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오브듀티와 비타의 잘못된 만남. 디클래시파이드
시간이 지나도 클리어 하기 힘든 게임이 있다. 그 조건은 우선 난이도가 어려워야 하고, 최대한 유저를 불편하게 하는 시스템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 그래픽 수준은 한 세대 전 게임을 보는 것처럼 구질구질해야 하며, 콘텐츠의 양과 질은 제값을 다하면 안 된다. 이 모든 조건이 하나로 모였을 때, 세가 새턴의 데스 크림존이나 PS2의 48(가제)와 같은 절세의 게임이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PSVITA로 발매된 콜 오브 듀티: 블랙옵스 디클래시파이드(이하 CoD: BD)는 위와 같은 게임이 되기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조건을 두루 갖춘 FPS 게임이다. 콘텐츠 볼륨은 적고, 난이도는 어렵다. 조작감도 이상하고, 그래픽도 PSP 게임을 보는 것 같다. 블랙옵스 1편과 2편 사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콜 오브 듀티 시리즈 팬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그것 때문에 이 게임을 산 당신의 지갑은 파리지옥풀에 걸린 파리 같은 신세가 될 것이다.
어지러운 흉탄 속의 발라드
CoD: BD를 훌륭한 게임으로 만들어주는 최대 요소는 바로 전체 볼륨이 터무니없이 적다는 점이다. 이 게임의 메인 콘텐츠라고 할 수 있는
싱글플레이 모드는 총 10개 미션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미션을 클리어 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약 5분여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모든
미션을 클리어 하는데 1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가격대가 비슷한 크라이시스3가 최소 6~7시간 정도 플레이 할 수 있는 것과
비교하면 수지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1시간 동안 재미와 상쾌함을 선사해주는 것도 아니다. 뻔한 위치 선정과 단조로운 공격 패턴을 어떻게든 감추어보려는 의도인지 적의 명중률은 그야말로 백발백중, 올림픽 사격 금메달리스트 뺨치는 수준을 자랑하며, 무식하게 쏟아지는 총알비는 VITA 화면을 순식간에 빨간색으로 물들인다.
난이도에 속지 말지어다
난이도가 낮다고 적의 명중률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공격력도 똑같다. 제한시간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나타나는 위치도 똑같다. 적의
십자포화에 걸렸을 때 순식간에 바닥과 키스를 하느냐, 아니면 0.5초 정도 더 오래 버틸 수 있느냐의 차이만 제공할 뿐이다. 어떤 난이도를
선택하든, 적의 위치와 공격 간격을 철저하게 외워두지 않으면 적들이 엉성한 군인 하나 때려잡고 포상휴가 받아 고향에 있는 여자친구 만나러
가는 건 일도 아니다. 정작 게임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미션 하나당 걸리는 시간이 5분 남짓이니까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다 보면 언젠가는 클리어 하지 않겠느냐 생각하겠지만, CoD: BD에는 체크 포인트가 없기 때문에 죽으면 미션 시작 부분으로 돌아가 게임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미션 목표가 갱신돼도 중간 지점이 저장되지 않는다. 그냥 무조건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다. 재수 없으면 스쳐도 죽는 마당에, 죽었다고 미션 처음으로 되돌려 보내는 80년대 오락실 슈팅 게임 같은 모습을 보고 있으면 머리에서 증기가 나는 진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플레이어의 인내력을 테스트
일부 무기의 경우 사격할 때 총구가 위로 확 올라가버리기 때문에, 조준 시 적에게 자동으로 가늠자를 맞춰주는 에임 어시스트 기능을 활용하기
힘들다. 원하지 않는 타이밍에 수류탄이 써지는 것도 문제이다. 로딩은 1분 정도나 되고, 그래픽은 PSP보다 약간 나은 수준이라 맨눈으로
적의 위치를 파악하기 힘들다. 단순히 열린 문을 들락날락 거리는 것뿐인데도, 어딘가에 자꾸 걸려 움직이지 못하는 일도 많다.
이 게임의 싱글플레이 모드는 침입자 한 명 들여놨다고 100년마다 반드시 무너지는 악마성만큼이나 결함투성이다. 그렇다고 다른 모드가 멀쩡한
것은 아니다. 몰려오는 적을 물리치는 호스타일 모드는 단조롭기 짝이 없으며, 타임 트라이얼 모드는 추가요소 없이 싱글 플레이의 그것과 완전히
같다.
멀티는 쉬울 것 같은가? 그것은 큰 오산
싱글플레이에 상처입은 게임 혼을 달랠 수 있는 방법은 멀티플레이 모드이다. 멀티플레이 모드는 매의 눈을 가진 AI와는 달리 사람을 상대하여
조금 나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상대방 플레이어도 바보가 아니라는 점은 또 다른 문제. 원체 맵의 수가 적고 맵
크기가 적은 문제는 여전하다. 정해진 대로 움직이는 싱글플레이의 AI야 외워서 클리어할 수라도 있지만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을 통달한
멀티플레이는 리스폰 지역 바로 코앞에서 따끈한 산탄총 세례를 퍼부어주는 플레이가 이미 주류를 이루고 있다. 게다가 최대 참가 인원이 4:4
밖에 되지 않는 점도 실망스럽다.
VITA의 흑역사로 자리잡다
PSVITA에 FPS/TPS 게임이 적은 것은 사실이다. 때문에 CoD: BD에 거는 팬들의 기대감이 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인 것도 있고, 하지 않는 게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도 있다. PSVITA로 FPS를 즐기고 싶은 마음은 잘 알겠지만,
그렇다고 무늬만 그럴듯한 게임에 5만원은 사치라고 생각한다. 전작들 사이에 벌어진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싱글플레이보다 멀티플레이 위주의
게임을 즐기고 싶은, 동시에 주머니 사정에 여유가 있는 콜 오브 듀티 시리즈 팬이라면 취사선택의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일반
유저라면 눈 딱 감고 다른 게임을 쳐다보도록 하자. 같은 가격으로 훨씬 재미있는 게임이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