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우리 동네 해결사로 돌아왔다. 영웅전설 여의 궤적
지난 2020년 시작의 궤적으로, 하늘, 영, 벽, 섬까지 이어지는 15년의 이야기를 장대하게 마무리한 영웅전설 시리즈가 이번에 여의 궤적으로 새로운 출발을 알리고 있다.
여의 궤적은 궤적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완전히 새로운 시리즈는 아니고, 이전 궤적 시리즈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지만, 새로운 주인공의 등장으로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웅전설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은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버려지는 인물들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짜임새 있는 스토리와 빈틈없는 설정이지만, 이것은 반대로 이전 작품을 즐겨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진입장벽으로 작용했다.
엔드게임으로 화려한 마무리를 보여준 마블 어벤져스처럼 영웅전설도 시작의 궤적으로 중요 스토리의 결말을 보여줬으니, 이제 새로운 팬들도 문제없이 즐길 수 있도록 새로운 지역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그려나갈 생각인 것이다.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인 만큼 여의 궤적에는 기존 시리즈 등장인물의 비중이 대폭 줄어들고, 새로운 인물들이 다수 등장한다(세계관이 같으니 가끔 이전 이야기가 언급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모른다고 해도 흐름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다).
이야기의 무대는 이전 시리즈에서 언급됐던 제므리아 대륙의 또 다른 대국 칼바드 공화국이며, 주인공은 뒷 세계의 해결사라고 불리는 아저씨(?) 반 아크라이드다. 팔콤답게 이것저것 비밀이 많은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으니 나중에 어떻게 변하게 될지 알 수는 없지만, 첫 인상은 기존 팔콤 게임에서 보기 힘들었던 타입이라 매우 호감이 간다(고작 24살짜리 햇병아리를 아저씨 취급하는게 어이가 없기는 하지만).
뒷 세계 사람이기 때문에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보여주며, 가끔은 법을 벗어난 해결책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이전에 많은 팬들에게 고구마 100개는 먹은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던 바른생활 사나이 로이드와 전혀 다른 타입이다. 팔콤은 이 같은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 시리즈 최초로 L.G.C 얼라인먼트라는 성향 시스템을 도입했으며, 여러 퀘스트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LAW, GRAY, CHAOS 수치가 올라서, 이에 따라 능력치와 스토리 분기에 영향을 끼치도록 만들었다. 기존 팬들 입장에서는 L.G.C 얼라인먼트로 인해 달라지는 요소보다는 계속 답답하기만 한 로이드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만족스러울 것으로 보인다.
여러 지역을 오가며 세계 멸망의 위협과 싸우던 시작의 궤적과 달리 무대가 평온한 칼바드 공화국으로 옮겨졌고, 주인공도 뒷 세계 해결사이기 때문에, 플레이 흐름은 영/벽의 궤적과 유사한 느낌이다. 반 아크라이드가 동네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해결해주는 가운데, 할아버지가 남긴 유물의 비밀을 파헤치려 하는 모범생 아니에스 클로델을 만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거대 조직 아르마타와 얽히게 되면서, 점점 더 큰 사건에 휘말리는 흐름이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기존의 영웅전설 시리즈와 달리 상당히 매운 맛 스토리가 계속 이어진다는 점이다. 기존에는 모든 적들이 사연이 있고, 죽은 줄 알았던 녀석이 다시 나타나는 일의 반복이었지만, 여의 궤적에서는 등장인물이 잔혹하게 죽는 일이 자주 연출되고, 악역도 철저하게 순수 악으로 등장해 개운한 느낌을 준다. 앞으로도 계속 이야기가 이어지긴 하겠지만, 이번 작품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확실하게 마무리되는 것도 이전 작품과 많이 달라진 부분이다. 다른 게임을 즐기는 이들에게는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기존 영웅전설 팬이라면 주인공의 성격과 스토리 전개만으로도 많이 놀라게 될 것 같다.
전투 시스템도 많이 달라졌다. 아츠와 S크래프트를 중심으로 하는 기본 전투 시스템은 이전과 동일하지만, 실시간 전투가 새롭게 도입됐기 때문이다. 기존에는 필드에서 적을 만날 경우 별도의 전투 공간으로 전환돼 싸우는 형태였지만, 여의 궤적에서는 필드 상태에서도 그냥 적들을 타격할 수 있으며, 실시간 전투 중 샤드 전개를 누르거나, 큰 피해를 받아 위기에 빠지면 기존과 동일한 턴제 전투로 전환된다.
영웅전설 시리즈를 비롯해 턴제 전투 방식의 RPG(역할 수행 게임)는 보스전에서는 전략적인 재미를 느낄 수 있지만, 한방이면 사라질 졸개들과의 전투까지 턴제 전투로 진행하다보니, 전투가 반복될수록 피로도가 높다는 단점이 있었다. 여의 궤적에서는 실시간 전투 도입 덕분에 순식간에 쓸어버리거나, 아니면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게 됐다. 이제 더 이상 던전 들어갈 때 부담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물론 컷신의 스킵 기능이 없어서 연출 장면을 계속 보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나, 위기 상황이 닥치면 만능열쇠처럼 ‘악몽을 두른다’는 대사와 함께 변신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등 다소 뻔한 전개 등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쾌적해진 전투가 이 모든 것을 용서해주는 느낌이다.
이렇듯 영웅전설 여의 궤적은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게임답게 등장인물뿐만 아니라 스토리, 여러 가지 시스템 측면에서 신선한 느낌을 주고 있다. 팔콤 게임답게 그래픽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고, 전체적인 흐름도 영/벽의 궤적으로 다시 돌아간 듯한 느낌이 있기는 하지만, 사이다 같은 성격의 반 아크라이드와 아니에스, 일레인, 페리 등 새롭게 등장하는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새로운 재미를 준다.
시작의 궤적에서 거창한 싸움을 한 뒤에 갑자기 우리 동네 이야기로 돌아와서 다소 심심하게 느끼는 이들도 있겠지만, 영웅전설을 오랜 기간 즐겨온 팬의 입장에서는 너무 비장한 이야기보다는 지갑 찾아주고, 스토커를 퇴치해주는 소소한 이야기가 이 시리즈 캐릭터들에게 더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미 여의 궤적2가 발표된 만큼 이들이 앞으로 얼마나 촘촘하게 얽힌 이야기를 만들어가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