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뒤틀린 혼돈의 세계. 리멤버 미
일본의 유명만화 원피스(해적무쌍의 그 원작 만화 맞다)에선 많은 독자들에게 감명을 준 명대사로 이런 말이 나온다.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사람들에게서 잊혀 졌을 때다!" 또한 자신을 알아주는 기억이 아니라도 사람들은 불가촉의 신성한 영역으로 남기를 바란다. 기억이란 과거의 기록이자 과거의 증명, 나아가 지금을 만든 밑바탕. 기억을 부정하거나 조작한다면 그것은 현재의 부정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자아의 존립여부마저 쥐어흔든다. 이렇게 함부로 다루기 힘들고 곤란한 소재이기 때문인지 어느 매체나 작품에서나 심심치 않게 나오는 인간 고찰에서도 사람의 기억에 대해선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게임 '리멤버 미'는 대체 뭘 믿고 사람의 기억을 송두리째 움켜잡아 다루었을까? 첫 작품을 만드는 신생 제작사의 패기인 것일까?
리멤버 미가 보여주는 세계에선 인간성의 뿌리를 거침없이 뽑아 탈탈 털어버린다. 단순히 인간의 기억을 사업화 시킨 것을 넘어서 인간의 기억을 원하는 대로 편집, 타인에게 이전, 심지어 기억을 훔치는 도둑과 기억을 바꿔치기하는 묘사까지. 무슨 요리 방송에서 재료를 다루는 듯이 취급하고 있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면 이 무슨 인간을 포기한 군상들끼리 모여 있는 정신 빠진 세상인가 싶기도 하다.
가상의 세계를 가지고 현실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만큼 부질없는 짓도 없겠지만 소재가 소재인지라 대체 어쩌다가 저 지경에 이르렀을까 혀를 찰 뿐이다. 하지만 반대로 한 발자국 들어가면 이만큼 매력적인 세계 또한 없다. 결국 '나'의 근거를 포기하면서까지 기억을 마음대로 다루는 세계를 선택한 저 등장인물들은 과연 어떤 세상에서 사는가, 어떻게 사는가, 무슨 생각을 하는가, 이런 세상으로 괜찮은가 등등 갖가지 궁금증을 만들어낸다. 이런 세상에서 게임의 주인공 닐린은 모든 기억이 사라진 상태로 시작한다.
이제 기억을 모두 잃은 닐린과 영문을 모르는 게이머는 이 세계에 대해 아는 것도 기억 하는 것도 없다는 하나의 공통점을 바탕으로 이 세계를 알아가기 위해 같이 협력하며 나아가야한다. 기억을 다루는 미래의 SF라 사람들은 전자장비 이식은 당연시여기고 있고 이를 이용한 증강현실 인터페이스, 피드백에 따른 노이즈 따위의 디지털 현상, 디스토피아를 연상케 하는 전뇌화 사회 '네오 파리', 기억조작에 대한 거부 반응을 일으켜 탄생한 기형아이자 주요 적 '리퍼' 무리 등을 알아가며 게이머와 닐린은 일심동체로 '기억'이란 절대영역을 침범한 인과응보를 경험해나간다.
소재의 참신성처럼 게임에서 보여주는 그래픽과 사운드도 여타 게임과 사뭇 달라 이 세계를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여기에 이 과정의 백미를 장식하는 것이 이 게임에서 가장 독특한 파트인 기억 조작이다. 기억을 다루면서 뒤틀려버린 세상에 머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그 세계로 뛰어 들어 작 중 등장인물들의 기억을 상황에 맞게 바꿔가며(라고 하면 너무 미화하는 거고 사실상 닐린과 게이머의 편의를 위해 갖가지 수작을 부려야 한다) 진행하는 것이다. 원본 기억을 먼저 훑어보고 노이즈가 생긴 사물들을 조작하여 원본 기억과 다른 IF 전개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기본 골자인데 은근히 추리력과 응용력을 요구하는 것이 어드벤처 게임의 손맛을 느끼게 해주고 정답이 아닌 조작을 했을 때 발생하는 메모리 버그를 포함하여 새로운 기승전결을 보는 재미, 사람에 따라선 현실에서 용납할 수 없는 금단의 영역에 빠지는 배덕감 등 재미 즐길 거리도 생각할 거리도 한 아름 던져준다. 리멤버 미를 왜 해야 하느냐란 질문을 한 마디로 대답해야한다면 주저 없이 기억조작 파트를 꼽고 싶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 리멤버 미의 소재는 양날의 검처럼 본 작품의 아쉬움 또한 크게 만들었다. 시작은 참신하나 기억을 다루면서 스토리를 진행하는 동안 설정 모순이나 대한민국의 아침 드라마에서도 쉽게 보기 힘든 배배 꼬인 등장인물들의 가족사 설정처럼 기억 조작이 쌓일수록 게임의 스토리와 설정들이 매력보다는 흠집이 더 두드러진다. 용두사미라고 폄하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나 매력적인 시작으로 기댓값이 최고조에 이른 게이머가 실망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남들이 피하는 일엔 다 이유가 있단 말, 이럴 때 쓰지 않을까. 패기롭게 내질렀으면 명작 까진 바라지도 않으니 최소한의 앞뒤 맞는 뒷수습은 해주는 게 도리가 아닐까 싶다.
타 게임과의 차별화에서 따라온 양날의 검은 비단 소재와 설정만이 아니다. 화기를 금지하는 설정 속에서 리멤버 미는 액션의 대부분을 격투기로 진행하는데 쿨타임 콤보, 체인 콤보 등 일반적인 의미의 콤보 시스템에 프레상이란 효과를 추가, 이 콤보와 프레상이 진행에 따라 개방되면 매우 이색적인 전투 시스템이 완성된다. 콤보 입력과 프레상의 조합에 따라 여러 효과, 모션이 등장하는 것도 꽤 그럴싸하고 3D 대전격투게임처럼 정교한 입력을 요구하여 습관적으로 버튼을 누르는 것이 아닌 리듬 게임 내지는 대전격투게임의 공방처럼 심도 깊은 전투를 이끌어 나갈 수 있다. 스패머나 S-프레상을 사용한 센센 기능 활용처럼 미래 SF 느낌이 물씬 풍기는 최첨단 공격 묘사도 보는 게이머를 즐겁게 해주고.
그런데 문제는 적들은 사방에서 오는 와중에 콤보 유효 판정이 너무 짜 콤보 입력 타이밍, 락 온 유지, 회비 유효 판정 등등 너무나 신경 쓸 것들이 많아 게이머가 재미를 봐야 할 콤보 시스템이 족쇄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콤보를 완성할 때 프레상 적용이 가능해서 콤보 없이 플레이하기란 매우 어렵다). 적어도 게이머가 어느 적을 때리는지 알기 쉽거나 콤보를 방해하는 요소가 많으면 대응책도 1:1로 준비해줘야 하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크다. 게다가 특정 순간에 버튼을 입력해야하는 QTE가 너무 자주 발생하여 흐름을 자주 끊는 것도 감점 요인.
결국 비주얼 잘 뽑아주고 좋은 사운드 뿜어내면서 짜임새 있는 구성을 만들어 놓았는데도 리멤버 미는 뭔가 아쉽고 뭔가 모자란 게임으로 끝나버렸다. 단지 뒷마무리가 부족다고 넘어가기엔 지적 할 점이 너무 많은 그런 게임. 그저 못 만들었다고 비난하기엔 장점들이 너무 돋보이는 그런 게임. 굳이 정리하자면 개발사인 돈노드 엔터테인먼트의 능력을 전부 보여준 작품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무난한 평가일 것이다. 온라인으로 시스템 개선이 어떻게든 이루어질 수 있는 시대니 앞으로는 이 게임을 패치로 개선하느냐, 아니면 신작에서 리멤버 미의 문제점들을 해결한 모습을 보여주느냐, 그것도 아니면 단점을 답습 혹은 심화시키느냐에 따라 이 개발사를 보는 게이머들의 시선이 좌우될 것이라 본다. 그래도 리멤버 미 초반의 그 흡입력, 자비가 없어서 그렇지 자기만의 개성 확립은 일치감치 완성시킨 이 처녀작을 보고 있자면 나중에 어떤 패치를 진행하거나 신작을 내놓아도 그다지 실망은 안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