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준의 게임히스토리]이거 하면 연애할 수 있나요? 연애시뮬레이션의 계보

'게임이 청소년을 폭력적으로 만든다!'

게임 규제법을 내세우는 단체들이 걸핏하면 내세우는 단골 멘트 중 하나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청소년들이 자연스레 게임의 폭력성에 물들게 되고 이 폭력성이 청소년들의 정서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더욱이 언론의 보도 역시 게임의 폭력성을 중점적으로 부각시켜 내보내고 있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사건의 배후로 게임이 거론되는 것은 다반사요 심지어 얼마 전 국민들을 경악시킨 '임병장 총기 난사' 사건의 경우 모 FPS 온라인 게임을 10시간이 넘게 즐긴 것으로 알려졌다는 기사가 네티즌들 사이에서 큰 논란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걸핏하면 게임을 범죄의 주범으로 몰아가니, 이쯤 되면 어지간한 사건에 게임이 연관되지 않은 기사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하지만 게임에 대해 조금이라도 배경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같은 주장에 의문이 생길 법하다. 영화에도 로맨스, 스릴러, 액션, 공포 등 다양한 장르가 있듯 게임에도 액션뿐만 아니라 공포, 어드밴처, 레이싱, 퍼즐, 롤플레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가 존재하기 때문.

폭력적인 게임 때문에 폭력성이 나타난다는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레이싱 게임을 즐기는 게이머는 레이서 못지 않은 운전감각을 가져야 하고, 경영 시뮬레이션에 빠진 게이머는 어디선가 성공한 CEO로 이름이 오르내려야 하며, 리듬액션 게임에서는 리듬감이, 슈팅게임에서는 조종 실력이, 요리를 만드는 게임에서는 요리실력이 자연스럽게 나타나야 정상이다.

동급생
동급생

특히, 남녀간의 사랑을 주제로 이성의 마음을 얻어야 엔딩 즉 '결말'을 볼 수 있는 연애시뮬레이션을 즐기는 게이머들의 경우 몸짓 하나, 말 한마디로 상대방의 마음을 모두 파악해 ‘그린라이트’로 이끌 수 있는 '연애고수'가 돼야 했던 것이 사실.

그래서 이번 히스토리에서는 저들 '게임의 유해성'을 부르짖는 이들의 주장에 근거해 다수의 이성과의 연애를 통해 게이머들의 ‘연애세포’를 깨울 수 있는 장르인 연애시뮬레이션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다.

연애시뮬레이션은 아름다운 다수의 이성이 등장하고 이들과 데이트와 다양한 이벤트를 통해 이성의 마음을 훔쳐 연인으로 발전하거나 결혼을 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여성 혹은 남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동성을 공략할 수도 있는 등 그 범위와 소재가 의외로 광범위 한 게임 장르 중 하나다.

흔히 국내 게이머들이 이야기하는 ‘미연시’는 여성이 등장하는 게임 모두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은데, 연애를 소재로 한 만큼 성인물로 구분된 작품도 많고, 등장하는 인물 혹은 진행되는 시나리오 마다 다른 장르로 구분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이번에 다룰 ‘연애시뮬레이션’ 게임은, 연애를 성사시키기 위해 자신을 갈고 닦는 ‘성장요소’와 이성과의 호감도에 따라 엔딩이 달라지는 ‘시뮬레이션’ 요소가 도입된 게임을 주로 소개하려 한다.(단순히 대화 선택에 따라 엔딩이 달라지는 게임의 경우 ‘연애시뮬레이션’이라기보다 ‘연애 어드벤처’에 가깝다.)

연애시뮬레이션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80년대부터다. 국내에서도 흔히 사용되는 아이돌, 미소녀 등의 단어를 이미 80년대에 사용할 정도로 활발한 이성 마케팅을 진행하던 당시 일본의 게임회사들은 게임의 장르나 작품성보다는 캐릭터의 섹슈얼적인 요소를 강조한 게임을 출시하기 시작했고, 이들 게임은 음지 혹은 양지에서 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물론 성적 매력을 주제로 한만큼 대다수의 게임이 19세 등급의 게임이었고, 때문에 이때까지 미소녀 게임은 ‘에로게임’으로 분류 되기도 했다.)

천사들의 오후
천사들의 오후

단순히 성적인 요소가 부각되던 연애게임은 주를 이루던 중 1985년 등장한 ‘천사들의 오후’를 통해 연애게임은 본격적인 장르 변화가 이루어 지기 시작한다. ‘천사들의 오후’는 수준 높은 그래픽을 내세움과 동시에 게이머가 선택하는 대사에 따라 다양한 분기가 진행되는 지금의 연애시뮬레이션 게임의 틀을 잡은 게임이기도 했다. 아울러 성적인 묘사에 치중한 기존의 작품과 달리 히로인과 대화를 통한 스토리 진행을 전면에 내세웠고, 게이머들로 하여금 연애를 즐기는 가상 체험의 느낌을 본격적으로 전달한 기념비 적인 작품이었다. (물론 성적인 표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서서히 변화의 움직임을 보인 연애게임은 1992년 일본의 엘프에서 개발한 동급생을 통해 양지로 나서게 된다. 지금도 청춘을 90년대에 보낸 이들에게 ‘명작의 칭호가 아깝지 않은 작품’으로 불리는 동급생은 단순히 이성을 만나는 것을 넘어 각 캐릭터별로 스토리를 부여하고, 남성들의 취향에 따른 다양한 스타일의 여성을 등장시켜 멀티 엔딩을 볼 수도 있는 등 이성 간의 연애라는 큰 틀에 어드벤처와 시뮬레이션 요소를 도입한 혁신적인 게임이었다.

동급생
동급생

동급생의 기획 초기 엘프는 기존의 연애게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게임을 구상했지만 ‘로도스도 전기’ 등의 인기 애니메이션의 작화를 맡은 바 있는 ‘타케이 마사키’가 참전함으로써 게임의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게 된다.

‘타케이 마사키’가 그려낸 캐릭터와 설정들을 단순히 연애게임으로 표현하기 아깝다고 판단한 엘프는 이들 캐릭터 하나하나에 모두 스토리를 입힌 것은 물론, 원화에 최대한 가까운 캐릭터를 구현하기 위해 당시 ‘16색’ 이었던 하드웨어의 한계를 극복해 낸 엄청난 그래픽을 연출해 냈다.(당시의 게임 그래픽이 일일이 손으로 찍어내는 도트를 사용한 것을 감안할 때 당시 게이머들에게는 충격적인 수준의 비주얼이었다.)

동급생
동급생

더욱이 어둡고, SF적인 요소가 짙었던 기존의 연애게임에 비해 학교를 배경으로 한 순정만화의 분위기를 이끌어내 연애게임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진 게이머들에게도 큰 화제로 떠오르기도 했다. 이 같은 요소에 힘입어 동급생은 발매 이후 10만 장이라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게이머들의 뇌리에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라는 장르를 강하게 인식시켜 주었다.

이후 동급생은 가정용 게임기에 ‘전 연령판’으로 이식되며 대중들에게 한 걸음 나아갔지만, 후속작인 동급생2가 성공을 거둔 것에 비해 윈도우95버전으로 등장한 동급생3가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면서 시리즈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은 상태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동급생’은 국내 아마추어 번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계기를 제공한 게임이라는 점인데, ‘한누리’에서 직접 한글 패치를 제작해 국내 게이머들에게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한글로 번역된 동급생은 그야말로 센세이션 한 인기를 얻었으며, 90년대를 살아온 남자라면 한번쯤 즐겨본 필수 코스로 자리잡은 게임이기도 하다. (아직도 P2P 사이트에서 볼 수 있을 정도로 식지 않은 인기를 자랑한다)

두근두근메모리얼
두근두근메모리얼

코나미에서 등장한 ‘두근두근 메모리얼’(원작 도키도키 메모리얼)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두근두근 메모리얼’은 캐릭터의 능력치에 따라 이성의 호감이 변하고, 기존 게임들과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엄청난 캐릭터 설정과 대사를 선보여 당시 중소기업이었던 코나미를 지금의 자리에 올려놓은 게임으로 평가 받을 정도로 엄청난 흥행을 기록한 게임이기도 했다.

‘두근두근 메모리얼’은 단순히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등장한 것을 넘어 각 캐릭터 별 화보집이 등장하고, 설정집이 판매됐을 정도로 그 엄청난 인기를 자랑했는데, 많은 업체에서 캐릭터들이 입은 교복을 직접 제작해 판매하는가 하면, 망해가는 출판사가 캐릭터 설정집 판매로 다시 일어섰다는 등의 전설 같은 기록을 남기기도 할 정도였다. (캐릭터의 이미지에 미친 영향 또한 대단해서 히로인은 ‘청순가련 +소꿉친구’라는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정석을 만든 게임이기도 했다.)

연애 시뮬레이션에 미친 영향도 적지 않은데, ‘두근두근 메모리얼’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연애 시뮬레이션이라는 단어(이전까지는 그냥 에로겜으로 불렸다)가 사용되기도 했으며, 게임기, PC엔진 등 여러 플랫폼에 복합적으로 등장하는 동시에 각 플랫폼 별로 다른 요소를 도입하는 등의 차별화를 두기도 했다.

아울러 ‘패러미터’로 대표되는 성장 시뮬레이션 시스템은 이후 등장한 게임에도 큰 영향을 미쳐, 육성 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에도 다수 도입됐으며, 퀴즈, 퍼즐 게임 등의 캐릭터로 등장해 하나의 캐릭터를 다양한 게임에 등장시키는 캐릭터 콜라보를 통해 큰 수익을 얻어 ‘캐릭터’를 중심으로 다양한 수익을 창출하는 새로운 마케팅 방식을 선보인 게임으로 평가 받기도 했다.

캠퍼스러브스토리
캠퍼스러브스토리

일본의 연애 시뮬레이션이 큰 붐이 일면서 국내에서도 이 같은 게임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1996년 등장한 최초의 국산 연애 시뮬레이션게임 캠퍼스러브스토리가 그 주인공이다. 지금은 역사속으로 사라진 남일 소프트에서 개발한 이 게임은 고등학생들의 연애를 다룬 일본의 작품들과는 달리 대학 캠퍼스를 배경으로 한 게임이었다. (물론 서슬 퍼런 심의가 진행되던 당시 고등학생이 연애하는 게임이 심의에 통과될 리 없었으므로, 연애가 공식적으로 허용된 대학을 배경으로 게임이 등장할 수 밖에 없었다.)

게임의 진행은 여러 명의 캐릭터 중 하나의 캐릭터를 공략해 결혼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일반적인 여느 연애시뮬레이션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인데, 특별히 선정적인 장면이 등장하지 않음에도 19세 게임으로 분류 됐다는 점에서 당시 어마무시했던 심의 기준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토막
토막

시드나인에서 개발한 다소 엽기적 연애시뮬레이션 게임 '토막: 지구를 지켜라'(이하 토막)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토막’은 인간의 타락을 보다 못한 신들이 인간을 처벌하려 하자 사랑의 여신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지상으로 내려가 인간과 교감한다는 다소 진부한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지상에 강림한 여성이 화분과 함께 목만 배달되어 왔다는 것이 엄청난 차이다.

토막'은 화분에 목만 덩그러니 담겨있는 사랑의 여신을 육성하고, 교감을 나눠 진정한 사랑을 깨달아 신들로부터 인간의 사랑을 증명해야 한다는 주제로 진행되어 당시 게이머들에게 큰 화재를 불러 일으켰다.

얼굴만 등장하지만 다양한 표정과 다소 거친 말투, 당시 유행하던 유행어를 거침없이 사용하는 여신의 모습은 게임 속 플레이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게임의 몰입도를 높였으며, 다양한 연인 이벤트 역시 등장해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의 재미요소를 모두 갖춘 게임이기도 했다.

특히, 게이머의 선택에 따라 화분의 모습과 스타일, 성격, 행동 양식 모든 것이 달라지며, 인류의 멸망이 게이머와 여신간의 교감과 이벤트가 얼마나 진행되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게임 속 스토리 역시 매우 흥미로워 PS2 버전으로 이식되기도 하는 등 해외에서도 큰 인기를 얻은 바 있었다.

단순히 여성이 등장하고 이를 공략해 나가는 연애시뮬레이션 게임에서도 나름의 역사가 있고 발전이 있는 것처럼, 다른 장르의 게임 역시 단점을 스스로 이겨내고 더욱 발전하기 위한 노력에 노력을 더한 게임들 만이 게이머들의 뇌리 속에 강하게 남는 것이 사실이다.

게임의 유해성을 부르짖는 이들의 말띠나마 폭력성이 게임의 전부라면 게임은 애초에 비주류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연애시뮬레이션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동급생이 당시로써는 혁신적인 그래픽을 선보였고, ‘두근두근 메모리얼’이 캐릭터 마케팅이라는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듯, 게임은 하나의 부분만이 아닌 복합적인 콘텐츠로 이루어져 있는 종합 엔터테인먼트다.

언제나 규제만을 이야기하고,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지닌 이들이 조금만 게임의 다양성을 봐주고, 게임업계 역시 자생적인 노력과 함께 이들과 발맞춰 나가는 건설적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지금의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분명히 바뀔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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