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인물열전 ( 아 )
삼국지 인물열전
[가][나 ~ 다][라 ~ 마][바][사][아][자][차 ~ 하]
▲ 삼국지의 등장인물(아)
|

< 악 진>
|
악진(樂進)
위의 장수. 양평 위국 사람으로 자는 문겸(文謙).
조조가 진류에서 의병을 일으켰을때 맨 먼저 참여하였다. 적벽대전후 오와 대결하게 되자 대장으로 출전하여 단기로 손권에게 달려들어 송겸,
가화가 가로막는 창을 단칼에 베어 떨구고 덤벼 용맹을 떨쳤다. 몸집은 작았으나 담력이 있었다.
---|---

< 안 량>
|
안량(顔良)?-200년
원소의 장수.
동료인 문추와 함께 원소의 부하로 있으며 군의 지위를 번갈아가며 맡았다. 당시 원소의 군사력은 조조를 능가하는 것으로 하북 중앙 최대의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대군단을 지휘했던 인물이니 만큼 그 당시 큰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조조의 부하로서 명사(名士)로 평가가 높았던 공융은 안량과 문추의 용맹함을 보고 "용맹함이 삼군(三軍)과 비길 만하다" 고 극찬을 하였을
만큼 그 실력은 천하를 진동시킬만 하였다. 사실 원소의 하북평정때에 무수한 공을 세웠다. 한복의 부하인 용장 경무를 단칼에 쓰러뜨리는 등
안량을 당해낼 적이 없는 듯하였다. 원소의 군사(軍士)인 저수로부터 "성격적으로 너무 편협한 면이 있다" 고 지적당했지만 지휘관으로서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어쨌든 원소의 부하로 전쟁에서 용맹을 떨쳤다고 말할 수 있다. 최후의 일전이 된 관도의 전투에서 조조측의 송헌과 위속을 단칼에 물리친다.
안량 혼자만의 활약에도 조조군의 사기가 떨어지자 곤란해진 조조는 진영내에 머무르고 있던 관우에게 안량을 물리쳐 달라고 부탁한다. 아무리
뛰어난 안량도 관우의 일격에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

< 양 표>
|
양표(楊彪) 142-225년
양수의 아버지. 자는 문선(文先). 화음 사람.
유명한 학자로서 '관서의 공자'라 불리던 양진의 증손이다. 사도 벼슬에 있으면서 동탁의 천도에 혼자 반대하다 파면당했다. 또 조조의 미움을
받아 살해당할 뻔했으나 공융의 항의로 목숨을 건진 일도 있었다. 후에 한황실이 종말에 가까왔다는 것을 알고 발병을 핑계로 은퇴했다.
---|---

< 여 몽>
|
여몽(呂蒙) 178-219년
오나라의 명장. 자는 자명(子明). 부피 사람.
15,6세 때부터 종군하여 정보 등과 함께 오나라의 중진이 되었으나, 언젠가 손권에게 학문에 대한 설명을 듣고 발분하여, 유학자도 따르지
못할 학식을 지니게 되었다. 강적 관우와 형주에서 대결했을 때는 젊은 육손을 앞세워 상대를 방심하게 하고 그 틈에 후방을 급습하여 관우를
고립 무원의 상태에 빠뜨렸다. 인간의 심리를 역이용한 이 작전은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

< 여 포>
|
여포(如布)?-198년
후한말의 무장. 구원 사람으로 자는 봉선(奉先).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여 병주자사 정원을 따라 낙양으로 가서 동탁과 싸우다가 마침내 정원을 죽이고 동탁에게로 귀순, 그의 심북이 되어
장안으로 갔다. 그러나 얼마 후, 동탁에게 소외당하였기 때문에 사도 왕윤과 결탁하여 192년에 동탁을 살해했다. 동탁의 부장 이각에게 공격을
당하고 장안을 빠져나와 남양의 원술에게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원소에게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원소가 죽이려 하자 이번에는 진류의 장막에게로
도피, 원주목으로 임명되어 조조와 싸웠지만 패하여 유비에게로 도피하였다. 그는 한숨을 돌린 후 원술을 공격, 하비를 점령하고 스스로
서주자사라 칭하고, 곧이어 원술과 결탁하여 하비에서 유비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조조가 유비를 도와 여포를 공격하여 마침내 붙잡혀 살해당하고
말았다.
---|---

< 우 금>
|
우금(于禁)?-222년
위나라의 명장. 자는 문측(文側). 거평 사람.
원소와의 싸움에 맹위를 떨쳐 호위장군에 임명되었다. 219년, 번성에서 관우의 군대와 싸우다 홍수를 만나 투항했다. 그 후 손권이 관우를
무찔렀을 때 구출되어 위나라에 귀환했으나, 조조의 무덤에 자기가 투항하는 그림이 그려진 것을 보고 굴욕감 끝에 병을 얻어 죽었다.
---|---

< 유 비>
|
유비(劉備) 161-223년
촉한의 초대 황제. 자는 현덕(玄德). 전한 경제의 황자 중산정왕의 후손.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신발과 돗자리를 팔아 생계를 잇는 어려운 환경이었으나, 15세 때 노식에게 사사하여 동문 공손찬과 교의를 맺고 호혐들과
교유하는 한편 관우, 장비와 의형제를 맺었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도당을 모아 그 토벌에 참가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그 후 공손찬에게
의탁하여 원소와의 대전에서 공을 세웠다. 196년, 원술로부터의 공격을 물리치고 진동장군 의성정후에 임명되어 조조에게 의탁하고 있었으나,
조조 살해 계획에 참가했다가 이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자 하비로 탈주하였다. 원소, 조조의 관도대전에서는 원소와 동맹하고, 이에 패하자 형주목
유표에게로 갔다. 이 무렵, 삼고지례로 제갈량을 맞아들여 그의 계략으로 형주에서 기반을 구축하던 중, 유표가 죽고 그의 아들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하자 조조가 대군을 거느리고 형주를 공격해 왔다. 유비는 손권과 동맹하여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대파하고 형주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형주의
영유 문제를 놓고 손권과 대립하여 명장 관우가 죽고 형주는 손권이 영유하게 되었다. 유비는 이 사이 한중을 공격하여 한중왕이 되었으며,
220년 조비가 한헌제의 양위로 위의 황제가 되자, 221년 유비도 제위에 올라 한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국호를 한이라 하니, 이른바
삼국의 촉한이다. 다음해 형주의 탈환과 관우의 복수를 위해 오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이릉의 싸움에서 대패하여 백제성에서 후하를 제갈량에게
위탁하고 병사하였다.
---|---

< 유 선>
|
유선(劉禪) 207-271년
촉의 2대 황제. 자는 공사(公嗣). 유비의 아들. 재위 223-263년. 감황후 태생.
무능한 인물로서, 제갈량에 이어 장완, 비위가 보좌하고 있는 동안은 나라가 평안했으나, 그들이 잇달아 죽은 뒤 유선은 환관 황호를 신임하여
국정의 부패를 초래했다. 이어서 위나라의 침임을 받아 성도가 함락됨으로써 3국 정립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위나라는 유선을 안락현공에
봉했는데 그는 이것을 만족해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조소를 받았다 한다. 그 후 중국에서는 그의 아명인 '아두'가 무능한
사람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되었다.
---|---

< 유 장>
|
유장(劉璋)?-219년
후한말의 군웅의 한 사람. 자는 계옥(季玉). 경릉 사람.아버지 유언의 뒤를 이어 익주의 목이되었다. 그는 조조가 원정군을 이끌고 온다는
말을 듣자 동요한 나머지 법정, 장송 등 친유비파의 진언을 들어 유비를 촉에 맞아들였다. 촉에 들어온 유비는 한중 방위에 나서는 체 하면서
군사를 동원하여 유장이 있는 성도로 향했다. 전장병은 결상 항전할 태세를 취했으나, 유장은 백성의 고통을 생각하여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고
한다. 그 후 손권이 형주를 탈취한 뒤 유장은 그에 의해 익주목에 임명되었다.
---|---

< 유 표>
|
유표(劉表) 142-208년
전한 경제의 아들. 자는 경승(景升). 고평 사람.
어려서부터 유학자로 알려졌으며, 당고 사건때는 몸을 피하여 위기를 면했다. 그 후 하진의 속관이 되었다가 형주자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형주에는 군소 호족들이 할거하고 회남의 원술도 이곳 진출을 꾀하고 있었다. 무력을 갖지 못한 유표는 그 지방 출신 호족으로 학자로서의 명망도
높던 채모 등과 손을 잡고 그들의 협력을 얻어 군소 호족들을 평정하는 동시에 192년에는 원술의 선봉장으로 침공한 손견을 무찔러 반석 같은
기반을 닦았다. 무장군 10만의 수비를 받는 형주는 중원의 전란에도 별로 영향을 받지 않고 잠정적인 안정을 누릴 수 있었으므로 이름난
유학자들이 난을 피해 모여 왔다. 유표는 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경전의 교정 작업 등을 하게 했다. 그러나 조조, 원소의 관도 싸움 때
캐스팅 보우트를 쥐고 있으면서도 우유 부단한 성격으로 망설이고만 있었으므로 천하 웅비의 기회를 놓쳤다. 유비가 조조에게 쫓겨 기탁해 왔을
때도 쾌히 받아들였으나, 내심으로는 경계하여 중용하려 하지 않았다. 그가 죽은 후 형주는 조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

< 육 손>
|
육손(陸遜) 183-245년
오나라의 공신. 자는 백언(伯言). 오 사람.
그는 일족을 이끌고 손권의 휘하에 들어가 회계산과 파양호에 근거하던 도적을 무찔러 명성을 얻었다. 219년에는 여몽을 대신하여 형주에 주둔,
탁월한 전략으로 관우를 무찔러 형주를 오나라의 영유로 삼았다. 그 공으로 진서장군이 되고 누후에 봉해졌다. 촉나라의 유비는 관우가 죽고
형주를 빼앗긴 일로 손권에게 원한을 품고 221년에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진격해 왔다. 이때 육손은 방위군 총사령관으로서 이릉에서 맞아
싸웠다. 이것이 유명한 '이릉의 싸움'으로서 그 결과 육손이 대승했다. 그 후 육손은 보국장군 형주목으로 승진하고 강릉후가 되었다. 그
뒤에도 계속 형주에 남아 위, 촉의 동향을 살피며 손권에 대해 자주 헌책했다. 손권 역시 내정, 외교면에서 중대한 일이 생기면 반드시 그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리하여 244년, 형주에 주재한 채로 정승에 임명되는 등 오의 중신으로 군림했다. 이에 앞서 손권은 왕부인 사이에서 난
손화를 태자로 삼았으나, 한편으로는 그 동생 손패를 사랑하여 노왕으로 봉하고 태자와 같이 대우하고 있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태자파와
노왕파가 대두되어 서로 다툼을 벌였다. 형주에서 이 소문을 들은 육손은 상서를 올려 태자에게 더 비중을 두도록 요구했다. 이에 겁을 먹은
노왕파는 21개군에 달하는 육손의 죄상을 들어 손권에게 제출했다. 이에 손권이 일부러 형주에가지 문책의 사신을 보내자 육손은 분노 끝에 죽고
말았다. 나중에야 손권도 그 무죄를 알고 후회했다.
---|---

< 왕 윤>
|
왕윤(王允)
후한의 중신.
항시 조정일을 근심하던 중 자기집 가기 초선의 충성에 감격, 그의 몸을 희생시켜 연환계로 동탁과 여포의 사이를 갈라 결국 동탁을 죽이는데
성공하고 장안의 봄을 맞이 하였으나 결국 자신도 멸족을 당하였다.
---|---

< 왕 평>
|
왕평(王平)
촉한의 장수. 파서 암거 사람으로 자는 자균(子均).
조조밑에서 아문장군으로 있었는데, 한중지방의 지리에 밝아 서황을 도와 부선봉이 되어 유비의 군대와 맞섰다. 서황이 배수진을 쳤다가 패하고
죄를 뒤집어씌우려 하므로 조운에게 투항하였다. 제갈량의 남만 정벌에도 부장으로 출전하였고 성격이 신중하였으므로 제갈량은 제1차로 기산에
출병하였을 때 마속을 도와서 나가게 하였는데, 마속은 그의 충고를 듣지 않다가 가정에서 패하고 말았다. 얼굴도 못생겼고, 또 글을 몰랐다고
하며, 그런때문에 모든 문서를 입으로 불러서 작성했지만 사리가 분명했다 한다.
---|---

< 원 소>
|
원소(袁紹)?-202년
후한말의 군웅의 한 사람. 자는 본초(本初).
여남 출신으로 4대에 걸쳐 삼공의 지위에 있었던 명문 귀족이었다. 영제가 죽자 대장군 하진의 명을 받아 조조와 함께 강력한 군대를 편성하고
동탁을 초대하여 당시 정치적 부패의 요인이었던 환관들을 일소하려 하였으나, 사전에 계획이 누설되어 하진이 살해당했다. 이 계획이 실패하자
독자적으로 환관 2천여명을 살해하였으며, 동탁은 먼저 수도 낙양에 들어가 황제를 옹립하였다. 그는 하북에서 동탁 토벌군을 일으켜 그 맹주가
되어 동탁을 공격, 장안까지 패주시키는 데 성공하고 하북을 중심으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한편 조조는 처음에는 원소와 제휴하였으나, 그
후 허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들 두 사람은 화북의 세력을 양분하고 상호 견제하던 중, 200년에 관도에서 대결전을 벌인 결과
원소는 대패하고 분사했다. 또한, 그의 뒤를 이은 원담은 동생 원상과 반목이 극심한 가운데 조조에게 모두 살해당하였다.
---|---

< 원 술>
|
원술(袁術)?-199년
원소의 사촌 동생. 일설에는 친동생이라고도 한다. 자는 공로(公路). 여양 사람.
황건적 토벌로 공을 세워 대장군 하진의 신임을 얻었다. 하진이 환관에게 살해되자 원소와 함께 환관 대학살을 감행했다. 그 후 동탁에 의해
후장군에 임명되었으나 탈출하여 남양군에 근거했다. 마침 북상해 온 손견을 황제에게 상주하여 파로장군에 임명케 하여 손견이 낙양을 함락시키자,
동탁은 장안으로 도주했다. 원래 원술은 원씨 일가에 의한 제위 찬탈을 뜻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소가 황족인 유우를 제위에 올리려 하자 양자는
대립하게 되었다. 원술은 원소측에 가담한 조조에게 꾀하여 양주에 들어가서, 197년 드디어 수춘을 수도로 하여 즉위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사치와 음탕에 사로잡혀 있던 그는 근본적으로 통치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마침내 원소와 조조에게 잇달아 패배하고, 원소에게 제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그 도중에 병을 얻어 피를 토하고 죽었다.
---|---

< 위 연>
|
위연(魏延)?-234년
유비의 용장. 자는 문장(文長).
<삼국지연의>의 작자인 나관중은 위연의 얼굴을 잘 익은 대추와 같고, 눈은 낭성(朗星:밝은별)과 같은 인물이며, 후두부에 반골(反骨)이
돌출되어 있어 반역자의 관상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또한 손권의 입을 빌어 '용기는 충분하지만 심근이 바르지 않다. 공명이 죽은 후에는 반드시
화근이 될 것이다'라고 표현되어지는 인물이다.
위연은 유비를 따라 촉에 들어가 장비를 제치고 한중군태수에 임명되었다. 제갈량의 북정 때는 장안 급습(자오곡 계책)을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제갈량이 죽은 뒤 부장관인 양의와 다투던 중 마대에게 살해당했다.
현대에 와서도 위연의 죽음이 억울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

< 이 엄>
|
이엄(李嚴)?-234년
촉한의 장수. 자는 정방(正方). 남양 사람.
원래 유장 휘하에 있었으나 유비의 촉 입성때 그에게 전향했다. 그 후 촉에서 요직을 역임했고, 유비가 죽음에 임하여 후사를 제갈량과 함께
당부할 정도로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제갈량이 4번째 위 정벌에 나섰을 때, 군량 보급의 임무를 소홀히 하여 제갈량에게 책임 추궁을 받고
평민으로 강등되어 유배를 갔다. 3년 후, 제갈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에 걸려 자신도 죽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