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준의 게임 히스토리] 세계 게임시장을 움직이는 게임 공룡 EA -1부

700억 달러(한화 약 72조 8천억 원)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매출을 기록하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세계 게임시장에서 무려 32%에 달하는 점유율을 보유하고 있는 북미 대륙. 22억 달러(24조 2천억 원)에 이르며 이 세계 게임업계를 선도하고 있는 이 거대 시장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회사는 어디일까?

EA 로고
EA 로고

‘액티비전 블리자드’, ‘락스타게임즈’, ‘유비소프트’, ‘벨브’, ‘소니컴퓨터엔터테인먼트’등 수 많은 게임사가 북미 게임 시장을 놓고 격돌하고 있지만, 1982년 설립 이후 무려 30년간 게임 개발, 마케팅, 유통과 출판에 이르기까지 게임산업 전반에 막강한 파워를 뽐내는 일렉트로닉 아츠(이하 EA)만큼 여러 분야에서 영향력을 미치는 게임사도 드물다.

니드 포 스피드, 반지의 제왕, 배틀필드, 심시티, 심즈 그리고 피파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매년 전세계 게이머들에게 수십 개의 게임 시리즈를 선보이며 세계 게임시장을 움직이고 있는 EA. 한 해 20억 달러(2조 2천 억 원)의 수익을 기록 중인 이 거대 게임사는 과연 어떻게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EA의 역사는 1982년 ‘트립 홉킨스’가 만든 회사로부터 시작된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EA가 설립된 가장 큰 이유가 IT 산업에 혁신이라는 바람을 일으킨 ‘스티브 잡스’와 창입자인’ 트립 호킨스’와의 불화 때문이라는 것이다.

애플 당시 트립 홉킨스
애플 당시 트립 홉킨스

당시 애플의 전략 & 마케팅 담당 이사였던 ‘트립 홉킨스’는 애플사가 게임산업에 보다 적극적으로 뛰어들기를 바랬으며, CEO였던 ‘스티브 잡스’에게 끊임없이 게임 부분에 더 많은 관심을 주기를 권했다. 하지만 당시 ‘하드웨어’인 애플 PC의 개발에 집중하고 있던 ‘스티브 잡스’에게 ‘소프트웨어’ 산업인 게임은 그다지 큰 관심사가 아니었고, 결국 자신의 뜻이 묵살되자 ‘트립 홉킨스’는 직접 게임회사를 창립하기에 이른다.

게임업계에 발을 디딘 ‘트립 홉킨스’는 회사를 꾸리기 위해 전 직장이었던 애플과 아타리 등 다양한 업체에서 인재를 모으기 시작한다. 인터뷰가 금지되거나 게임에 이름을 올릴 수도 없을 정도로 개발자를 회사의 소유물로 보던 당시 게임업계의 풍토에 반해 EA의 창립 멤버들은 게임을 예술의 한 장르로 간주했고, 많은 토론 끝에 일렉트로닉(전자)에 아트(예술)를 더한 ‘일렉트로닉 아츠’를 회사의 이름으로 사용하기로 한다. 게임 업계의 거대 공룡 EA가 세계 게임시장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회사의 이름을 증명이라도 하듯 EA는 게임을 개발하는 개발자를 단순히 회사 소속의 직원이 아닌 게임 전반을 책임지는 ‘아티스트’로 존중했고, 보다 자유로운 개발환경을 만드는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여기에 게임 타이틀 전면에 개발자의 이름을 수록하거나, 개발자의 이름을 딴 게임 시리즈를 출시하는 등 당시 게임 업계로는 진보적인 전략을 취했으며, 게임 타이틀 디자인과 음악에 큰 공을 기울이는 등 기존 게임과는 다른 고급화 전략을 사용했다.(이 방식은 피파시리즈로 대표되는 EA의 스포츠 게임들에게 고스란히 반영된다.)

아울러 EA는 게임을 만드는 개발사와 퍼블리셔 여기에 타이틀 제작, 배급사가 따로 분리되어 있는 기존의 게임 산업에 반해 퍼블리싱부터 제작, 유통, 배급에 이르기까지 게임 출시를 위한 모든 분야를 직접 진행하는 새로운 형태의 게임 유통을 선보였다. 이러한 방식은 현재 게임사들의 유통 구조이기도 하며, 중간 과정을 없앤 보다 간결한 유통 체계로 자신들의 수익을 더욱 극대화 시켰다

이렇듯 기존 업체와 차별화를 두며 야심 차게 게임 시장에 모습을 드러낸 EA였지만, 당시 게임업계는 워너브라더스를 비롯한 각종 업계의 회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게임사들을 사들이며 오로지 수익에만 집중하여 질 낮은 게임을 쏟아내던 시기였다. 결국 1983년 당시 세계 최고의 게임사 아타리에서부터 시작된 게임산업의 대공황 이른바 ‘아타리쇼크’ 사태가 전세계로 확산되면서 EA는 회사를 만든 지 불과 2년 만에 풍전등화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게임산업에)지독한 시기였습니다. 너무 끔찍했어요. EA를 만들 때 게임을 만드는 회사가 130여 개나 됐지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회사는 단 6곳뿐일 정도니까요” ‘트립 홉킨스’는 ‘아타리쇼크’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표현했다. 한순간 지구에서 사라진 공룡처럼 북미 게임시장의 생태계는 '아타리쇼크' 이후 완전히 파괴되고 만다.

아타리게임들
아타리게임들

이처럼 북미 게임산업에 ‘아타리쇼크’가 남긴 상처는 컸다. 물밀 듯이 밀려들던 자본은 썰물처럼 빠져 나가 몇몇 인기 타이틀을 지닌 곳을 제외한 대부분의 게임사들이 문을 닫게 되었다. 설상가상 게임사들이 무너진 빈틈을 노려 ‘닌텐도의 패미컴’, 세가의 ‘메가드라이브’ 등을 앞세운 일본 게임들이 대거 북미 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한다. 이를 통해 북미 게이머들의 취향이 독특한 액션과 뛰어난 그래픽으로 무장한 일본산 게임을 선호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불과 몇 년 만에 시장의 트랜드가 완전히 변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위기 속에서도 EA는 개발자를 우대하는 전략에 이끌린 뛰어난 개발자들이 몰려들었고 이를 잘 통솔해 뛰어난 게임을 다수 보유하게 된다. 더욱이 이들 게임을 가정용 콘솔 기기가 아닌 ‘코모도어 64’와 ‘애플 II’ 등의 PC로 집중적으로 출시했고, 게이머들의 호평을 이끌어내며 많은 이득을 거두며 최악의 상황을 넘어 점차 흑자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소생의 징조를 보이던 EA에게 다시 큰 기회가 찾아온다. 바로 북미 게임시장을 호시탐탐 노리던 닌텐도의 라이벌 세가가 EA를 찾아온 것이다. 1989년 북미에 자신들의 새로운 가정용 콘솔기기 ‘메가드라이브’(북미 출시명: 제네시스)를 출시한 세가는 북미 게임시장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EA에게 적극적인 구애를 보내기 시작한다.

물론, 닌텐도 역시 EA를 무시한 것이 아니었다. 닌텐도는 자신들의 게임기 패미컴(북미 출시명: NES)의 EA에게 자신들의 서드파티(콘솔 기기의 제조사로부터 라이선스를 받아 게임을 제작하는 회사)로 참여해 줄 것을 지속적으로 요청했지만, EA는 자신들이 추구하는 ‘게임의 고급화’라는 컨셉에 어울리지 않는 사양을 지닌 패미컴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세계 최초의 16비트 CPU를 통해 이전의 가정용 게임기와 차별화된 성능을 지닌 세가의 ‘메가드라이브’는 EA가 추구하는 방향성과 정확히 들어맞았고, 적극적으로 세가의 서드파티의 참여하기에 이른다. 이후 EA는 당시 액션과 RPG에 치중한 닌텐도 진영의 게임에 비해 16비트의 성능을 이끌어낸 빠르고 다이나믹한 스포츠 게임과 슈팅게임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당시 성장을 거듭하던 스포츠 엔터테인먼트의 인기와 맞물리며 북미 게이머들에게 폭발적인 호응을 이끌어냈으며, ‘메가드라이브’가 북미 게임시장에서 성공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메가드라이브’의 후속작 ‘세가 세턴’이 북미에서 신통치 않은 성적을 기록하고 EA가 자체 게임 출시에 나서며 세가와 EA의 관계는 끊어졌지만, 함께 힘을 모아 북미 시장을 제패했던 기억은 남아있는지 현재 EA가 일본에 출시한 게임 중 상당수는 세가 퍼블리싱에서 유통을 맡고 있다.

3DO 얼라이브
3DO 얼라이브

이렇듯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EA의 창업자 ‘트립 홉킨스'는 북미 게임업계에서 무시 못할 인사로 자리잡았으며, 1990년 EA를 나온 뒤 게임기 플랫폼 사업에 새롭게 뛰어든다. 그 작품이 바로 전설의 게임기라는 조롱 아닌 조롱을 받으며 처참한 실패를 겪은 ‘3DO’다. 이 3DO는 1994년 금성사(현 LG전자)를 통해 ‘3DO 얼라이브’라는 이름으로 한국에도 출시됐는데, 이때 방영된 TV 광고의 모델이 당시 촉망 받는 신인으로 떠오르던 ‘이정재’였다.(그리고 이 광고는 '이게 영화야 게임이야?', '단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어요'라는 게임업계의 전설적인 문구를 남기기도 했다.)

‘메가드라이브’를 통해 스포츠 게임의 가능성을 본 EA는 미식축구의 ‘매든 NFL’, 아이스하키의 ‘NHL’ 시리즈의 대성공에 힘입어 또 하나의 스포츠 게임 시리즈를 준비한다. 지금도 어디선가 듣고 있을 EA 스포츠의 슬로건 “EA Sports. It's in the game”을 전세계에 알린 주인공 피파 시리즈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다.

지금이야 세계 최고의 축구게임으로 꼽히는 피파 시리즈지만, 1994년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피파에 대한 우려는 상당히 높았다. 축구 게임 장르는 이미 '매치데이 사커', ‘킥 오프’, ‘센서블 사커’ ‘닌텐도 월드컵’ 등의 게임으로 경쟁이 매우 치열한 시장 중 하나였으며, 직접 개발을 맡은 EA의 역량을 의심하는 이들도 많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EA는 이들 게임과 차별화된 콘텐츠를 선보였다. 바로 게임업계 최초로 FIFA로부터 정식 라이선스를 확보한 것이다. 국가대표팀의 라이선스부터 세계 유수의 클럽 그리고 리그에 이르기까지 피파 시리즈는 점차 라이선스의 범위를 넓히는 방식으로 라이벌 게임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피파98 이미지
피파98 이미지

여기에 당시 세계 최고의 축구스타를 표지모델로 활용해 보는 재미를 더한 것은 물론, 매 시리즈마다 유명 팝 그룹의 음악을 삽입해 그야말로 축제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게 했다. 실제 선수들을 사용하는 현실감과 수려한 패키지 그리고 흥을 돋궈줄 사운드까지 피파 시리즈는 94년 월드컵을 기점으로 유럽을 비롯한 전세계에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 판매됐다.

또한, 월드컵, UEFA 유럽축구선수권(유로), 챔피언스리그 등 굵직굵직한 대회마다 출시되는 별도의 특별판은 시리즈를 보완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해당 국가 혹은 문화권에서 가장 명성이 드높은 선수를 패키지 모델로 선정해 인지도를 높이는데 한 몫 했다.(처음엔 좋은 의도로 시작된 특별판이었지만, 점차 게임의 나눠 팔기 식으로 변질되어 EA의 악명을 높이는데 한 몫을 하게 된다)

불황의 늪을 넘어 북미 최대의 서드파티로. 더 나아가 세계 최고의 퍼블리셔 중 하나로 성장한 EA는 거칠 것이 없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자 EA는 엄청난 자금력을 바탕으로 이전부터 이어온 게임사 인수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이때부터 전세계 게이머들에게 큰 비난을 받는 EA의 진짜 모습이 전세계 게이머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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