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준의 게임히스토리] 혁신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와 게임, 그 애증의 역사
1974년 2월 당시 세계 최대의 비디오게임 개발사로 손꼽히던 ‘아타리’의 본사에 한 청년이 들어섰다. 무작정 찾아와 “이 회사에 취업을 시켜주지 않으면 나가지 않겠다”고 건물 로비에서 버티던 청년은 오랜 시간의 실랑이 끝에 아타리의 한 간부의 눈에 띄어 야간 근무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아타리에 입사한 이 당돌한 청년의 이름은 ‘스티브 잡스’. ‘디자인 완벽주의자’, ‘IT 시장의 선도자’ 그리고 ‘혁신의 아이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수식어가 뒤따르며 세계 IT 시장을 뒤흔든 희대의 천재가 세상에 나서는 순간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IT 시장의 역사에 스티브 잡스라는 인물이 미친 영향은 엄청나다. 새로운 컴퓨터의 시대를 연 매킨토시 비롯해, 세계 음반 시장의 판을 새로 짠 MP3 플레이어 ‘아이팟’, 3D 애니메이션의 지평을 연 ‘픽사 스튜디오’,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바꾸어버린 스마트폰의 대명사 ‘아이폰’에 이르기까지 잡스는 언제나 새로운 결과물로 대중을 열광시켰다.
비록 잡스라는 이름을 유명하게 만든 그 모든 결과물을 자신이 직접 발명하지는 않았다는 점. 그리고 그의 자서전에서도 나타나듯 오만할 정도로 독선적인 성격 덕에 인생 전반에 걸쳐 많은 갈등을 빚기도 하는 등 어떤 시선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렇듯 컴퓨터, 포터블 PC, 스마트폰, MP3 그리고 애니메이션 등 IT 업계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 스티브 잡스의 경력에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게임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첫 직장이 된 곳도 바로 게임사였으며, 애플을 공동 창업한 또 다른 천재 스티브 워즈니악과 첫 결과물을 내놓은 것도 모두 그곳에서 시작된 일이기도 하다.
1974년 ‘아타리’에 입사한 잡스는 야간 근무를 병행하며 회사에서 출시한 게임을 손보는 일을 맡고 있었다. 전자 공학도의 길을 걷던 잡스에게 매뉴얼 없이 보다 직관적이고 단순하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은 큰 매력으로 다가왔고 디자인, 매뉴얼 등 게임의 다양한 부분을 수정 혹은 설계하는 작업에 착수하면서 서서히 중요 프로젝트에 이름이 오르내릴 정도로 성장해 나갔다.
이후 잡스를 높게 평가한 아타리의 창업자 놀런 부슈널은 그에게 ‘벽돌깨기’류 게임의 원조로 평가 받는 ‘브레이크 아웃’의 개발을 맡기게 된다. 당시 아타리는 자신들의 게임인 ‘퐁’의 대성공으로 큰 유명세를 탔지만 수 많은 아류작들 덕에 그다지 많은 수익을 얻지 못했고, 이에 골머리를 앓던 경영진은 ‘퐁’을 이을 후속작 개발에 착수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수 많은 게임을 만들어내던 아타리의 특성상 이를 맡을 개발자가 부족하게 되어 게임 프로젝트 자체가 흔들릴 위기에 처하자 놀런 부슈널은 잡스에게 이 일을 의뢰하기에 이른다. 이를 수락한 잡스는 그 조건으로 고등학교 시절 함께 수업을 듣던 친구 한명을 끌어들이는데 이 친구가 바로 컴퓨터 역사에 또 다른 혁명을 가져온 스티브 워즈니악이었다.
이전부터 게임에 큰 관심을 가지던 워즈니악은 잡스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해 ‘브레이크 아웃’의 개발에 참여하게 되고 둘은 합심하여 게임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처음 일을 지시한 놀런 뷰슈널이 ‘브레이크 아웃’에 사용되는 칩의 양을 50개 미만으로 줄이면 줄어든 칩에 비례해 보너스를 주기로 약속했다는 것이다.
공을 튕겨내 벽돌을 하나하나 부수는 방식의 ‘브레이크 아웃’은 스페이스 바의 움직임에 따라 달라지는 물리엔진 그리고 다중 플레이가 지원되는 등 당시 기술력으로 높은 사양을 요구하는 게임이었고, 그에 비례해 칩의 수가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훗날 애플 컴퓨터를 거의 혼자 설계했다시피 할 정도로 천재성이 다분했던 워즈니악은 당시 내로라하던 개발자들도 하지 못했던 일을 불과 4일만에 끝냈고 45개의 칩으로 게임을 설계해 내기에 이른다.
단시간에 목표를 달성해 보너스 조건을 충족했지만 정작 이 일을 해낸 워즈니악은 보너스는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그 이유인즉 잡스가 워즈니악에게 보너스의 존재를 알리지 않은 것이다. 처음 잡스는 워즈니악에게 사례비의 절반을 주기로 약속했지만 상부에서 약속한 보너스 사실은 알리지 않았고, 결국 잡스는 보너스를 합한 5,000달러를 받았고, 거의 모든 일을 도맡아서 한 워즈니악은 350달러를 받는데 그치고 만다.(이 때부터 기술자를 가혹할 정도로 몰아 부치는 잡스 특유의 일처리가 시작됐다는 평가도 있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워즈니악의 능력을 확인한 잡스는 2년후 인 1976년 ‘애플 컴퓨터’(애플)를 공동 창업하여 키보드와 디스플레이장치(모니터)를 갖춘 최초의 퍼스널 컴퓨터(PC) ‘애플1’을 선보인다. 게임을 통해 서로의 가능성을 확인한 괴짜 청년 두 명이 IT 역사에 한 획을 그은 회사를 창업하기에 이른 셈이다.
잡스와 게임의 인연은 계속 이어진다. 1982년 애플의 전략, 마케팅 담당 이사였던 ‘트립 홉킨스’는 애플사가 게임산업에 보다 적극적으로 뛰어들기를 바랬고, 잡스에게 끊임없이 게임 부분에 더 많은 관심을 주기를 권했다.
하지만 당시 ‘하드웨어’인 애플 PC의 개발에 집중하고 있던 그에게 ‘소프트웨어’인 게임은 그다지 큰 관심사가 아니었고, 자신의 뜻이 계속 묵살되자 ‘트립 홉킨스’는 직접 회사를 창립하기에 이른다.
'트립 홉킨스'가 세운 회사가 바로 현재 전세계 10여 곳 이상에 지부를 두고 있음과 동시에 매년 수 십억 달러를 벌어들이는 게임업계의 거대 공룡 일렉트로닉 아츠(이하 EA)다. 세계 최대의 게임업체 EA는 잡스와 의견차이에서 시작된 셈이다.
비록 잡스와 의견차이로 인해 만들어진 회사라고는 하지만 초창기 EA의 이사진에 애플의 공동 창업자인 스티브 워즈니악도 함께하는 등 양사는 이후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더욱이 세계 게임의 대공황으로 불리는 ‘아타리쇼크’가 발생한 이후 존폐에 기로에 선 EA는 뛰어난 성능을 지닌 애플 PC를 통해 게임을 집중적으로 출시하여 돌파구를 마련하는 등 애플과 EA는 게임 분야의 파트너로써 오랜 시간 함께 하는 관계로 남았다.
마이크로소프트(MS)의 명작 게임 '헤일로'와 악연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지금이야 '헤일로'를 개발한 개발사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번지 스튜디오지만 사실 그 이전에는 매킨토시의 게임을 주로 제작하던 회사였다. 1998년 자신들의 명작 게임 ‘미스’를 SF 스타일로 만들기로 한 번지는 ‘멍키너츠’(Monkey Nuts)라는 코드네임으로 게임 개발에 착수했다.
이후 1999년 ‘맥 월드 컨퍼런스’에서 잡스는 직접 이 게임을 소개했고, 곧 전세계 게임 마니아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기 시작했다. 더욱이 '헤일로'는 윈도우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실한 매킨토시 진영의 게임에 기대주로 였으며, 게임이 PC의 판매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잡스 역시 헤일로에 많은 관심을 쏟던 것이 사실이었다.
특히, 번지의 경우 명작으로 꼽히는 FPS 게임 ‘마라톤’ 시리즈를 2편을 제외하고 모두 맥킨토시 전용으로 출시하는 등 애플 친화적인 행보를 이어와 매킨토시를 가진 게이머에게 번지는 게임사 그 이상의 각별한 존재이기도 했다.
하지만 2000년 6월 번지는 애플의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MS 게임즈에게 인수되고 만다. 그 이유는 바로 자금난. 이미 전부터 자금난에 시달려온 번지는 애플과 MS 양쪽에 인수의사를 물어보았고, 잡스가 뜸을 들이는 사이 MS가 신속하게 계약을 체결해 버린 것이다.
해외 언론의 보도에 의하면 이 사실을 안 잡스는 엄청나게 분노했다. 다수의 컨퍼런스에서 맥킨토시 전용으로 나올 예정인 게임이 하루아침에 윈도우로 출시될 상황에 처했고 결국 대중에게 허위 소문을 퍼트린 셈이 됐기 때문.
분노에 차있던 잡스는 당시 MS의 CEO 였던 스티브 발머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따졌고, 발머가 PC 게임 몇 가지를 매킨토시로 이식해 주기로 약속하여 잡스를 진정시키기도 했다.(물론 이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MS의 인수 이후 번지는 ‘번지 스튜디오’로 회사명을 변경했고, MS 게임즈의 퍼스트 파티 개발사로 활약하게 된다. 많은 게이머들에게 큰 관심을 받던 ‘헤일로’ 역시 윈도우와 Xbox로 출시되며 대성공을 거두게 되고 ‘헤일로 box’라는 호평을 받으며 MS 진영을 든든하게 받치는 프랜차이즈로 성장한 것은 이미 유명한 사실.
하지만 맥킨토시 버전은 2002년 윈도우 PC판이 나온 뒤 무려 1년이 지난 2003년 이후에나 출시됐고, 이후 시리즈 역시 맥킨토시를 외면해 북미 최고의 게임으로 평가 받는 ‘헤일로’는 애플의 사용자들에게 애증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처럼 비록 게임과 다른 분야에서 활약했지만, 스티브 잡스의 인생에는 게임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더욱이 그가 이룩한 결과물을 통해 새로운 장르, 새로운 플랫폼의 게임이 등장했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 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야심 넘치던 청년 시절 게임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스티브 워즈니악'이라는 평생의 동료를 얻은 스티브 잡스처럼 나날히 그 영향력을 넓히고 있는 게임산업을 통해 제2, 제 3의 잡스가 나타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