조조를 멸할 계획을 세웠으나 원정 도중에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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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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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창(周倉)
관우 휘하의 장군.
황건 장보의 부하였으나 그가 죽은 뒤 와우산에 웅거하여 산적질을 하다가 관우를 섬겨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충성을 다하였다. 수영을 잘하여
형주를 지킬 때는 조조의 장수 방덕을 물 속에 끌어들여 사로잡아 공을 세웠다. 최후까지 행동을 같이하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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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갈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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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근(諸葛瑾) 174-241년
오나라 손권의 막료. 자는 자유(子瑜). 양도 사람. 제갈량의 형.
동생이 촉을 받들고 있어 의심을 받기도 했으나 손권으로부터는 절대적 신임을 받고 가끔 촉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215년에 오와 촉이 형주를
둘러싸고 공방전을 되풀이하는 동안 조조가 한중에 침입했다. 이에 유비가 손권에게 강화를 제의하여 회담이 열렸을 때 쌍방의 대표로서 만난것이
제갈 형제였다. 두 사람은 공식 석상에서는 만났으나 개인적으로 만난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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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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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諸葛亮) 181-234년
자는 공명(孔明). 양도 사람으로 촉의 승상.
처사인 서서의 추천으로 유비에게 알려졌다. '삼고의 예'로써 유비가 그를 찾았을 때 '천하 3분의 계'를 유비에게 올렸다. 그 후 유비와
수어의 사귐을 맺었다. 208년, 적벽에서 조조의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214년, 유비가 촉으로 들어가 교전을 하자 장비, 조운 등과 함께
성도를 공격했다. 220년, 조조가 위나라를 세우자, 다음해에 유비도 한나라 제왕이라 칭함고 동시에 승상이 되었다. 223년, 유비가 병으로
죽자 후주 유선을 받들어 촉나라를 다스리는 데 전념했다. 225년, 남쪽 변방을 치러 갔다가 남방의 수령 맹획을 일곱번 잡아 일곱번 놓아주어
남방 사람들의 환심을 샀다. 227년, 위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유선에게 출사표를 바쳤다. 228년, 군대를 이끌고 기산으로 나아가 위나라
군사와 접전을 했으나 참모인 마속의 실수로 첫번째 위나라 정벌은 실패로 끝났다. 이 해에 손권과 위나라 대사마인 조휴의 군사를 크게
무찌르고, 진창을 공략했으나 적의 단단한 수비로 인해 후퇴했다. 다음해, 위나라의 3군과 싸우는 전과를 낳았으나, 그 후 두 번에 걸친
정벌에서는 사마중달이 편 지구전의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234년 오장원에서 대패하여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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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 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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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림(陳琳)?-217년
건안 칠자의 한 사람. 자는 공장(孔障). 광릉 사람.
하진 휘하에서 벼슬하다가, 그가 환관 주멸을 도모하여 제국의 호걸들에게 낙양 집결을 명했을 때 이를 극렬반대했다. 하진이 죽은 후 기주로
난을 피했다가 원소의 막료가 되었다. 200년, 원소가 전국에 보낸 조조 타도의 격문은 그가 쓴 것이다. 원소 멸망 후 조조에게 귀순했으나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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