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준의 게임 히스토리] 누군가에게는 세계 최고의 게임사 '엘프'의 발자취
지난 3월 1일 국내 커뮤니티를 발칵 뒤집어 놓은 소식이 전해졌다. 바로 일본의 게임 개발사 엘프가 홈페이지를 통해 3월 31일 공식적인 폐업을 선언한 것이다.
이 소식은 여러 웹진을 통해 널리 알려졌으며, 여러 블로그에서 과거 엘프를 추억하는 포스팅이 이어졌고, 과거 자신이 구매했던 게임을 소개하는 게시물이 큰 화제가 되는 등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
스퀘어에닉스나 세가, 코나미, 반다이와 같은 수백 억원을 벌어들이는 게임사도 아니고, 수 백만 장의 판매고를 올린 게임 시리즈를 개발한 회사도 아닌 일개 '19세 등급 게임' 이른바 '에로게'(야겜)을 개발하는 개발사의 폐업이 이렇게 많은 관심을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엘프는 어찌 보면 한국과 전혀 인연이 없는 회사라고 할 수 있다. 19세 게임의 출시가 거의 불가능한 한국 심의 규정상 엘프의 게임들은 정식 출시된 사례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으며 그 마저도 다량의 장면이 삭제된 전연령 버전만이 유통을 통해 들어왔다.
하지만 이들이 남긴 작품들은 당시 피끊는 청춘기를 보내던 지금의 20~30대 게이머들에게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게임으로 불리며 수 많은 밤을 지새우게 만든 게임이기도 했으며, 네트워크 환경의 발전과 발맞춰 많은 이들에게 널리 퍼지기도 했다. 비록 청소년이 즐기기에는 매우 부적절한 엄청난 수위의 묘사와 연출로 가득해 한 때 불건전한 컴퓨터 게임으로 지목되어 여론의 뭇매를 맞은 적도 있지만 말이다.
오랜 세월을 뒤로하고 오는 3월 31일을 기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엘프. 이번 히스토리에서는 엘프의 폐업을 계기로 그들이 걸어온 20년간의 발자취를 한번 되짚어 보도록 하겠다.
엘프의 시작은 19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의 유명 에로게 개발사에서 독립한 이들이 창립한 엘프는 당시 일본에 만연한 에로게 게임들과 차별화를 꾀하는 독특한 컨셉의 게임을 개발하는 것을 모토로 한 회사였다.
당시 일본에서 에로게 게임을 보는 시각은 지금의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아 에로게 게임에 대한 단속과 심의가 굉장히 높은 수준이었고, 게임 자체도 단순 파격적인 설정의 저 퀄리티 게임이 대다수라 음지에서 즐기는 게임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엘프는 치밀한 설정을 지닌 판타지 RPG와 에로게를 접목시킨 게임을 자신들의 처녀작으로 선보이니 이 작품이 바로 '드래곤나이트'다. 1989년 11월 발매된 '드래곤나이트'는 당시 유행하던 횡스크롤 RPG에 에로게를 접목시켜 일개 하청 개발사였던 엘프를 일약 중소 개발사로 도약시킨 작품으로, 던전 깊숙한 곳으로 적을 물리치며 그곳에 감금된 미소녀들을 풀어준다는 설정을 통해 지금의 수 많은 던전 RPG에 영감을 준 게임이기도 했다.(물론 풀어준 미소녀를 그냥 두지는 않았다.)
더욱이 인물들 간의 시나리오와 다양한 아이템, 캐릭터의 성장 콘텐츠까지 도입된 '드래곤나이트'는 게임 그 자체만으로도 수작이었으며, FM TOWNS, X68000 등의 다양한 플랫폼으로 이식되어 일본을 넘어 미국, 유럽 등지에서도 높은 인기를 누렸다. 물론 19세 장면은 일정 수정되어 몇몇 국가에서는 이 게임이 19세 게임인지 모르는 경우도 많았으며, 무리하게 삭제한 콘텐츠 덕에 많은 버그가 발생하는 헤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흥행에 힘입어 새로운 차기작의 개발에 매진한 엘프는 1992년 또 하나의 수작을 내놓으니 이 작품이 바로 국내 게이머들에게 '이것이 연애다!'라는 감정을 일깨워 준 게임이자 90년대에 청춘을 보낸 이들에게 '레전드'의 칭호가 아깝지 않은 명작으로 불리는 작품 '동급생'이다.
아직까지도 '전설이 아닌 레전드' 급의 작품으로 분류될 정도의 우주 명작 동급생은 각 캐릭터별로 다른 공략 루트를 부여하고, 남성들의 취향에 따라 연상, 연하 심지어 커리어 우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타일의 여성을 등장시켜 이성 간의 연애라는 큰 틀에 어드벤처와 시뮬레이션 요소를 도입한 혁신적인 게임이었다.
동급생의 기획 초기 엘프는 기존의 연애게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게임을 구상했지만 '로도스도 전기' 등의 인기 애니메이션의 작화를 맡은 바 있는 '타케이 마사키'가 참전함으로써 게임의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게 된다.
'타케이 마사키'가 그려낸 캐릭터와 설정들을 단순히 연애게임으로 표현하기 아깝다고 판단한 엘프는 이들 캐릭터 하나하나에 모두 스토리를 입힌 것은 물론, 원화에 최대한 가까운 캐릭터를 구현하기 위해 당시 '16색' 이었던 하드웨어의 한계를 극복해 낸 엄청난 그래픽을 연출해 냈다. 당시의 게임 그래픽이 일일이 손으로 찍어내는 도트 그래픽인 점을 감안할 때 당시 게이머들에게는 충격적인 수준의 비주얼이었다.
더욱이 시간에 따라 공략할 수 있는 캐릭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당시 '동급생'을 플레이하는 게이머들은 컴퓨터 옆에 '00시 00분 공원 유이' 등의 내용을 종이에 적어 놓을 정도였으며, 이미 엔딩을 본 친구가 알려주는 공략 루트를 필기하는 등의 열성을 보이는 게이머들도 심심찮게 등장했다.
또한, '동급생'은 또 다른 의미에서 전설로 통하는 게임이기도 했는데, 바로 국내 정식 발매됨과 동시에 아마추어 번역의 시초가 됐다는 점이었다. 이전까지 등장한 이쪽 장르(?)의 게임들은 모두 영어나 일본어로 등장했으나 지금은 전설이 된 한글화 팀 '한누리'가 직접 한땀한땀 번역한 ''동급생'' 한글패치를 선보이면서 더욱 많은 게이머들이 이를 즐길 수 있었다.
특히, 이후 국내에 정식으로 출시되지 않은 게임들이 아마추어 한글화 팀의 노력으로 빛을 받을 수 있었으니 이 또한 '동급생'이라는 하나의 게임이 가져다 준 긍정적인 흐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처럼 연애의 참 맛(?)을 알려준 '동급생' 이후 국내 게이머들의 관심은 다른 작품에 집중됐고, 이에 '노노무라병원사람들'(1996년 발매), '유작 시리즈'(1995년 발매)와 같은 게임들도 덩달아 화제가 되기에 이른다. 물론 밤새 공부하는 이들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노란 수건의 관리인 아저씨에게 초첨이 맞춰진 '유작 시리즈'와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추리를 이끌어나가는 '노노무라병원사람들'은 그 특유의 플레이 덕에 게이머들의 취향이 갈리기도 했지만 말이다.
특히, '노노무라병원사람들'의 경우 특별 패치 없이 MS-DOS로 구동하면 텍스트가 모두 깨지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오로지 엔딩을 보겠다는 일념에 덤벼드는 게이머들이 속출하기도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추리가 잘못되면 '게임오버'가 되는 추리게임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텍스트도 나타나지 않는 선택지를 일일이 다르게 선택하여 결국 엔딩을 본 게이머들이 존재했다는 것. 그야말로 열정으로 엔딩을 봐야했던 90년대 게임의 단편을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이후 또 다른 전설의 한글화 팀 '사과나무'의 한글 패치로 인해 이 같은 문제는 대부분 해결됐다. 다만 이 '사과나무' 팀의 '공식' 한글화 패치는 '노노무라병원사람들'의 엔딩 장면을 모두 검은색으로 처리하고, 대사 역시 건전하게 바꾸어 놓았는데, 사실 원래 소스를 모두 가지고 있었으나 공식적인 패치에서는 대중의 눈을 고려해 이를 공개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후 '사과나무' 팀은 원래의 엔딩을 유감없이 감상할 수 있는 또 다른 패치를 인터넷에 퍼트렸고, 게이머들은 이후 편안하게 원래의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작품이외에도 '애자매', '하급생', '세상의 끝에서 사랑을 노래하는 소녀 YU-NO' 등의 히트작을 쏟아내며 영광의 90년대를 보낸 엘프는 2000년대 들어 급격히 매출이 감소하기 시작한다. 바로 다양한 게임기가 경쟁하던 시기를 벗어나 당시 게임시장의 플랫폼이 통합됨에 따라 19세 게임에 대한 제제가 높아졌고, 이는 다양한 기기에 게임을 선보임으로써 수익을 거뒀던 엘프의 정책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던 것이다.
때문에 엘프는 자사의 게임을 반프레스토, NEC 애비뉴 등의 유통사를 통해 출시하기 시작했는데 이마저도 판매가 신통치 않자, 이전 작품들을 리메이크하여 선보이는 식으로 노선을 바꾼다. 문제는 이들 리메이크 게임을 출시하면서 유통사에게 게임의 판권까지 같이 넘겼다는 것.
실제로 동급생과 드래곤나이트 등 엘프하면 떠오르는 게임 중 상당수는 반프레스토, NEC 애비뉴가 지니고 있는 상황이며, 이들 게임의 판권을 넘긴 이후 만든 신작들 역시 크게 주목받지 못하면서 엘프의 규모는 급속히 줄어들기 시작한다.(이러한 상황에서도 엘프는 애자매의 판권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애자매의 위상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는 부분)
더욱이 2014년 엘프의 핵심 멤버들과 함께 산하 게임사 '실키즈'의 멤버들이 '실키즈 플러스'라는 독립 회사를 세우며 사실상 성장동력원을 잃어버렸고, 2015년 10월 발매된 '마로의 환자는 가텐계 3'라는 게임의 엔딩 크래딧에 Thank you for the last 27 years(27년간 정말로 감사했습니다)라는 문구가 삽입되어 회사가 문을 닫는 것이 아니냐는 루머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6년 3월 1일. 엘프는 자신들의 홈페이지를 통해 회사의 폐업을 공식적으로 선언함으로써 루머는 곧 사실로 밝혀졌다.
혹자는 한국과 그다지 접점도 없는 어찌 보면 저질 게임을 개발하던 일개 개발사의 폐업에 왜 다른 의미를 담느냐고 반론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때 그 시절 게임으로 밤을 불태웠던 이들에게 엘프는 일개 게임사 이상의 존재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27년의 파란만장한 세월을 뒤로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엘프. 이 일본 개발사의 폐업이 과거 가슴에 묻혀있던 추억 하나가 없어진 듯한 씁쓸한 감정으로 다가오는 것은 왜 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