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정부지로 솟는 레트로 PC 가격들, 286-486 가격이 '4080보다 비싸네'
노량진에 사는 77년생 정유석 씨는 최근 게임 커뮤니티를 찾았다가 깜짝 놀랐다. 옛날에 자신이 사용했던 레트로 PC에 대한 추억이 떠올라서 온라인 카페에 가입했는데, 레트로 PC 가격이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었다.
대우에서 출시된 XT 컴퓨터인 '아이큐 슈퍼'와 모니터, 키보드 세트의 커뮤니티 중고 거래가가 무려 140만 원에 육박하는 걸 본 정 씨는 '레트로 PC 가격이 금값'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오래 방치되고 부서지고.. 사라진 레트로 PC들
한국은 이사가 잦은 편이어서 타 국가에 비해 옛날 물건이 잘 보관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특히나 오래된 TV나 게임기, 컴퓨터 등 후속 제품이 끊임없이 나오는 전자 제품들은 보전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게 버려진 수많은 전자 제품들은 고물상에서 박살 난 후 거대한 고철덩이에 합류된다. 전선은 잘라서 구리선 뭉치로 이동하고, 플라스틱 케이스는 박살내서 가루가 되고, 기판은 녹여서 금이나 쓸만한 금속이 추출된다.
실제로 레트로 PC를 주로 취급했다는 김포의 한 고물 수거상에 문의해 보니 2000년대에는 하루에 100여 대씩, 2010년까지만 해도 하루에 10대 정도는 레트로 PC들을 수거해 고철 처리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다만 지금은 거의 나오지 않고, 어쩌다 한 두대 레트로 PC가 들어온다고 한다.
실제로 레트로 PC를 구하려고 수소문해 보니 업자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쩌다 온전한 제품들이 들어와서 부수지 않아도 대부분 부품을 활용하기 위해 동남아 등지로 수출됐다고 한다. 일부 부품이 자동차 부품 등으로 호환되기 때문이라고.
또 레트로 PC 커뮤니티에서 수소문해 보니 집에서 온전히 보관한 경우에도 정상 작동하는 기기를 찾는 건 힘들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내부에 건전지 등의 배터리가 장착되었던 경우는 거기서 나오는 누액이 기판을 손상시켜 고장을 일으키기 때문. 기판 패턴이 다 부식되어 수리하기가 쉽지 않단다.
이처럼 XT, 286 등 출시된 지 30년이 된 레트로 PC들의 경우 지금은 일부 마니아들이 정비하고 보관한 것이 전부일 정도로 귀해진 상황이다.
옛날 추억에 돌아본 사람들, 가격 보고 '화들짝'
문제는 뒤늦게 옛날 생각이 나서 레트로 PC를 찾는 사람들이다. 실제로 레트로 PC 관련 카페에 가 보면 '어릴 적에 쓰던 삼성 알라딘 286을 찾습니다', '삼보 트라이젬 본체에 허큘리스 모니터까지 구합니다' 등의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가볍게 추억으로 접근했다가는 큰코다치기 일쑤다. 일단 모니터, 본체, 키보드를 자신이 원하는 세트로 맞출 수 있는 경우가 많지 않다. 셋다 귀하기 때문에 매물 자체가 잘 없고, 운 좋게 세트로 나오는 경우 굉장히 비싸다.
결국 발품을 팔아야 하는데, 멀쩡하고 변색이 적으며 상처도 적은 '소장용' 제품을 찾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다. 1~2년 정도 각 레트로 PC 카페에서 꾸준히 활동하고, 자신이 구하고 싶은 물품을 키워드로 등록해서 알람을 받아야 한다. 또 정상 작동하는지 체크해서 하나씩 시간을 들여 마련하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하나씩 레트로 PC 세트를 구하더라도 문제는 또 있다. 바로 세팅이다. 지금의 윈도우를 생각했다간 큰일 난다. 도스 시절 메모리부터 배치 파일까지 세팅도 쉽지 않고, 모니터와 그래픽 카드가 2열 9핀이냐 3열 15핀이냐에 따라 케이블도 만들어야 한다. 하드 드라이브도 IDE TO CF 등으로 대체하고, M 등 각종 프로그램도 수소문해서 찾아야 하는 등 세심한 준비가 필요하다.
이렇게 허들이 워낙 높다 보니 레트로 PC 가격도 덩달아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다. 상대적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삼성 486 같은 경우 본체만 구한다면 20~30선에 구할 수도 있지만, 마음에 딱 드는 외관에 모니터, 본체, 키보드 맞춤형 세트에 각종 프로그램 세팅까지 완벽하게 된 경우 XT, 286급의 귀한 브랜드 모델은 가격이 150만 원에 육박한다.
100여 대의 레트로 PC를 모았다는 한 마니아는 "사실 레트로 PC는 할 수 있는 것이 한정되어 있다. 5.25인치 드라이브를 쓰거나, 그린 화면으로 옛날 감성을 느끼는 것이 전부다. 특유의 부팅 소리에 투박한 옛 애드립 음원을 듣는 게 다지만, 그런 소리를 듣고 싶어서 뒤늦게 찾아오는 분들이 많다."라고 설명했다.
한편, 전문가들은 최신 그래픽카드인 GTX 4080보다 비싼 '추억의 장난감'을 구입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라며, 큰 각오가 없는 분들은 적당히 에뮬레이션이나 유튜브를 통해 추억 갈증을 해소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