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가 부족한 HD 리마스터, 진 삼국무쌍 멀티 레이드 2
HD 리마스터. 그것은 게임 시장에 들이닥친 레트로 열풍 속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온고지신의 결정체이자 우려먹기의 변종 취급을 받는 양날의 검. 이 정반대 평가 속에서 HD 리마스터가 계속 등장하는 건 찬란했던 과거의 영광이 그리운 옛 게이머들과 과거의 명작을 현대의 기술력으로 즐기고 싶은 새 게이머들의 다른 뜻, 같은 바람 덕분일 것이다. 그 사이에 검증 받은 전작으로 제작비 절감을 노리는 제작사의 노림수도 섞였고. 이 와중에 HD 리마스터로 발매한 갓 오브 워 컬렉션이 전 세계적으로 200만장 이상 팔리는 대성공을 거두면서 각 개발사들은 본격적인 HD 리마스터 경쟁에 참여했다. 특히 PS3는 초기 모델을 제외하고 PS2 하위 호환 기능을 없앴기에 명작 PS2용 게임을 대상으로 한 HD 리마스터 게임들은 격렬한 찬반논란 속에서도 준수한 판매량을 보였다.
이렇게 명작 PS2용 게임들이 HD 리마스터로 재탄생하는 동안 개발사들은 한때 휴대용 PS2라는 별명을 들은 PSP에게도 눈독을 들였다. PSP도 PS2 세대와 PS3 세대 사이에서 다른 기종 부럽지 않은 명작들을 다수 배출했기에 PS2 만큼이나 HD 리마스터 건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한편 다수의 명작을 배출했으며 그 명작들을 어떻게 재활용해야 하는지 너무나 잘 아는 진 삼국무쌍 시리즈가 HD 리마스터 대열에 합류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결국 이 두 조건이 만나 탄생한 게임이 바로 진 삼국무쌍 멀티 레이드 2 HD Version(이하 멀티2 HD). PSP로 발매한 진 삼국무쌍 멀티 레이드 2(이하 멀티2)의 그래픽을 HD 화면과 3D 화면에 대응하도록 수정하고 PSP로 전달된 DLC와 특전을 전부 수록한 HD 리마스터 게임이다.
멀티2의 전작인 진 삼국무쌍 멀티 레이드(이하 멀티)는 기존 진 삼국무쌍 시리즈에서 다인 협동 플레이를 극대화 한 일종의 외전이다. 혼자서도 일기당천을 이룩하는 진 삼국무쌍 시리즈인 만큼 이 협동 플레이의 상대는 인간을 뛰어 넘은 초차원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 또 균형을 맞추기 위해 진 삼국무쌍 시리즈의 무장들 역시 덩달아 초차원적인 묘사들을 선보였던지라 여러 의미로 게이머들에게 인상을 남겼다. 결국 멀티는 본편에서 나오기 힘든 묘사와 게임성으로 독자적인 입지를 구축하였고 나아가 후속작 멀티2는 추가 무장을 비롯하여 각종 콘텐츠 추가와 시스템 개선을 선보이기에 이른다. 그런데 진 삼국무쌍 멀티 레이드 스페셜이란 이름 하에 PS3와 XBOX360으로 이식하여 PSP와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줬던 멀티와 달리 멀티2는 PSP용으로만 발매해 HD 그래픽을 선보일 기회가 없었다. 이런 배경을 살펴볼 때 진 삼국무쌍 시리즈의 첫 HD 리마스터 작품으로 멀티2 HD가 등장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왜 이러셨습니까
하지만 HD 리마스터 작품으로 대충 선정됐을리 없는 멀티2 HD의 구성은 너무나 무성의하다. HD 리마스터로 그래픽이 달라졌어도 결국은 과거와 같은 게임. 그래서 HD 그래픽 하나 만으로는 게이머들의 지갑을 열기가 어렵다. 그래서 지금까지 발매한 HD 리마스터 게임들은 각자 자기만의 매력 포인트를 내세웠다. 갓 오브 워 콜렉션이나 데빌 메이 크라이 콜렉션처럼 과거 시리즈를 하나로 묶은 사례가 있고 슬라이드 쿠퍼 콜렉션의 무브용 미니게임을 추가나 이코&완다와 거상 HD 리마스터의 제작 영상 및 XMB 테마 추가처럼 오리지날 콘텐츠를 추가한 사례도 있다. 멀티2 HD와 마찬가지로 PSP용 게임을 HD 리마스터 한 갓 오브 워 오리진스 콜렉션은 초당 60 프레임, 3D 입체 기능, 듀얼쇼크3의 진동 기능, 트로피 기능을 추가하여 PSP로 게임을 즐겼던 게이머들조차 새 게임 하듯이 즐기도록 해주었다.
그런데 멀티2 HD는 어떠한가. HD 리마스터로 변한 그래픽을 제외하면 내세울 거라곤 DLC와 특전 수록이 전부다. 2010년에 발매해 이제 2년 지난 게임을 기존 콘텐츠만 보고 시작할 게이머가 몇이나 있을까? 지금까지 멀티2와 견주어도 밀리지 않는 유수의 명작들이 앞서 소개한 것처럼 HD 리마스터와 더불어 자기만의 매력 포인트를 내세워 게이머들에게 어필했는데 멀티2 HD는 무엇을 믿고 안이한 HD 리마스터를 진행했는지 알 도리가 없다. 기기가 바뀌면서 사양이 좋아졌다면 몰라도 사운드는 Linear PCM 2ch라 여전히 스테레오가 고작이고 PSP에 없던 트로피 시스템이 추가된 것도 아니다. 액션 게임에 자주 들어가는 진동 기능조차 없다. PSP로 발매한 멀티2와 다른 거라곤 그래픽 밖에 없단 이야기다. 그리고 HD 리마스터의 핵심인 그래픽은 빈 말로도 좋다 하기가 힘들다. PSP용 게임의 태생적 한계에 의해 아무리 HD 리마스터를 거쳐도 눈에 밟히는 3D 그래픽은 오랫동안 보기 어려울 정도. 동영상에 이르러선 이것이 HD 그래픽인지 스마트폰 그래픽인지 알 도리가 없는 열화 그래픽이 펼쳐져 선명한 글씨들만이 HD 리마스터를 증명해주고 있다. 설상가상 HD를 표방하면서 1280x720 해상도를 다 채우지 못 해 남는 공간을 레터 박스로 때우기까지 했다. 그래픽이 이런데 3D 입체 화면에 대응해봤자 무슨 소용일까. 그래픽을 현세대 수준으로 개선한다는 HD 리마스터이면서 이에 상응하는 결과가 전혀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인지(아니면 이쪽이 더 중요했는지) 멀티2 HD는 PSP용 멀티2와의 연계를 강점으로 내세웠다. 기존 PSP용 멀티2의 세이브 파일을 PS3로 인계하거나 애드혹으로 기존 PSP용 멀티2 게이머와 협동 플레이 할 수 있도록 한 조치들이 대표적. 여기서 멀티2 HD가 멀티2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협동 플레이가 중요한 멀티2에서 게이머 부족으로 협동 플레이가 사장되는 일 만큼 큰 문제도 없기 때문에 기존 멀티2 게이머들까지 협동 플레이의 일원으로 끌어들인 것 자체는 환영할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매력 포인트를 포기하면서까지 PSP에 매달릴 가치가 있었느냐다. 적어도 발매 후 약 1달 동안 매일 애드혹 파티를 드나들면서 협동 플레이 인원을 구한 필자 경험으로는 그만한 가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이미 구세대로 밀려난 2년 전 PSP용 게임을 아직까지 즐길 게이머가 얼마나 있겠는가(아직 왕성한 몬스터 헌터 시리즈가 유별난 것이다). 그나마 만난 협동 플레이 게이머들도 멀티2 HD 게이머들이었다. 전작 멀티는 이식 과정에서 PSP를 포기했음에도 새 게이머들만으로 협동플레이가 순조롭게 이뤄졌다. 이 전례를 참고삼아 멀티2 HD도 새 판을 짜볼 법 했을 텐데 괜히 PSP에 매달리다가 HD 리마스터 게임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기만 했다.
원본불변의 법칙
HD 리마스터 게임으로서 멀티2 HD는 제 구실을 못 하지만 멀티2 자체만 보자면 썩어도 준치요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란 속담이 절로 떠오른다. 일찍이 간단한 조작만으로 여타 게임보다 화끈한 액션으로 명성이 자자한 진 삼국무쌍 시리즈다. 여기에 각성이란 설정이 들어가 인간을 초월하여 공중 특수기로 하늘을 누비기 시작하니 패키지에서 표방한 하이스피드 공중 배틀이 따로 없다. 여기에 멀티플레이용 지원 스킬이나 무기 오버 드라이브처럼 본편에선 등장하기 힘든 전투 시스템이 정점을 찍는다. 이것이 정녕 삼국지 게임인가 싶은 의문점만 제외하면 토를 달기 힘든 수준급 액션인 것이다.
한편 액션이 순간적인 재미를 보장하는 동안 멀티2의 방대한 콘텐츠 분량이 지속적인 재미와 게임 수명을 책임진다. 메인 스토리에 해당하는 의뢰 수주와 달성 자체는 은근히 짧지만 이 과정에서 거처야 할 캐릭터 육성, 무기 확보, 아이템 제작 등등 게이머가 할 수 있는 작업들이 너무나 많다. 이것이 만약 필수였다면 게이머를 고행으로 몰아넣는 단점이었겠지만, 어디까지나 하면 좋고 안 하면 다른 방법으로 대체 가능한 수준이라 필요와 충분의 균형을 잘 맞춘 편. 그리고 상성과 조작 테크닉처럼 연구가 필요한 요소들 역시 콘텐츠만큼이나 방대하여 휴대용 기기로 출시한 게임의 분량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러한 멀티2 본연의 작품 퀄리티가 멀티2 HD에 와서는 매우 쾌적한 로딩과 조작 개선이란 날개를 얻었다. 전장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거나 거점으로 돌아올 때마다 로딩이 발생해 게이머가 로딩 메시지를 볼 일이 잦은데 PSP를 압도하는 PS3의 기기 성능 덕분에 말이 로딩이지 실질적으로 게이머가 기다리는 시간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진 삼국무쌍 시리즈 평생의 숙제인 그래픽 과부하로 인한 게임 속도 저하도 마찬가지로 완벽하게 해결했고. 또한 PS3용 듀얼쇼크3의 조작 편의성은 PSP의 그것과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이라 실제로 늘어난 건 좀 더 커진 버튼들과 우측 아날로그 스틱의 추가 정도임에도 조작 느낌만 따지면 신작에 가까울 정도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점은 멀티2가 2010년도 게임이란 사실이다. 멀티2 이후 진 삼국무쌍 시리즈가 배출한 걸작들과 비교를 할 때 모자라 보이는 건 당연지사. 애초에 멀티2를 발매하고 피드백을 얻지 않았으면 지금의 진 삼국무쌍 시리즈는 없었다(단적인 예로 진 삼국무쌍 6에서 위나라 장수로 등장한 채문희의 데뷔작이 멀티2이다). 이 인과관계를 무시하고 멀티2를 최신작과 비교하며 평가절하 하는 건 부당한 처사다. 다만 최신작들과 비교해서 우선시할 이유 또한 없기 때문에 멀티레이드 시리즈에 관심이 있으면서 PSP가 없던 게이머 내지는 진 삼국무쌍 시리즈라면 일단 확보하는 시리즈 열성 팬이 아니라면 멀티2 HD는 게이머들에게 외면 받기 쉬운 처지다. 그런 의미에서 이 멀티2 HD의 행보가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따라 향후 진 삼국무쌍 시리즈를 비롯하여 코에이가 제작한 게임들, 나아가 PSP용 게임의 HD 리마스터에 영향을 줄 것이다. 이런 HD 리마스터로 게이머들이 만족한다면 앞으로도 이와 같은 HD 리마스터가 이어지겠고 만족하지 못 한다면 HD 리마스터가 중단되거나 다른 변화를 모색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