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올드팬들에 의한 올드팬들을 위한"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
본 기자가 창세기전을 처음 접한 것은 서기 ‘일천구백구십팔 년’(1998년) 여름이었다.
당시 기자는 동네 형에게 어떤 CD를 받았고, 당시 한글 게임에 목말라했던 그 초등학생은 밤낮으로 게임을 플레이했지만, 어린 나이로는 해결할 수 없는 버그 덕에 결국 엔딩을 보지 못하여 그 게임은 그리 좋지 않은 추억으로 남았다.
그 CD에 담겨있던 게임이 바로 ‘창세기전2’로, 한국 게임역사에 길이 남을 창세기전 시리즈의 시작점과 같은 작품이었다.
‘창세기전’만큼 국내 이용자들에게 애증의 게임으로 남은 작품도 드물다. 대륙 전체를 관통하는 장대한 이야기와 수미쌍관으로 이어지는 ‘뫼비우스의 띠’ 형태의 스토리 전개 등 국내 게임사가 이런 게임을 만들 수 있다는 감동을 심어줬지만, 워낙 많은 버그로 불편함을 겪으며, 그리 좋지 않은 기억을 심어준 게임이기도 했기 때문.
이러한 창세기전 시리즈의 시작을 알린 ‘창세기전 1&2’의 리메이크 버전이 지난 12월 정식 출시됐다. 라인게임즈 산하 레그스튜디오에서 닌텐도 스위치 버전으로 출시한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이하 창세기전)이 그 주인공이다.
이 게임은 ‘창세기전’과 ‘창세기전2’를 아우르는 합본 리메이크로, ‘창세기전’ 시리즈의 23년 만의 신작이라는 점. 그리고 2016년 라인게임즈가 창세기전 IP를 소프트맥스로부터 구매한 이후 무려 7년 만에 등장한 작품이라는 부분에서 엄청난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게임 출시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라인게임즈와 레그스튜디오는 ‘2023 지스타’ 기간에 맞추어 게임의 체험판을 공개했으나, 해당 체험판은 느린 전개 속도, 불편한 시스템, 낮은 퀄리티의 그래픽 등 여러 부분에서 지적받으며, 혹독한 혹평을 받았다.
이에 정식 버전에 대한 불안감도 높아진 상황에서 레그스튜디오는 대대적인 변화를 약속하며, 정식 버전과 체험판은 확실히 다를 것임을 강조하여 진화에 나섰다.
실제로 플레이해본 게임은 개발사의 약속이 상당 부분 반영된 모습이다. 먼저 가장 많은 지적을 받았던 게임 진행 속도의 경우 전체적인 부분에서 속도가 향상됐고, 옵션에서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기능을 추가해 편의성을 높였다.
그래픽의 경우에도 닌텐도 스위치 기기로 개발된 것을 고려 하면 납득할 만한 수준이다. 체험판에서 지적된 프레임 하락 현상 없이 30프레임을 일관적으로 유지했고, 그래픽 옵션 역시 표준/ 선명함/ 보정 등 3단계로 나누어 이용자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전투 시스템의 편의성이 높아진 것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물약도 장비 교체도 스테이지 입장 전이 아니면 진행할 수 없던 이전 버전과 달리 실시간으로 물약과 장비를 교체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필드 전투 후 HP, MP가 일정량 회복되어 난도가 크게 낮아진 것도 게임 진행에 큰 도움을 주었다.
‘창세기전’의 진행은 과거 80~90년대 출시됐던 SPRG와 유사하게 진행된다. 스토리가 진행된 이후 모험 스테이지에 입장해 몬스터를 사냥하고 육성을 진행하며, 이후 메인 스테이지에서 보스전이 진행되는 방식이다.
이 패턴은 게임 시작부터 엔딩까지 계속 이어지는데, 스토리의 전환점이 되는 스테이지와 중요 이벤트를 통해 변주를 주어 게임의 분위기를 환기시켰고, 무엇보다 캐릭터들의 대사가 풀 보이스로 구현되어 흥미를 높인 것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여기에 한국 게임 역사의 불후의 캐릭터 ‘흑태자’와 왕녀 ‘이올린’의 가슴 저린 이야기와 라시드 팬드래건을 비롯한 수많은 캐릭터가 얽히고설키며 겪는 성장하는 과정이 모두 등장하여 지금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원작의 감동을 최신 기기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도 상당히 즐거운 경험 중 하나였다.
이처럼 이번 ‘창세기전’은 스토리를 보는 것에 초점을 맞춘 게임 시스템과 진행 형태로 원작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충분히 합격점을 줄 수 있는 모습이었지만, 새로운 세대의 이용자들에게 어필하기는 다소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먼저 대하드라마 못지않은 ‘창세기전1&2’의 스토리를 하나의 게임에 모두 담은 것은 좋으나, 이 이야기가 시작되는 초반부의 경우 구간이 너무 길고, 이야기의 흐름이 다소 난잡하게 구성되어 있어 지루하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웠다.
특히, 후반부 메인 스토리인 ‘창세전쟁’으로 접어들면서 전개가 빨라져 상당한 재미를 주었던 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초반부 분량을 축소해 이야기를 조금 함축시키는 것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에 예정된 추가 DLC에서는 이러한 스토리 요소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닌 전투 시스템에 더욱 집중하여 “원작에서 보여준 수많은 유닛과 캐릭터가 격돌하는 대규모 전투를 좀 더 부각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라는 것이 본 기자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