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준의 게임 히스토리] 국산 호러게임 열전
게임과 공포는 꽤나 오랜 인연을 지니고 있다. FPS의 기틀을 세운 게임으로 평가 받는 둠 시리즈는 여느 호러게임 못지 않은 음산한 배경과 시시각각 다가오는 악마들이 공포 심리를 자극해 게임의 몰입도를 높였으며, 명작 액션게임으로 손꼽히는 바이오하자드(북미명 레지던트 이블) 역시 '좀비'라는 콘텐츠 전세계 게이머들에게 선보이며 엄청난 흥행을 거두기도 했다.
이는 게임의 소재가 점차 고갈되며 차별화를 위해 고심중인 지금의 게임업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데드스페이스, 데드 아일랜드, 레프트4데드, 피어(F.E.A.R) 시리즈, 라스트오브어스 등 공포와 액션이 공존하는 게임들이 연달아 큰 성공을 거두면서 호러가 대작 게임의 주요 장르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상황이다.
국내 게이머들의 호러게임에 대한 선호 역시 점차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아프리카TV, 트위치 TV와 같은 개인 스트리밍 방송을 통해 ‘암네시아’, ‘아웃라스트’, ‘더 바인딩 오브 아이작’ 등 국내에 정식 출시되지 않은 ‘극한의 공포’를 소재로 한 게임들이 소개되어 여느 온라인게임 못지 않은 높은 유명세를 타기도 했으며, 호러게임을 주제로 한 방송에 수 많은 사람들이 몰려 한 때 인기 방송 상위권을 기록하기도 했다.
심장 쫄깃하게 만든 공포를 통해 색다른 재미를 제공하는 호러게임. 그렇다면 국내 게이머들에게 공포의 참 맛을 일깨워 준 국산 호러게임은 무엇이 있을까?
호러장르가 인기를 얻는 이유 중 하나는 청각, 시각적인 ‘공포’ 분위기를 통해 지속적으로 자극을 주어 게임의 몰입도를 높여주는 것은 물론, 으스스한 저택, 원혼을 가진 귀신, 엇갈린 인간관계와 같은 호러게임의 단골 소재들이 게임 스토리에 미장센 역할을 하며 게이머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때문에 호러게임으로 분류되는 게임 중 상당수는 액션과 육성이라는 요소보다는 스토리와 연출에 무게를 실은 어드벤처 장르에 분포되어 있던 것이 사실. 국내에서 개발된 호러게임들도 어드벤처 장르에 집중된 모습을 보인다.
최초의 국산 호러게임이라면 많은 게이머들이 미라 스페이스에서 개발한 ‘제피’를 떠올리지만 전문가들은 1997년 등장한 어드벤처 게임 ‘모비드’를 국내에서 처음 개발한 호러 어드벤처 게임으로 꼽는다. 죽음에 대한 병적인 집착, ‘소름끼친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Morbid’에서 제목을 따온 ‘모비드’는 진영테크놀로지에서 개발한 최초의 국산 3D 어드벤처 게임이다.
‘모비드’는 물에 빠져 죽은 친구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정신분열증에 걸린 주인공이 정신병원에 입원한 이후 죽었던 친구가 포르말린이 가득한 곳에 갇혀있는 환각을 보면서 벌어지는 일을 배경으로 진행된다. 어두운 복도와 텅 빈 교실 그리고 각종 으스스한 자재가 즐비한 생물실 등 고등학교에 홀로 남은 주인공이 환각을 탈출해야 하는 줄거리를 지닌 모비드는 단서를 조합하고, 문제를 풀어나가며 한발, 한발 나아가는 어드벤처 장르의 줄기를 따라가는 것과 함께 ‘아무도 없는 학교’라는 괴담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에서 진행되는 각종 이벤트로 묘한 긴장감을 흐르게 하는 것이 특징.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모든 것이 환각이라는 게임의 스토리인데 주인공이 어떤 행동을 하던 절대 사망하지 않으며, 공포스러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피, 시체 같은 잔인한 묘사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본인의 꿈 속이라는 설정 탓도 있지만 유난히 엄격한 당시의 검열의 칼날을 피해가기 위한 개발자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또한, 모비드는 국내 최초의 3D 어드벤처 게임이기도 하다. 90년대 당시의 3D 기술력을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는 배경과 진행 내내 얼굴 표정하나 변하지 않는 주인공 덕에 더욱 공포를 느꼈다는 농담 섞인 게이머들의 반응도 있지만, 국내에 생소한 3D 어드벤처라는 장르를 구현했다는 공을 인정받아 모비드는 1997년 6월 문화체육부에서 선정한 이달의 우수게임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평가항목 중 하나인 ‘뛰어난 그래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99년 미라 스페이스에서 개발한 제피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모비드가 어드벤처에 공포라는 소재를 사용했다면 제피는 본격적인 호러 어드벤처를 표방한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동명의 영화로도 유명한 엑소시즘과 저택에 등장하는 악령 그리고 폴더가이스트로 불리는 초자연적인 현상 등 서양식 호러영화를 보는 듯한 다양한 연출이 등장해 게이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어 주기도 했다.
게임은 쌍둥이를 출산하던 도중 한 명의 아이를 포기하고 탄생한 제피가 7살이 되던 날 저택에 악령(포기한 아이)들게 되고, 이를 두려워 한 부부의 전화를 받고 달려간 의사 스펜서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서양식 호러를 선택한 만큼 게임 속 연출도 상당히 수위가 높은데, 피아노가 갑자기 움직여 가정교사가 사망하는 장면이나, 샹들리에가 떨어져 사람이 깔리는 등 매우 공포스런 연출을 게임 속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분위기 또한 매우 음산해서 악령이 들린 집에 갑자기 문이 움직이거나, 사망한 저택 고용인의 시체가 곳곳에 등장하는 등 10년이 지난 지금 플레이 해 보아도 호러게임의 분위기가 온몸으로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이 같은 수위 높은 공포를 선보인 제피도 검열의 매서운 눈은 피해갈 수 없어, 상당히 많은 장면이 연출불가 판정을 받았다. 때문에 시체나 캐릭터가 사망하는 극적인 장면 중 상당수가 삭제 혹은 블라인드 처리되어 출시됐다. 더욱이 게임을 개발한 미라 스페이스가 사라지면서 정식으로 ‘제피’의 무삭제 판을 구할 방법은 영영 없어져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당시 모 잡지에서 제공하는 번들 게임 중 제피가 포함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많은 검열의 칼날 속에 12세 등급을 받은 게임인지라 큰 문제는 없었지만 2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게임을 무리하게 1장으로 압축시켜 놓은 것이 사단이었다. 무리한 압축 덕에 번들로 제공된 CD에는 게임 진행이 막힐 정도의 엄청난 버그가 나타났으며, 게임 속 연출 영상의 질이 상당히 떨어져 번들을 통해 게임을 접한 게이머들에게는 제피의 이미지가 상당히 실추되기도 했다.
이처럼 ‘제피’를 통해 뛰어난 연출과 치밀한 스토리를 선보인 미라 스페이스는 원작의 10년 후의 이야기를 다룬 ‘제피2’를 출시하기도 했지만, 특유의 호러요소가 많이 부족한 것은 물론, 각종 버그로 큰 비난을 받았다. 무엇보다 당시 큰 인기를 얻고 있던 바이오하자드의 게임 플레이를 상당히 의식한 듯 3인칭 시점으로 게임이 진행되는 것은 물론, 아이템, 인벤토리 등의 각종 요소들이 오마주 한 듯 상당히 비슷해 큰 혹평을 들었고, 전작의 인기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기록하며 쓸쓸히 게이머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손노리의 최대의 명작으로 꼽히는 화이트데이 역시 국내 호러게임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게임 중 하나다. 2001년 손노리에서 개발한 화이트데이는 각종 귀신이 등장하는 한국 특유의 공포스런 분위기를 잘려낸 것은 물론 치밀한 스토리 그리고 오감을 자극하는 기상천외한 이벤트로 구성되어 있어 ‘국내 패키지게임의 구세주’라는 엄청난 평가를 받기도 한 게임이다.
특히, 학교에 갇혀버린 주인공이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만나는 귀신들과 접근하면 할 수록 점점 커지는 열쇠소리를 내며 주인공을 찾아 헤매는 수위는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치밀한 설정 속에 등장하는 각 캐릭터들의 인간관계 속에서 펼쳐지는 스토리는 지금 플레이 해도 손색없는 작품으로 꼽힌다.
더불어 ‘공격을 할 수 없는 주인공’이라는 설정에 걸맞게 다양한 숨을 곳이 등장하지만 그곳에서 등장하는 각종 귀신들과 수위의 추격은 ‘미칠 듯한 호러게임’이라는 ‘암네시아’ 못지 않은 공포를 게이머들에게 선사할 정도다.
화이트데이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부분 중 하나는 바로 사운드 인데, 가야금의 명인 황병기기가 직접 녹음한 곡 ‘미궁’을 통해 음산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잘 연출해 냈으며, 국내 내로라하는 성우들이 캐릭터의 목소리를 맡아 게임의 몰입감을 더해주기도 했다.
이렇듯 뛰어난 콘텐츠와 치밀한 연출로 게이머들에게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화이트데이였지만 결과는 명성에 못 미치는 정도였다. 당시 와레즈 등을 통해 ‘블법복제’가 만연했던 국내 패키지게임 시장은 서서히 쇠퇴기에 다다른 상태였고, 이를 막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화이트데이는 소기의 목적만을 달성한 채 명성에 걸맞은 판매량을 보이지 못하며 결국 게이머들에게 ‘비운의 수작’에 기억되는 것에 그쳤다.
그러던 지난 3월 손노리는 화이트데이의 모바일버전 개발을 공식적으로 발표하며 큰 화제가 되었으며, 오는 2014년 하반기 정식 출시를 목표로 개발에 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게이머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는 중이다.
국산 호러게임은 화이트데이를 끝으로 사실상 명맥이 끊긴 상태다. 물론 호러 요소를 도입한 게임은 많지만 위에서 소개한 호러가 중심이 되는 게임은 찾아 보기 힘든 것이 지금의 국내 게임의 현실.
하지만 이번에 공개되는 화이트데이의 모바일 버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반응에서 보듯이 호러장르의 게임에 대한 국내 게이머들의 인식은 상당히 높아진 상황이다. 암네시아, 레프트4데드, 좀비아일랜드 등 호러장르의 게임들이 자신만의 독특한 게임성을 무기로 여느 게임 못지 않은 높은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과거 만연했던 ‘게임불법복제’가 만연했던 2000년대와는 달리 이제는 자신들이 원하는 게임이라면 ‘제값을 치르고 구매하는' 좀 더 성숙한 문화를 가진 게이머들이 많아진 것이 사실이다. 한국 특유의 공포와 개성 넘치는 콘텐츠, 그리고 소름끼치는 연출로 다시금 사람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국산 공포게임이 등장해주기를 바라면서 이번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