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게이머들의 업그레이드 욕심에 불을 지피다
PC로 게임을 즐기는 게이머들에게 있어 게임의 사양은 늘 화제의 중심에 자리 잡는 중요한 사안이다. 제품을 구입하기만 하면 모두가 똑같은 사양으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콘솔 게임과는 달리, 어떤 사양으로 시스템을 구축 했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게임 환경과 그래픽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 PC 게임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최신 게임의 발매에 맞춰 자신의 PC를 업그레이드 하는 것은 게이머들에게는 일반적인 일로 인식되기 마련이다. 대작 게임들을 제대로 즐겨보고 싶은 것은 게이머들에게는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스타 크래프트 2의 베타 테스트 실시 후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게임의 사양을 주제로 다양한 이야기가 오가는 것은 이런 게이머들의 성향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또한 이런 예는 최근의 경우뿐 아니라 과거의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 오리진, 90년대 게이머들의 업그레이드 욕심에 불을 지피다
1990년대 초반, 윙 커맨더 시리즈와 스트라이크 커맨더를 개발했던 오리진은 당시의 게이머들에게 두 가지 측면에서 유명한 제작사였다. 하나는 그들이 만든 게임이 터무니없이 재미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그들이 요구하는 PC 사양은 더더욱 터무니없이 높았기 때문이다.
1990년에 출시된 윙 커맨더는 스타워즈를 연상시키는 우주 전쟁을 소재로 많은 게이머들에게 사랑 받았던 게임이다. 우주 공간을 날아다니며 호전적인 외계 종족인 킬라디(Kilrathi)와 전투를 펼치는 내용을 다룬 이 게임은 공상 과학 팬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당시의 게임에서는 흔치 않던 확장팩이 2종류나 나올 정도로 게이머들에게 큰 인기를 얻은 이 게임은 게이머들에게 당대 최고의 사양을 요구했다. 윙 커맨더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 필요한 사양은 무려 12MHz 이상의 x86 계열 CPU와 640KB 이상의 메모리, 거기에 256 컬러를 지원하는 비디오 카드와 미디 음원을 제공하는 사운드 카드였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을 정도로 낮은 사양이지만 그 당시엔 PC 자체가 흔치 않던 시기였으며, PC가 있다 하더라고 흑백 화면에 8088 CPU가 장착된 XT PC가 다수였던 것을 감안하면 윙 커맨더의 사양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고사양에도 불구하고 게이머들은 윙 커맨더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고, 결국 윙 커맨더는 당시 미국에서 가장 유명세를 떨치던 게임 잡지 '컴퓨터 게이밍 월드'의 1991년 최고의 게임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오리진 시스템은 다음 해인 1991년에 윙 커맨더 2: 킬라디의 복수를 출시하며 다시 한 번 게이머들에게 최고 수준의 그래픽과 당시로는 충격적인 음성 연기를 선보였으며, 당연하게도 전작을 뛰어넘는 사양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1993년, 오리진 시스템은 게이머들을 경악하게 만든 또 하나의 게임을 선보인다. 바로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인 스트라이크 커맨더가 그 주인공. 비행 시뮬레이션 장르에 용병 부대의 일원이 펼치는 작전 수행이라는 스토리를 가미한 당시로는 찾아보기 힘든 파격적인 구성과 실존하는 다양한 전투기, 전폭기가 등장하는 스트라이크 커맨더는 발매와 동시에 게이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문제는 이 게임의 사양. 286이라 불리는 80286 CPU가 대세를 이루던 그 당시에 최소 실행 사양으로 80386 DX CPU와 30MB에 달하는 살인적인 용량을 제시한 스트라이크 커맨더는 지금도 당대의 고사양 게임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게임이다.
* 천재 '존 카맥', 퀘이크로 게임계를 뒤흔들다
둠과 둠2를 연속적으로 히트시키며 천재 프로그래머라는 찬사를 받았던 ID 소프트의 '존 카맥'은 1996년, 본격적으로 3D 가속 비디오 카드를 요구하는 FPS 게임을 세상에 내놓았다. 현존하는 FPS 게임의 틀을 정립했다는 평을 받는 퀘이크가 탄생한 것이다.
넓은 맵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물리효과가 구현되는 FPS 게임이라는 것도 신선했지만, 그보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것이 3D로 구현 됐다는 점이었다. 그 이전에도 3D로 구현된 게임은 소수 있었지만, 어느 작품도 퀘이크가 보여준 수준의 그래픽과 현장감을 전달하지는 못했기에 퀘이크의 등장은 이름 그대로 게임 시장 전체를 흔들어 놓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또한, 퀘이크의 등장 이후 3dfx 인터렉티브의 '부두' 시리즈와 엔비디아의 '리바 TNT' 시리즈 같은 3D 가속 비디오 카드의 출시가 본격화 됐으며, 2D 그래픽이 대부분인 게임에 3D 효과가 쓰이는 것이 일반적인 일로 자리 잡았다. 이쯤 되면 게임계에 3D 열풍을 몰고 온 주역으로 퀘이크를 꼽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 2000년대에도 게이머들은 업그레이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퀘이크 이후로 다양한 게임들이 등장했으며, 게임들은 여러 측면에서 발전을 거듭해왔다. 하지만 오리진 시스템의 게임들이나 퀘이크가 보여준 정도의 파급 효과를 가져온 게임은 없었던 것이 사실. 이런 잔잔한 시장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킨 게임이 2007년 11월에 등장한다. '크라이실사스'라는 별명을 가진 게임, 바로 크라이텍에서 개발한 FPS 게임 크라이시스가 출시된 것이다.
다이렉트X 10을 지원하며 지금까지 그 어떤 게임에서도 볼 수 없던 그래픽을 선보인 크라이시스의 '공식적'인 권장 사양은 인텔 코어 2 듀오 2.2GHz 혹은 AMD 애슬론 64 X2 4400+의 CPU에 2GB 메모리, 지포스 8800 GTS 이상의 비디오 카드였다. 이 정도는 2007년 11월 당시의 사양을 감안하더라도 그다지 높지 않은 수준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공식적인 수치일뿐 실제로 게임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이보다 훨씬 고사양의 PC가 필요했으며, 2007년 11월 당시, 크라이시스를 풀 옵션으로 즐길 수 있는 컴퓨터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2010년인 지금에 와서야 이 게임을 제대로 즐길 수 있을 정도라는 걸 생각한다면, 크라이시스는 말 그대로 시대를 너무나 앞서간 게임이라 할 수 있다.
엔씨소프트의 온라인 게임인 리니지 2와 아이온도 게이머들을 업그레이드 행렬에 동참시킨 장본인으로 꼽힌다. MMORPG 중에선 최고 수준의 그래픽을 선보인 리니지 2와 아이온을 즐기기 위해 게이머들은 앞다투어 자신의 PC를 업그레이드 했다. 두 게임이 출시됐을 당시, 각종 PC 부품 업체들이 '리니지 2 패키지', '아이온이 실행되는 사양' 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제품을 홍보했을 정도로 이들 게임이 PC 시장에 미친 파급효과는 대단했다.
* 게임과 PC 하드웨어는 상호 공생 관계
PC 하드웨어 기술의 발전은 게임 제작에 있어, 상상력을 실현하게 해 주는 토양을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해왔다. 또한 게임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높은 품질의 게임들은 고사양 하드웨어가 판매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즉, 게임과 PC 하드웨어는 서로의 세계에 도움을 주는 상호 공생 관계인 것이다.
게임 업계의 한 관계자는 "대작 게임이 출시되는 해에 신종 하드웨어의 보급이 늘어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며, "올해는 스타 크래프트 2, 디아블로 3, 블레이드 앤 소울 등의 대작에 대한 게이머들의 기대치가 높은 상황이기에 인텔 i5, i7 같은 고사양 CPU에 대한 수요도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