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게임은 어디로 가는가. 사일런트 힐: 북 오브 메모리즈
지금까지 인류가 경험한 문화예술치고 안 그런 것이 어디 있겠느냐만 그 중 오락 문화는 확실한 반응과 효과를 얻기 위해 말초 신경을 자주 자극했다. 현대의 오락 문화이자 예술 매체인 디지털 게임이라고 다르진 않아 초창기부터 열악한 기술 환경 속에서 갖가지 방법으로 게이머들을 자극했고 기술이 발달한 지금에 와선 더욱 영리한 방법까지 동원하고 있다. 그리고 이 도전의 최전선엔 항상 공포 장르가 있다. 당장 국내 영화의 발전사를 떠올려보자. 옛날엔 전설의 고향의 괴담에 귀를 막고 여고괴담의 0프레임 전방돌진 점프 컷에 눈을 질끈 감아야 했지만 지금은 3D 입체 영상을 비롯하여 최첨단 기술을 동원한 연출과 사실보다 더 사실 같은 사운드, 스토리로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지 않는가. 게임도 마찬가지라 어둠속의 나홀로 시리즈. 아메리칸 맥기의 앨리스 등 고전 게임들이 지금 보기엔 열악하기 짝이 없는 기술 가지고도 게이머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으며, 지금에 와선 F.E.A.R. 시리즈, 앨런 웨이크 등 최신 기술들을 동원한 게임들이 악랄하기까지 한 노림수로 게이머의 정신을 쏙 빼놓는다.
그렇다면 공포 게임은 어떻게 말초신경을 자극하는가. 호러 서브 컬처의 거대 산맥 '크툴로 신화'를 창조한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감정은 공포이며 가장 강력한 공포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라고 했다. 공포 게임은 저 이론에 아주 충실히 따르기 때문에 대표적인 미지의 공포 '죽음'을 표현하는 스플래터 고어를 내세우거나 각종 장치로 알 수 없는 불안함을 유발하여 플레이하는 게이머를 심리적으로 끝없이 몰아붙이곤 한다. 여기서 후자의 방법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게임이 있으니 코나미에서 제작한 사일런트 힐 시리즈이다. 짙은 안개, 인간의 원초적 본성이 뒤섞인 스토리와 설정, 각박한 시스템 지원, 시리즈의 간판 작곡가 야마오카 아키라의 좋은 의미로 끔찍한 사운드,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극한 생존의 연속 등이 게이머의 불안한 감정을 부추기며 공포 게임의 모범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 사일런트 힐 시리즈가 이번엔 PS VITA로 진출하여 사일런트 힐: 북 오브 메모리즈(이하 메모리즈)란 스핀오프 작품을 내놨다. 그런데 이 게임, 스핀오프 작품이라지만 본편과 달라도 많이 다르다.
살기 위해선 바뀔 수밖에 없잖아. 너도, 나도!
이 게임을 플레이하기에 앞서 공포 게임으로서의 사일런트 힐 시리즈는 잊어야 한다. 발매 전부터 전작들과는 달리 PS 비타의 특성을 살려 멀티 플레이를 중점으로 하는 액션 게임을 표방했기 때문이다. 피와 녹슨 구조물들로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일런트 힐 특유의 악몽 같은 배경과 음산한 BGM, 시리즈 단골 크리처에 익숙한 아이템들은 여전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사일런트 힐 시리즈를 이끈 건 말초 신경을 쥐어 흔드는 공포의 극치였기에 저것만 보고 기존 사일런트 힐 시리즈를 떠올리며 메모리즈를 시작했다간 김빠지기 딱 좋다.
그렇다고 메모리즈의 과격한 변화를 원망하기엔 시대가 바뀌었다. 바이오 쇼크 시리즈, 데드 스페이스 시리즈처럼 공포 게임의 대세가 심리적 공포에서 스플래터 고어와 액션 위주로 바뀌는 중이고 사일런트 힐 시리즈를 시작한 핵심 관계자들이 회사를 떠났으며 시리즈의 위상과 판매량도 예전만 못 하다. 동시기에 경쟁하던 캡콤의 공포 게임 바이오 하자드 시리즈가 일치감치 게임의 방향성을 공포에서 액션으로 틀어 전환점을 마련하기도 했다. 비록 기존 시리즈 팬들이 바라지 않는 모습일지라도 시리즈의 정체성을 고수하며 시대의 명작을 다시 내놓지 않는 이상 변화는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이렇게 생존 게임이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 사일런트 힐 시리즈는 스핀오프란 명분하에 메모리즈를 변화의 시발점으로 정했다.
일단 사일런트 힐 시리즈를 계속 즐긴 게이머라면 아무리 뒷사정을 고려해도 메모리즈가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이들이 바란 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 정통 공포 게임일 테니까 말이다. 이유야 어떻든 사일런트 힐 시리즈 간판을 등에 업은 이상 메모리즈는 이런 각박한 평가와 매몰찬 시선을 감당해야만 한다. 하지만 사일런트 힐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게이머라면, 특히 국내 게이머라면 사정이 다르다. 쿼터뷰를 채용하여 시야를 명암으로만 제한하고 핵&슬래시를 표방하여 일단 크리처부터 잡고 보는 게임 진행 방식이 많이 익숙하지 않은가? 메모리즈 플레이 영상이나 스크린샷을 불특정 다수 게이머에게 보여주면 절반 이상이 블리자드 엔터테이먼트가 배출한 명작 ‘디아블로 시리즈’를 떠올릴 것이다. 여기에 비슷한 정도가 겉모습으로 끝나지 않다면?
이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나, 혼자가 아니니까!
이 게임, 공포 게임 시리즈의 스핀오프가 맞나 싶을 정도로 본격적으로 공들여서 액션 게임으로 만든 티가 많이 난다. 간편한 조작으로 크리처들을 시원스럽게 때려잡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핵&슬래시 재현, 경험치를 모아 레벨을 올리고 아티펙트와 아이템으로 조작 캐릭터를 착실하게 성장시켜 나가는 재미, 도전 욕심이 나는 게임 디자인들이 여타 액션 RPG 못지않다. 이전까지 크리처에게 쫓기며 생존해야 했던 게임이 크리처를 쫓아가 살아남는 게임으로 바뀌니 디아블로 시리즈의 전투와 겹쳐 보이까지 한다. 궁하다 싶으면 멀티 플레이로 다른 게이머와 힘을 합쳐 진행하니 공포보다 모험심이 앞서는 것까지 판박이.
그러나 메모리즈가 무작정 크리처를 사냥하는 재미로 하는 게임이냐면 그건 아니다. 게임을 진행하면 크리처들 역시 점점 더 강해지고 보다 교묘하고 치명적인 함정, 높은 수준을 요구하는 도전 조건들이 게임의 긴장감을 유지시켜 준다. 사용하는 무기의 숙련도와 내구도 개념을 같이 적용하여 무기의 사용 빈도와 관리를 균형 맞춰야 하고 아이템 수집과 캐릭터 육성을 동시에 진행해야 하므로 너무 만만히 게임을 여기다간 점점 플레이하기가 곤란해진다. 그럼에도 액션 RPG에게 적당한 수준의 난이도 조절이라 공포 조장이 아닌 긴장감 유지 차원에서 수긍하고 넘어갈 수 있다. 이 능숙한 밸런스 조절이 정녕 공포 게임 시리즈에 나올 완성도인지 신기하다.
한편 액션게임으로서 준수한 완성도를 보여줘서일까. 메모리즈의 단점들은 대부분 게임과 따로 도는 부분들에서 두드러진다. 게임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버튼 조작과 달리 터치스크린의 활용은 게임의 흐름을 방해하거나 액션 게임과 맞지 않아 몰입을 방해한다. 터치스크린을 이용한 메뉴 화면 조작과 퍼즐들이 가장 대표적인 예(퍼즐은 ZONE을 클리어하려면 반드시 풀어야하기 때문에 피할 수도 없다). 메모리즈가 추구한 멀티 플레이 액션 게임은 ZONE을 넘어가거나 게임을 시작할 때마다 기다려야 하는 수십 초 로딩과 번거로운 멀티 플레이 시작 과정이 발목을 잡는다. 때어 놓으면 사소한 단점일 수 있지만 게임의 흐름이 중요한 액션 게임에선 몰입하기 어렵게 만드는 중요한 문제다. 덕분에 메모리즈를 플레이 하다보면 재미있는 게임이라기 보단 다음이 기대되는 게임이란 인상이 강하게 남는다.
정리하자면 무섭지 않은 사일런트 힐 시리즈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성에 대해 메모리즈로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초안으로서 합격점이라 인정할 부분만큼이나 고쳐야 할 부분이 많으므로 안심은 금물(앞서 변화를 모색한 바이오 하자드 시리즈가 우수한 게임 퀄리티로도 게이머들에게 인정받기까지 험난한 과정을 거쳤던 점을 기억하자). 사일런트 힐 시리즈 팬에겐 바라던 방향성은 아니지만 사일런트 힐 시리즈 개발진들의 게임 개발 능력을, PS VITA 게이머에겐 적당히 즐길 수 있는 액션 RPG의 가능성을 보여줬으니 이대로 멈춰선 곤란하다. 더 대단한 게임으로 다시 돌아오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