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은 문화다]⑧현대 사회의 축소판 온라인 게임
1962년 흑백 모니터에서 작동하는 최초의 게임 '스페이스워'가 등장했다. 점으로 이뤄진 두개의 우주선이 미사일을 발사하는 식으로 진행되는 이 단순한 프로그램이 훗날 전세계 수억명이 즐기는 콘텐츠로 발전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 후 게임은 그래픽, 스토리, 연출 등의 다양한 부분에서 발전하여 액션, RPG, 슈팅 등 여러 장르의 게임이 등장했으며, 컴퓨터의 혁명이라고 불리는 인터넷이 등장한 후 여러 사람이 하나의 게임을 동시에 즐기는 온라인 게임이 등장 했다.
온라인 게임은 컴퓨터와 인터넷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접속 할 수 있다는 점과 혼자서 즐기는 것이 아닌 여럿이서 게임을 즐긴다는 특징 때문에 많은 인기를 누렸다. 게임 시스템 역시 패키지 게임을 모방하는 것을 벗어나 길드, 퀘스트, 파티 시스템 등 다양한 요소를 추가함으로서 온라인게임은 게임이라는 콘텐츠를 대표하는 장르로 자리 잡았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다 보니, 온라인게임이라는 공간에서는 실제 생활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이 비슷한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익명성이 보장되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온라인게임은 게이머의 취향에 맞는 사람들이 모여 단체(길드)를 생성하고 게이머들 간의 부족한 자원(아이템)을 사고파는 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등의 현실 세계와 유사한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온라인게임에서 비슷하게 일어나기 시작하자 게임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판단하는 유용한 자료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블리자드의 온라인 게임 '월드오브와우래프트'(이하 '와우')에서 벌어진 이른바 '오염된 피' 사건이 바로 그 예다.
'와우'에서 등장하는 보스 몬스터 중 하나인 '혈신 학카르'는 '오염된 피' 라는 일종의 저주 기술을 사용했는데 이 기술은 실제 전염병처럼 한 명의 감염자가 주변의 사람에게 피해를 전염시키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오염된 피'는 '혈신 학카르'를 물리치고 해당 지역을 벗어나면 사라지게 되어있는 기술이었기에 던전 밖의 사람들에게는 전염이 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 기술에 중독된 펫을 지니고 있던 한 게이머가 와우의 대도시 오그리마에 펫을 꺼내 놓으면서 문제가 생겼다. 펫으로 인해 '오염된 피'가 마치 전염병처럼 도시 내의 사람들에게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오염된 피'에 중독된 게이머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자신이 중독되었으니 가까이 오지 말라는 사람, 홀로 외딴 곳에 앉아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 고의로 자신의 저주를 옮기려는 사람, 사람들을 속여 거짓 치료제를 파는 사람 등 마치 실제 사회를 보는 것처럼 다양한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게임 내 사건을 넘어 심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들과 의학계에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 사례를 통해 심리학자들은 전염병이나 기타 유해한 질병에 걸렸을 때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을 다른 시뮬레이션이나 실험 없이 분석할 수 있었으며, 의학계에서는 전염병이 퍼지는 경로나 사람들이 어떻게 전염병에 대처하는지 모습을 지켜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사례를 남긴 '와우'의 '오염된 피' 사건은 뉴스와 의학저널, 인터넷 포럼에서 '전염병의 실제적인 확산경로의 예', '가상세계 전염병의 발발' 등의 이름으로 소개됐다. 또한 실제로 이를 바탕으로 논문에 사용되기도 하는 등 다양한 매체에 인용되며 게임에서 일어난 사건이 현실을 판가름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는 전례를 남기기도 했다.
'오염된 피' 사건처럼 사람들의 현실적인 움직임이 게임 내에 투영된 또 다른 사례로는 엔씨소프트의 MMORPG '리니지2'에서 벌어진 이른바 '바츠 해방전쟁'을 꼽을 수 있다.
'리니지2'의 서버 중 가장 역사가 오래된 바츠 서버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권력을 장악한 혈맹(길드)에 맞서 중소 혈맹과 강력한 혈맹에 억눌려 있던 게이머들이 충돌한 소수의 강자와 다수의 약자의 대결로 평가 받는 사건이다.
'바츠 해방전쟁'은 바츠 서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졌던 DK혈맹이 다른 강력한 혈맹과 힘을 합쳐 리니지2의 주요 성을 차지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펼진 것에서 비롯되었다.
DK혈맹은 단순히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펼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정책을 따르지 않고 사냥터를 출입한 중소 혈맹들에게 혈맹을 해체 시킬 정도의 탄압을 가했다. 이에 곳곳에서 DK혈맹에 저항하는 전투가 시작되었고 이는 이른바 '바츠 해방전쟁'의 시발점이 됐다.
전쟁 초반에는 DK혈맹을 위시한 압도적인 힘을 가진 혈맹들이 유리했다. 이에 DK혈맹에 저항하는 게이머들은 바츠 서버 게시판 곳곳에 '바츠 해방전쟁' 참전을 호소하는 문건이 등록 했다. 이를 계기로 이들의 대립은 DK혈맹과 대다수의 게이머들이 참가한 혁명군의 격돌로 전환됐다.
결국 '바츠 해방 전쟁'은 혁명군이 DK길드를 몰아내고 '리니지2'의 최대 성인 아덴성을 점령하고 세금 전면 감면, 사냥터 자유 출입을 공표하며 끝을 맺었다. 이른바 바츠 해방의 날을 선포된 것이다.
'바츠 해방 전쟁'은 국내의 일간지, 신문 등에서 소개될 만큼의 화제가 되었으며, 게임을 단순히 오락으로 보던 사람들의 시각을 조금이나마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됐다. 또한 사람들은 '바츠 해방 전쟁'이 진행된 모습이 강력한 소수와 힘없는 다수가 대결한 현대 시대에 벌어졌던 민주화 운동이 전개되었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또한, 게임내의 이권이나 권력을 위해 게이머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정치적인 움직임을 보였다는 점, 자발적으로 게이머들이 모여 단체 행동을 보였다는 점 등을 보았을 때 온라인 게임이 컴퓨터 안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닌 현실과 매우 흡사한 보습을 보인다는 점을 부각시킨 중요한 사례로 꼽히고 있다.
이처럼 온라인 게임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현실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을 예측할 수 있는 유용한 자료로서도 사용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런 사례는 온라인 게임의 역사가 계속될수록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위의 사례처럼 온라인 게임은 현실을 투영하고 다양한 게이머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복합적인 콘텐츠로 발전했다. 하지만 온라인게임에 대한 기성세대의 인식은 컴퓨터 앞에서 시간을 죽이며 게임의 폭력에 물들어 가는 유해 콘텐츠에서 머물러 있다.
온라인 게임은 이미 단순한 오락이라고 하기 보다는 경제, 정치,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부분에서 현실을 비춰볼 수 있는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게임에 대한 악의적인 비난과 규제보다는 온라인 게임의 순기능과 가능성, 학술적인 측면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