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비타로 확인하는 팔콤의 자존심, 영웅전설: 제로의 궤적 에볼루션

디지털 게임에 정통파란 단어를 의외로 찾기 어렵다. 다른 오락 문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수 십 년의 역사가 전부인 탓도 있고 그동안의 오락 문화보다 훨씬 빠르고 다채롭게 주류가 바뀌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임 시장에서의 정통파란 단어는 단어 자체의 의미보단 크게 흥한 게임의 장르나 요소를 다수 채용했단 의미로 쓰이곤 한다. 하지만 이 와중에 당당하게 정통파를 외치는 게임 회사가, 그것도 디지털 게임 안에선 유구의 역사를 자랑하는 RPG로 인정받는 회사가 있다. 바로 1984년에 시작한 드래곤 슬레이어 시리즈부터 1987년 Ys 시리즈, 1990년 브랜디쉬 시리즈 등 근 30년 가까이 RPG 시리즈를 제작한 FALCOM(이하 팔콤)이다. 그렇기에 이번에 소개할 팔콤의 게임 THE LEGEND OF HEROES ZERO NO KISEKI Evolution(영웅전설: 제로의 궤적 에볼루션. 이하 제로 에볼)의 패키지에 정통파 RPG란 딱지를 당당하게 붙인 것이다.

영웅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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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에볼은 강대국 사이에 끼어있는 크로스벨 자치구 안에서 각종 지원요청을 해결하는 경찰 소속 특무지원과의 이야기를 그린 영웅전설: 제로의 궤적(이하 제로)를 PS VITA용으로 이식한 작품이다. 2010년 PSP용으로 발매한 후 2년 만의 귀환이다. 물론 그냥 돌아오진 않았다. 기존 캐스트에 신규 캐스트를 추가하여 메인 스토리 157명의 캐릭터 대사를 풀보이스로 구현, Falcom Sound Team jdk가 어레인지한 74곡의 OST, 퀘스트 개념인 지원 요청의 추가, 새로 제작한 무비 장면과 비주얼 리파인으로 그래픽 개선, PS VITA의 기능을 이용한 미니 게임 등을 내세우며 궁극의 진화를 표방했다(기기의 성능 향상으로 로딩 시간 감소 등 퍼포먼스가 발전한 건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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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012년 10월 18일에 발매하여 11월 16일 패치를 진행하기까지 약 한 달 동안은 게임이 멈추는 프리징 현상이 끊이질 않아 도저히 정상적으로 즐길 수 없는 지경이었다. 덕분에 입소문은 악화일로에 진화를 어설프게 했다느니, 안 하느니만 못하다느니, 버그의 궤적이니 각종 비아냥을 들어야 했고. 그나마 패치 이후엔 프리징 현상을 완벽하게 해결했으니 망정이지(사실 이것도 충분히 치명적이지만) 프리징 대처가 더 미흡했으면 이 아까운 게임이 영영 빛을 못 봤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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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이 즐겁다

RPG가 굴곡 없이 길게 이어가는 장르란 점을 감안해도 제로 에볼은 콕 찍어서 재미있다고 할 임팩트나 특징이 적다. 그런데 게임이 즐겁다. 물 흐르듯이 게임을 이어가는 그 시간을 즐긴다고 해야 하나. 심지어 이벤트 진행을 위해 코앞의 장소를 게이머가 직접 이동해야하는 번거로움이나 버스처럼 게임 안에서 기다려야하는 과정의 불편함, 정해진 NPC 모두와 대화하거나 특정 순서를 지키지 않으면 다음 진행으로 안 이어지는 고전 게임 특유의 투박함마저 '그런가보다', '하라면 해야지' 식으로 즐기는 경지에 도달한다. 분명 나중에 생각하면 게임이 늘어지고 게이머에게 수고를 전가하는 요소들인데 정작 게임 하는 중엔 느끼기 힘들다. 나아가 제로 에볼에서 손을 때고 다른 일을 할 때도 머릿속에서 제로 에볼이 떠올라 그동안 게임의 진행을 되짚어보거나 다음을 상상하는 마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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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력의 핵심은 제로 에볼에 담긴 이야기다. 대도시의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크로스 벨 자치구란 현실 속에서 벽을 넘어서려는 주연 4명 매력적인 활약상, 각기 다른 사건들이 스쳐 지나가는 접점을 하나로 모아 진실로 다다르는 카타르시스, 짜임새 갖춘 탄탄한 시나리오, 기승전결의 개연성과 몰입도를 최우선으로 한 무대 장치들이 게이머의 의식을 뺏는다. 단점으로 끝날 귀찮고 번거로운 과거 RPG의 유물들을 빼버리는 대신에 게임의 이야기와 엮어 당위성으로 승화시키고 게이머를 설득하려 했단 점에서 정통파 RPG의 뚝심이 엿보인다. 비단 메인 스토리만이 아니라 퀘스트에 해당하는 지원요청, 돌아다니면서 한두 마디씩 대화를 나누는 NPC들 역시 놓치기 아까운 이야기들이 함께해 클리어까지 수 십 시간 쌓여도 질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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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부터 시작한 영웅전설 시리즈의 3기인 궤적 시리즈의 4번째 작품이란 특성상 전작과 연결고리를 만들어야 했음에도 전작에게 의존하지 않는 점 또한 이야기의 완성도를 느낄 수 있는 부분. 전작의 등장인물들과 이야기, 설정들은 전작을 즐긴 게이머들을 위한 팬서비스에 가깝고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내용은 본편 안에서 충분히 설명해주기 때문에 시리즈 작품의 고질적인 약점인 전작의 이해 여부가 제로 에볼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본편에서 다 해결하지 않고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는 미해결 요소들이 이야기의 완성도를 떨어트리는 느낌이다(게임을 시작하자마자 주인공이 꾸는 꿈의 정체가 다음 작품 종장에 가서야 밝혀진다던가). 계속 차기작을 팔아야 하는 시리즈 작품의 숙명이라고 수긍하면 못 넘어갈 것도 없는 수준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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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앞서 PSP로 제로의 이야기를 경험한 게이머들은 뭘 보고 즐거워야 하느냔 문제가 생기는데 우선 눈이 즐겁다(엄밀히 따지자면 PS VITA 자체가 HD인 720P에 못 미치지만). HD 그래픽을 표방한 비주얼 리파인은 PSP와 비교 자체가 미안할 수준의 선명하고 깔끔한 화질을 자랑한다. 비중 자체는 3D와 SD캐릭터가 더 높지만 게임의 핵심인 이야기에선 대사와 함께 나타나는 캐리터들의 2D 얼굴들, 이따금 나타나는 바스트업 2D에 눈이 가기 때문에 비주얼 리파인한 티가 팍팍 난다. 여기에 완전 새로워진 무비 장면들도 전작을 경험한 게이머들에게 좋은 눈요기. 한 번 보고나면 PSP 시절은 깨끗하게 잊어버릴 수준이다(SD 캐릭터로 애쓰는 연출이 조금 측은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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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귀가 즐겁다. 제로를 해봤던 게이머들은 메인 스토리의 풀보이스 구현이 얼마나 방대한 분량인지 잘 알 것이다. 대본으로 수 천 페이지에 이르는 그 대사들을 100명이 넘는 호화 성우진이 읽어주는데 사운드에서 무엇이 더 필요하랴. 그런데 제로 에볼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74곡의 OST를 전부 어레인지하여 선보였다. 예부터 게임회사가 아니라 음반회사란 농담반 진담반 얘기가 나오는 팔콤이다. 제로에서 이미 검증 받고 완성형에 다다른 OST를 어레인지하여 원곡의 풍미를 살리는 동시에 어레인지만의 오리지날리티로 차별화 하는데 성공. 비주얼 리파인과 함께 제로 이볼의 진화를 알리는 선두를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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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실한 기본이야 말로 정통파의 증거

명심해야 할 점은 게임으로서 탄탄한 기본이 함께 했기에 제로 에볼이 즐거운 게임으로 거듭난단 사실이다. 일단 제로 에볼의 레벨 디자인. 게이머가 특무지원과 활동이란 테마에 집중하도록 마수의 정보를 모은 전투 수첩, 사건의 개요를 담은 수사 수첩과 수사 실적에 따라 포인트를 얻고 혜택을 받는 수사관 등급, NPC의 대화나 지원 요청을 제외하곤 NPC에게 개입할 여지를 안 주는 등 게임의 시스템과 난이도를 철저하게 특무지원과에 집중시켰다. 그리고 과정을 대부분 크로스벨 자치구란 배경 안에서만 해결하여 궤적 시리즈의 방대한 세계관 설정으로 인해 자칫 이야기가 산만해질 수 있는 위험을 최대한 억제했다. 사건의 주체-목적-수단-결과를 파악해 나가는 메인 스토리와 캐릭터 각자의 개성들을 이야기와 연관시켜서 배치한 이벤트들 역시 같은 맥락. 게이머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는 RPG가 대세인 만큼 촌스럽다는 얘기를 들을 순 있어도 정작 이 방식 안에서 게임을 즐기면 비판할 생각이 사라질 만큼 티가 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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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시스템의 경우 턴제 전투에 딜레이 계산으로 턴 순서가 바뀌는 영웅전설 시리즈 전통의 AT(Action Time) 배틀과 궤적 시리즈와 함께한 쿼츠 시스템이 대를 이었다. 쿼츠는 제작 재료인 세피스 수집부터 능력치 혜택을 골라 쿼츠를 제작, 오브먼트에 쿼츠를 장착하고 장착한 쿼츠의 속성 수치를 감안하여 마법에 해당하는 아츠를 선택하기에 이르기까지 RPG의 간판 콘텐츠인 성장의 재미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어 계속 붙잡는 보람이 있는 시스템이다. 아츠와 더불어 격투 게임의 필살기에 해당하는 캐릭터의 고유기 크래프트와 초필살기 역할을 하는 S크래프트, 콤비 크래프트도 수집한 적의 정보에 맞춰 사용해 전략적인 전투를 이끌어나가므로 바라던 결과를 냈을 때의 쾌감이 짜릿하다. 또 이따금 RPG에서 보이는 기존 전투 참여 멤버의 이탈이 전혀 없어 점수를 더 주고 싶다(임시로 참여했다 빠지는 경우는 많지만 장착했던 아이템 대부분을 돌려주니 안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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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가쁘게 달리는 제로 에볼의 이야기와 캐릭터 육성 사이에서 잠깐의 여유를 주는 자투리 여흥 거리들도 제로 에볼의 기본을 다지는데 한 몫 했다. 플레이 시간이 길어지면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지치기 마련인데 이 때 즐길 수 있는 카지노나 낚시, 제로 에볼에서 추가한 미니 게임이 한 숨 돌리기 딱 좋다. 그 중 요리나 낚시처럼 게임 안에서 이런저런 용도로 잘 써먹을 수 있는 여흥거리도 있고. 실질적으로 PS VITA의 기능을 유일하게 활용한 부분이니 여유 있을 때 장식품을 구해서 도전해보면 색다른 맛이 있다(타이트하게 짜인 게임 디자인이 특징인 제로 에볼이라 체감하는 자투리 여흥 거리의 존재감이 의외로 크다). 이렇듯 인상 깊은 특색이 없어서 그렇지 게임의 레벨 디자인, 전투 시스템, 기타 유희 요소들 어느 것 하나 게임을 즐기는데 방해하지 않는 준수함을 보여주고 있다. 어느 한 쪽이라도 부실했으면 게이머가 먼저 지쳐 제로 에볼의 이야기를 제대로 즐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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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인정해야겠다

그동안 다른 기종의 게임을 추가 이식한 PS VITA용 게임을 할 때마다 '이 좋은 기기를 가지고 재탕만 하나'란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이 와중에 전 세대인 PSP에나 어울릴 법한 수준 미달 게임이나 비록 거치기에서 넘어왔다지만 추가 요소라곤 생색내기 수준이면서 당당하게 추가 이식작이라고 나오는 게임을 보고 있자니 완전 신작만이 PS VITA를 이끌 기대주란 결론을 내기도 했고. 그러나 이제 추가 이식작은 PS VITA의 주요 세일즈 포인트로 자리 잡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다른 기기에 비해 게임 숫자의 절대치부터 부족하니 추가 이식작 하나라도 아쉬운 현실적인 문제도 있거니와 제로 에볼 만큼만 해주면 굳이 추가 이식작을 반대할 명분이 없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팔콤은 진화의 시동을 끝까지 책임져주기를 바란다. 이렇게 사람 기대하게 만들고 방치하는 건 인간적으로 너무한 일이다(한정판 부록으로 제로의 후속작 영웅전설: 벽의 궤적에 등장하는 아리안로드의 넨도로이드 뿌찌를 내놨으면서 입 싹 닫으면 미워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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