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너도 오래됐고, 나도 늙었구나" '진여신전생3 녹턴'
'진여신전생3 녹턴'을 처음 만난 건 2003년 겨울이었다.
당시 학생이었던 기자는 끝내 주는 게임이 한글화로 출시됐다는 소식에 용돈을 모아 모아 용산으로 달려가 통행세를 요구하던 나이 많은 형들을 회피하며 간신히 게임을 구매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역경과 고난을 뚫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플레이한 순진했던 학생의 기대감은 곧 절망으로 바뀌고 말았다.
온갖 오컬트적인 요소로 범벅된 세계관과 시작부터 세계가 멸망해 악마가 되어버린다는 스토리, 그리고 지금도 몸서리쳐지는 살벌한 난이도까지 그야말로 이 게임은 악마 그 자체였기 때문.
이 게임이 여신전생 시리즈 중 하나이고, 합체 전승 등을 통해 별도의 공략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혀 몰랐던 그 학생은 수도 없이 게임오버를 보며 결국 엔딩을 보는 데 성공했지만, 그 엔딩조차 베드 엔딩으로 끝나 그야말로 절망하고 말았다.
이처럼 많은 이들에게 일본 RPG의 어두운 맛을 제대로 보여준 '진여신전생3 녹턴'이 지난달 29일 HD 리마스터로 새롭게 돌아왔다.
2003년에 발매된 '진여신전생3 녹턴'은 일본 RPG 장르의 게임 중 컬트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여신전생 시리즈 중에서도 PS2의 황혼기를 장식한 명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HD 리마스터로 전체적인 그래픽이 상향된 이 게임은 스토리 진행을 수월하게 해주는 머시풀(MERCIFUL) 난이도가 추가되었으며, PS4와 닌텐도 스위치 플랫폼으로 발매된 것이 특징.
아울러 데빌메이크라이의 주인공 ‘단테’가 등장하는 확장팩 ‘매니악스’가 함께 발매되어 매니악스 버전으로 플레이할 경우 더욱 다양한 악마 전서 목록과 추가된 엔딩을 처음부터 즐길 수 있는 것도 이번 '진여신전생3 녹턴' 리마스터의 특징 중 하나다.
워낙 명작으로 꼽히는 게임이고, 당시 게이머들에게 충격을 준 작품이기도 했으나, 이번 '진여신전생3 녹턴 HD 리마스터’의 그래픽은 냉정하게 말해 기대 이하인 수준이었다.
HD 리마스터로 그래픽이 또렷해졌고, 텍스처의 해상도가 높아진 것은 좋으나, 원작의 특징 중 하나였던 몽환적인 느낌(물론, PS2의 한계를 가리기 위한 ‘블러’처리였지만)까지 사라져 오히려 투박한 그래픽이 도드라져 버린 느낌이다.
여기에 독특한 외형과 스타일로 인상적이었던 게임 내 캐릭터들이 예전 PS2 폴리곤에 외곽선만 또렷하게 그려져 이질감이 강했다. 또한, 사운드 역시 PS2 버전을 사용한 것 같은 저음질의 효과음이 중간중간 등장해 어색했고, 무엇보다 컷신의 경우 원작의 영상을 그대로 사용하여 최근 등장한 모바일게임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원작 존중"을 전제로 그래픽과 게임성을 향상시켰다는 세가의 의도는 이해하지만, 그래도 원작에서 보여준 몽환적인 느낌은 살리고, UI나 악마 전서에 등장하는 캐릭터에 집중하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PS4로 출시된 버전인 만큼 게임 플레이는 굉장히 쾌적했다. 맵이나 전투 중간 로딩이 상당했던 원작과 비교해 굉장히 빨라지고, UI도 직관적으로 바뀌었으며, 시점이 고정되어 캐릭터를 찾기 어려웠던 몇몇 스테이지에서의 불편함도 크게 감소한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중간 세이브가 추가되어 세이브 장소인 터미널을 찾아 헤메던 번거로움을 덜었고, 옵션에도 난이도를 선택할 수 있는 등 유저의 편의성이 높아진 것은 매우 바람직해 보이는 부분.
하지만 게임 난이도는 여전했다. 페르소나 시리즈도 어려워하는 이들이 속출하는 상황에서 세기말 감성을 지니고 있는 ‘진여신전생3 녹턴’은 요즘 등장하는 RPG보다 걸핏하면 전멸에 가까워지는 그때의 어려움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으며, 레벨 노가다와 악마 전서를 통해 악마들의 특성을 외우고 있어야 할 정도로 월등히 높은 난이도를 보여준다.
이러한 난이도에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것이 바로 이번 리마스터에 추가된 ‘머시풀’ 난이도다. “자비로운 난이도”라는 설명에 걸맞게 ‘머시풀’ 난이도에서는 몬스터의 능력치와 조우 확률이 낮아지고, 자금 획득도 크게 높아졌다.
무엇보다 보스 체력이 낮아졌기 때문에 보스전을 위해 죽어라 노가다를 반복했던 고통에서 조금이나마 해방될 수 있었다. 다만 이 머시풀은 처음 선택할 때만 적용되고 이후 옵션에서는 난이도에서 선택할 수 없기 때문에 초보자나 30대 중반 이상의 게이머라면 “노멀이 국롤이지”라는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해당 난이도를 선택하는 것을 추천한다.
이처럼 HD '진여신전생3 녹턴'은 그래픽이나 사운드 등 리마스터로는 합격점을 주기 애매하지만, 명작이라 평가받던 원작이 가진 재미를 PS4와 스위치라는 신기종에서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원작의 팬이나 페르소나 시리즈를 즐겼던 이들이라면 한 번쯤 즐겨볼 만한 작품으로 생각된다.
비록 게임을 플레이하다 과거의 PTSD가 올라와 황급히 머시풀 난이도로 바꾸어 플레이하며, “너도 오래됐지만, 나도 그만큼 늙었구나”라는 생각에 서글퍼졌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