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선물세트’ 같은 레이싱 게임, 그란투리스모 5
레이싱 게임 팬들이라면 누구나 학수고대 했을 게임, 그란투리스모5(이하 그란 5)가 지난 11월 24일 출시됐다. 매 시리즈마다 당대 최고의 그래픽과 현실성을 바탕으로 레이싱 게임에 새로운 개념을 확립한 게임의 최신작을 두고 게이머들은 출시 이전부터 대단한 기대를 보여온 바 있다.
5년여의 긴 개발 기간을 거쳐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낸 그란5. 사실 이 게임은 '드라이빙 시뮬레이션'이라는 말을 내세울 정도로 높은 현실성을 구현하고 있는 게임이기 때문에 그 접근성이 상당히 높은 게임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그런 게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란 5에 쏟아지는 세간의 관심은 마치 '그런 것은 상관 없으니 일단 그란5를 내 손에 쥐어주고 이야기합시다' 수준이다. 소위 말하는 극사실주의 노선을 걷고 있는 게임들이 그 완성도를 떠나 대중적으로 너른 관심과 인기를 얻지는 못 한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 시리즈가 그간 출시되면서 쌓아온 네임밸류도 그 이유로 꼽을 수 있을 것이며, 게임에는 문외한인 사람들의 눈길마저 사로잡을 수 있는 빼어난 그래픽도 그 이유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이유들보다 더 큰 이유는 바로 그란 5가 레이싱 게임답게 잘 만들어졌고, 무엇보다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란5가 갖추고 있는 콘텐츠는 대단히 풍부하다. 800여 종의 스탠다드 차량과 차량의 외관은 물론 휠, 좌석, 계기판 등의 내부구조까지 완벽하게 재현한 200여 종의 프리미엄 차량이 준비되어 있다. 차량의 종류 역시 세단, 포뮬러 머신 위주였던 기존의 게임들과는 달리 버스, 카트 등의 차량들이 준비되어 있어 게이머들의 선택의 폭을 넓히고 있다.
각 차량의 특성 또한 거의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다. 그란 시리즈로 연습을 해서 실제 프로 레이서로 데뷔한 사례가 있을 정도로 높은 사실성을 추구하는 게임의 최신작답게 이번 작품에서도 1000여 종에 달하는 차량들의 실제 주행 데이터를 기반으로 가속, 코너링, 접지력 등을 구현해 각기 다른 느낌으로 레이스를 즐길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실제 프로 레이서들이 그란 5를 즐겨본 이후에 '실제 레이스와 거의 흡사한 느낌으로 달릴 수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라는 소감을 남긴 것만 보더라도 이 게임이 차량의 특징을 얼마나 잘 살리고 있는 지를 알 수 있다.
게임에 등장하는 트랙 역시 매우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다. 실존하는 레이싱 서킷은 물론, 유명 도시의 시내를 달려 볼 수도 있으며 사막이나 폭설 지역에서 오프로드 레이싱을 즐길 수도 있다. 각각의 모드 하나하나가 일반적인 레이싱 게임 하나 정도의 완성도와 볼륨을 지니고 있다. 그야말로 레이싱 게임의 종합선물세트라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게임에 등장하는 차량과 코스의 종류만 풍부한 것이 아니라 게이머가 직접 즐길 수 있는 콘텐츠도 상당히 풍부하게 준비되어 있다. 그란 5를 '종합선물세트'에 비유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코스를 선택해서 인공지능 차량과 기록을 경쟁하거나 혼자 연습을 할 수 있는 레이싱 게임의 기본적인 콘텐츠는 물론, 한 명의 레이서가 되어 차량을 구입하고 차례차례 명성을 쌓아 일류 레이서가 되어가는 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A스펙(A-Spec) 모드와 중고차마저 거래할 수 있는 딜러모드, 튜닝 모드 등 과거부터 쭉 이어져 온 전통적인 콘텐츠는 이번에도 건재하다.
기존의 모드 이외에 새롭게 추가되거나 개선된 모드도 게임의 몰입도를 높여준다. 강제적으로 진행하도록 강요하다시피 했던 라이선스 모드는 게이머들이 취향에 따라 즐길 수 있도록 선택의 폭이 생겨났다. 또한 코너의 수, 도로 상태, 주변 환경을 정해 간단하면서도 높은 품질의 코스를 제작할 수 있는 코스 생성 모드와 도로 곳곳에 차를 세워두고 다양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 모드도 충실하게 만들어져 있다. 레이싱에 자질이 없는 게이머더라도, 이 모드만 즐기더라도 충분히 게임을 만끽할 수 있을 정도의 볼륨이다.
운전자가 아닌 레이싱 팀의 감독이 되어 전략적으로 레이스를 운용할 수 있는 B스펙(B-Spec) 모드도 주행에 자신이 없는 게이머들을 위한 콘텐츠라 할 수 있다. 이 모드를 통해 게이머는 시합 중인 드라이버에게 코스의 상황을 파악해서 전달하고, 좀 더 공격적이거나 방어적인 레이스를 주문할 수 있다.
또한 게이머의 지시에 따르는 드라이버의 성향에 따라 레이스 운영이 아예 달라질 수 있는 요소가 구현되어 있어, 최근 유행하고 있는 스포츠 운영 시뮬레이션 게임의 재미도 찾을 수 있는 것이 이번 작품의 특징이라 하겠다.
온라인 모드의 경우는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빼어난 그래픽을 유지하면서도 딜레이나 끊긴 현상 없이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지원하는 멀티플레이 환경은 잘 구축되어 있지만, 친구를 초대하거나 편리하게 레이스를 즐길 수 있는 로비 시스템은 제대로 만들어져 있지 않아서 정작 레이스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전반적으로 온라인 멀티플레이라는 환경에 익숙하지 않은 일본의 제작사들이 종종 보이는 모습이긴 하지만, '장인집단'이라는 별명이 붙은 폴리포니가 이런 면을 놓쳤다는 것은 아쉬움을 남긴다.
아쉬움이 남는 부분은 온라인 모드의 인터페이스 이외에도 게임의 그래픽과 이번 작품의 독특한 '언락 시스템'에서도 찾을 수 있다.
다른 게임도 아닌 그래픽으로 유명한 그란 시리즈에서 그래픽에 대한 아쉬움이 생겼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 게이머들이 있을 지 모르겠지만, 이번 작품이 출시된 이후 게이머들로부터 가장 많은 불만이 나오는 것이 바로 그래픽 요소에 있다.
물론, 이번 작품의 그래픽은 매우 뛰어나다. 1080p의 해상도로 대부분의 상황에서 60프레임의 부드러운 움직임을 구현하고 있으며, 앞서 언급한대로 프리미엄 차량의 재현도는 상상을 뛰어넘는다. 게임 플레이에 집중하지 않고 그래픽에 흠을 잡기 위해서 화면을 관찰하는 게이머들도 그다지 흠 잡을 곳이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게임 진행 중에 실시간으로 비가 오거나 해가 뜨고 지는 등의 환경 변화를 구현한 이번 작품 '날씨 변화' 요소에서 보여지는 게임 그래픽은 게임에 문외한인 이들이 봐도 아쉬움을 남긴다. 비가 오거나, 오프로드 레이스 중에 먼지가 일어나는 구간에서는 도트가 튀는 '깍두기 현상'이 발생하며, 운전석 시점에서 보여지는 그림자 표현은 기존의 그란 시리즈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임이 전반적으로 고해상도 그래픽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더욱 도드라지는 셈이다. 물론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란 5의 그래픽은 역대 최고 수준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5년이라는 시간 동안 게이머들이 쌓아온 게임 그래픽에 대한 기대감, 시리즈가 출시될 때마다 게이머들을 경악하게 했던 그란 시리즈의 경력이 그란 5의 그래픽이 주는 아쉬움을 더욱 크게 만들고 있다. 다른 작품도 아닌 그란 5이기 때문에 생기는 아쉬움이라 할 수 있다.
출시 이후 뜨거운 감자가 되어버린 '언락 시스템'도 조금은 납득하기 어려운 요소이다. 게이머가 게임을 즐기고 레벨이 오를수록 A.I. 차량이 더욱 기민하게 움직이고, 충돌에 따라 발생하는 차량 파손 연출이 더욱 사실적으로 표현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레벨이 오르지 않으면 이런 점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에 있다. 레벨이 오르지 않은 상황에서는 인공지능 차량들은 상대 차량을 피하지 못하고 그저 직진할 뿐이며, 차량끼리 아무리 충돌하더라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차량은 전혀 파손되지 않는다.
폴리포니가 게임의 출시 전에 언급한 그란 5의 특징이 차량 파손 연출과 발전한 인공지능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런 류의 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게이머들은 이렇게 발전한 게임의 콘텐츠를 확인할 수 없도록 만드는 레벨제한 시스템을 채택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란 5는 게이머가 게임을 즐길수록 진화하는 최고의 레이싱 게임이라 할 수 있다.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게임의 그래픽은 최고 수준이며, 풍부한 싱글 콘텐츠, 전작을 뛰어넘는 사실성은 이 게임을 기다려온 5년의 시간을 충분히 보상해 주고도 남는다.
다소 아쉬운 점을 남기고 논란의 여지를 남긴 작품이긴 하지만, 그란 5를 기다려온 게이머들이라면, 레이싱 게임의 팬이라면 주저말고 그란 5를 즐겨보자. 당신이 기다려온 5년의 시간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