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그래픽에 감춰진 다크 판타지. 마녀와 백기병

이 게임은 이런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어딘가 존재하는, 조금 환상적인 세계에서 일어난 이야기. 대국에 인접한 작은 숲에는, 추하고 악독한 숲의 마녀와 아름다운 용모에 천부적 재능까지 지닌 늪의 마녀가 있었습니다. 둘은 서로 마력을 겨루기라도 하듯 100년 넘게 싸워 왔지만, 그 균형은 늪의 마녀가 심연의 어둠 속에서 전설의 병사를 발견한 것을 계기로 무너지고 맙니다" 믿지 말자.

다음 패키지의 소개 문구다. "마녀 메탈리카에 의해 소환된 전설의 마신 백기병. 마녀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은 바로 숲의 마녀를 무찌르는 것! 다크한 판타지 세계를 무대로 펼쳐지는 백기병의 이야기가 지금 시작됩니다" 거짓말만 없지 이건 사기다.

당연히 공식 홈페이지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조금 환상적인 세계에서 일어난 이야기. 세계를 늪으로 채우려 하는, 늪의 마녀 메탈리카에 의해 소환된 전설의 병사 백기병. 그(?)를 조종해, 악한 숲의 마녀에 맞섭시다!"란 소개도 마찬가지다. 그저 이 게임의 진짜 정체를 간접적으로 나타낼 뿐.

마녀와 백기병 스크린샷
마녀와 백기병 스크린샷

그렇다. 이 게임, 마녀와 백기병은 배신과 음모가 난무하고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소개문구의 ‘다크한 판타지’ 그 자체나 마찬가지인 게임이다. 안 그래도 밝고 가벼우면서 유머를 잃지 않는, 지금껏 정식 발매한 니폰이치 소프트웨어 작품들과 이질적인 작품이지만 시작부터 게이머에게 발칙한 기만술이나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기만술이 이 작품의 본질을 꿰뚫고 있단 점이 짓궂다고 해야 하나. 게임을 처음 시작하고 나서는 금방 알기 힘들다.

여전히 눈이 즐거운 하라다 타케히토 선생의 2D 일러스트들이 이벤트 장면에서 여럿 나와 주고 디스가이아 시리즈를 해봤다면 귀에 익숙할 사토 텐페이 선생의 BGM이 들린다. 아이템 등급 및 성장, 스테이지 보너스, 만복도, 체크포인트 탐색 및 활성화, 필드 탐색으로 스테이지 달성률 증가 등등 튜토리얼 스테이지에서 차례대로 나타나는 익숙한 시스템들을 마주하고 있자면 이 게임에 대한 불만은 하라다 선생님 앞으로 끌고 가 석고대죄시키고 싶은 저질 3D 모델링과 게이머의 적응을 강요하는 불편한 카메라 시점 정도이다. 게이머가 조작하는 대로 필드를 뽈뽈뽈 돌아다니며 보이는 적들을 후려패고 찍고 날리고 씹어 먹는 마녀와 백기병의 액션은 보통 이상이라 적당한 감탄이 뒤따라 올 수도 있겠고.

마녀와 백기병 스크린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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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여러분들은 시스템이 시키는 대로 조작하면서 어떤 의미로는 구성 전체가 연습 스테이지인 1장을 클리어 한다. 이 과정에서 클리셰 붕괴와 마녀와 백기병 특유의 난폭한 전개에 좋든 나쁘든 강한 인상을 받으며 다음 필드로 나갈 것이다. 그 다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잡졸들에게 단 2~3방에 넉다운 당해버리는 백기병의 꼴불견! 아무 것도 모르고 나간 게이머들은 당연히 강제귀환 당할 수밖에 없다.

게임 초반의 밸런싱 실수라고 넘어가기도 힘들다. 잊을 만하면 각 장을 넘어갈 때마다 적들의 난이도가 격변하며, 이것은 숨겨진 엔딩이 위치한 13장까지 계속된다. 쉬운 난이도에 원한이라도 있는 건가? 이 제작진들은. 게임 발매 후 패치로 난이도를 낮춘 캐주얼 모드를 구현하긴 했으나 모드 설정 방법을 제대로 설명 안 해주는 건 둘째 치더라도 어디까지나 절대적 수치만 낮췄기 때문에 노멀 모드로 진행하다 캐주얼 모드로 넘어갔을 때 체감하는 난이도 하락만 있지 작정하고 파밍 및 육성을 시도하지 않는 한 각 장을 넘어갈 때마다 지나온 필드로 돌아가 레벨 노가다 해야 하는 건 똑같다.

한편, 노가다와 별개로 게임 진행을 위해 백기병 육성을 궁리해야 하는데 여기서 다른 난관에 부딪친다. 공부할 게 너무 많아! 체인 시스템 무기 배율은 무엇이며, 아이템 등급에 따른 레벨업은 또 언제 다 할 것이며 아이템 파밍은 어디서, 스테이지 보너스로 아이템 좀 챙겨볼까 하면 만복도인 기가 칼로리가 문제이고, 칼로리 회복도 위장 스톡을 늘려야 하는데 이게 각 필드의 보물상자를 찾아가며 얻어야 하니 아무 거나 해보기도 전에 막막해서 넉다운이다.

마찬가지로 한 복잡 하는 디스가이아 시리즈야 작품이 계속 나오면서 게이머들이 알아서 쌓은 전통 노하우도 있고, 장르가 턴제 RPG라 게임 안에서 시간 제약은 매우 적다. 그러나 마녀와 백기병은 액션 RPG다. 게이머가 실시간으로 적들 위치를 파악하면서 약점 알아내고 길 찾아가며 기가 칼로리 관리하고 체크 포인트인 필러를 챙기는 것만으로도 지치는데 저런 것들까지 공부시키니 나가떨어지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리고 전투 보조를 맡는 백기전술 토치카까지 생겨나면 이 토치카들의 모습과 기능을 기억하고 제 때 써먹어야 하니 이게 액션 게임인지 암기 게임인지 헷갈릴 지경에 이른다.

마녀와 백기병 스크린샷
마녀와 백기병 스크린샷

여기까지 다다르면 게이머는 귀찮다. 많이 귀찮다. 난잡한 인터페이스 속에서 두 버튼 조합 조작을 두 번 이상 조작해야하고, 살펴봐야 할 정보들은 많다. 맵 디자인이라고 해놓은 것들은 맵 끝에서 맵 끝으로 이동시키기, 미로를 헤매면서 왔다갔다, 요리보고, 조리보고, 둥글게 둥글게, 펄쩍쩔퍽이라 시간과 끈기만이 돌파의 열쇠이고, 적을 만났다 하면 시스템 들어가서 유효 속성 무기로 교체해 때리고를 반복해야 하기를 수 백 번. 실시간으로 할 일도 이렇게 많은데 암기거리까지 산더미 던져주면 게이머들이 잘도 콘텐츠 많이 주셔서 감사하겠다고 절하겠다. 패키지 내던지고 딴 게임하러 가지.

제작진들은 방대한 콘텐츠와 지긋지긋하고 귀찮은 잡일을 전혀 구분하지 못 한 건가 싶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참고 넘어간 것들까지 다시 밉상으로 부각되기 마련이다. 저질 3D 모델링을 참고 넘어갔더니 이 후줄근한 그래픽 퀄리티에 숲속 분위기 낸다고 무슨 잡 오브젝트는 잔뜩 넣어놔서 카메라 가리는 것을 시작으로 나중엔 맵 재탕과 콤보로 밝기에 장난을 쳐서 게이머의 백기병 조작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친다. 이런 걸 하고 싶어서 게임 구동 때의 그 긴 로딩과 여타 자잘한 로딩, 느려짐 현상 등을 알고도 방치했다면 제작진들은 자기성찰과 반성을 추천한다. 그러면서 보스는 보스대로 여타 액션 RPG의 패턴 파악과 조작 실력에 매달려야 하는 정석 고난이도라 고통은 계속된다 쭈-욱.

마녀와 백기병 스크린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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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플레이 의욕이 무너지고 게임 밸런스가 무너지고 돈 값 생각나는 악순환 속에서 마녀와 백기병을 계속 붙잡는다면 그 이유는 딱 하나. 폭주기관차처럼 앞뒤 안 가리고 정리 하나 없이 무작정 달리고 보는 난폭하기 그지없는 스토리 전개와 우리의 주인공 백기병과 메탈리카 콤비 때문이다. 엉망진창 난폭한 캐릭터 활용과 폭풍 전개를 빈말로도 "좋다! 훌륭하다!"라곤 못 하겠다. 그러나 다른 게임에선 보기 힘든 개성이란 점 하나는 분명하며, 이러한 마녀와 백기병의 모습이 맘에 드는 게이머들이 분명 있다. 그런 게이머들은 각종 난관과 역경을 뚫고 이세 마리야의 성우 열연이 빛나는 메탈리카의 활약상, 대사라곤 의성어뿐인데도 하는 행동마다 귀엽고 듬직하기만 한 백기병, 험한 일이란 일은 다 당하면서 히로인 포지션을 훌륭하게 소화하는 비스코의 매력적인 행동거지들을 감상할 자격이 있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훌륭한 건 아니고 중간에 헤매거나 복선 없는 뜬금포를 반전이랍시고 내놔 자충수를 두기도 하는데 캐릭터 자체가 워낙 매력적이고 클라이막스가 너무 대단해서 과정에서의 삽질은 만회하고 남을 정도. 이런 최후의 보루이자 존재 의의나 마찬가지인 12장 이후 전개를 게임 안에서 아무런 단서 하나 주지 않고 오로지 경우의 수 탐구 혹은 우연의 산물로만 도달할 수 있게 만든 제작진들은 반성하고 또 반성해야 한다.

마녀와 백기병 스크린샷
마녀와 백기병 스크린샷

사실 팬들의 근성이 담겨 있는 공략 위키를 참고하거나 단편적인 공략 교류를 수집하면 클라이막스에 도달하지 못 하는 문제 정도는 금방 해결한다. 그 뿐만이 아니라 부질없이 헤매는 필드의 문제, 육성과 게임 진행의 어려움이나 귀찮은 정보 숙지 역시 한꺼번에 문제가 풀린다. 하지만, 진심으로 이런 식으로 게임 밸런스 조절하고 플레이 시간 늘리는 건 참아달라고 사정하고 싶다. 게임은 어디까지나 게임 플레이만으로 전부 즐길 수 있도록 해야지 아무리 대세가 외부의 정보 교류 활성화라 해도 그것을 전제로 하면 그렇지 않은 게이머들에겐 모욕밖에 더 되나? 컴플리트 가이드 팔아서 푼돈 더 챙기고 싶었으면 게임부터 제대로 만들란 이야기다. 2012년 발매 예정이던 게임이 이제야 나왔는데 무엇을 위한 연기였을지 심히 궁금할 따름. 스토리 수정을 위해서였다면 연기 안 했을 만약의 경우에 어떤 참사가 벌어졌을지, 그 외 수정을 위해서라면 1년 전엔 얼마나 더 처참했을지 안 좋은 의미로 상상하기가 어렵다.

마녀와 백기병 스크린샷
마녀와 백기병 스크린샷

결국 1여년의 발매 연기 끝에 니폰이치 소프트웨어의 첫 3D게임은 좌충우돌 개성만 만점인 게임으로 나와버렸다. 그래픽 퀄리티, 인터페이스, 레벨 난이도 등 기본이 부족한 가운데 본전 이상 해주는 백기병의 액션들과 매력적인 캐릭터, 앞만 바라보고 달리는 난폭한 전개가 일품인 이 언밸런싱 게임이 많은 게이머들 눈에 안 들어올 것은 자명한 사실. 그래도 기본기가 부족해도 좋으니 마녀와 백기병 같은 캐릭터들이 좋고 액션부터 따지는 게이머라면 아주 못 할 게임도 아닐 것이다. 세상에 백이면 백 각자의 개성을 가진 게임들이 넘치는데 그 중에서 독보적으로 개성적인 게임이면 그것대로 존재 가치는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을 가져볼 순 있겠다. 다만 아무 것도 모르는 게이머가 이 게임을 시작했을 때 발생할 트러블 대폭발과 후폭풍에 대한 책임만큼은 누군가 나서서 사과든 해명이든 책임져줬으면 하다.

마녀와 백기병 스크린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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