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비타용 FPS 게임의 한계. 킬존 머시너리
세상은 넓고 주역은 많다. 그리고 그 주역들의 뒤에서 암약한 또 다른 이야기의 주역들은 더더욱 많다. 세 편에 걸친 트릴로지를 마무리하고 또 신작을 개발 중인 킬존 시리즈가 이번엔 트릴로지 뒤편에서 암약한 용병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정확히는 킬존 1편이 한창일 때 시작하여 2편의 분기점인 그 사건이 터질 때까지를 그렸으며 전쟁이라면 으레 있을 용병들 중 한 명으로 시작하여 수라장 복마전인 벡타 행성과 헬간 행성을 넘나드는 것이 주 내용이다. 게임 내외적 어른의 사정으로 실제 미션에서는 함께 행동하는 동료가 적어서 용병보다 특수 공작원에 가까울 때가 많긴 하지만.
어쨌든 기존 스토리에서 한 발짝 물러나 다른 장소의 다른 때의 사건을 다루며 시리즈 팬들의 새 흥미를 사고, 지금껏 PS 진영의 대표 FPS를 자청한 시리즈가 PS VITA로 첫 진출하였단 점에서 이번 킬존 머시너리를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이 기대대로 킬존 시리즈의 자존심이자 아이덴티티인 그래픽 자랑은 PS VITA에서도 여전하다. 시작부터 투쾅투쾅 터트리며 전장 한복판의 박력을 살려내었고 블록버스터 안 부러운 그래픽 효과가 기복 없이 이어진다. PS VITA 초기 그래픽의 모범이라 여겼던 언차티드, 진 삼국무쌍 NEXT와 비교해도 일취월장한 기술의 발전을 느낄 수 있다. PS VITA란 성능 좋은 기기를 가지고 지금껏 그래픽을 만족하지 못했던 게이머라면 킬존 머시너리가 답이다.
싱글 플레이는 총 9개의 챕터로 구성하여 킬존 1~2 사이를 특정 사건만 포커스를 맞추며 진행하기 때문에 짧으면 5~6시간 플레이만으로 끝나 분량이 아쉬울 순 있겠다. 허나 이런 단점을 만회할 만큼 짧은 시간 안에 불평 달 수 없는 연출과 그래픽 묘사들이 펼쳐져, 적어도 플레이 도중엔 그래픽, 사운드 가지고 딴 생각이 날 여지가 없다. 정말 아프게 찌르는 근접 공격, 1인칭 시점임에도 3인칭 상상도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히트앤런, 군더더기 적은 기승전결 등 전부 다 말이다. 또 일직선 진행이라지만 대놓고 치고 빠지며 전투로 나아가든 뒷길과 빈틈을 이용해 잠입 액션처럼 지나가든 여러 선택지를 열어놓고(아예 해당 미션을 잠입, 정밀, 파괴 등의 컨셉과 세부 목표를 두고 도전할 수도 있다) 게이머에게 선택권을 맡기니 한 번 하고 끝날 걱정도 없다. 남는 건 개성 넘치는 뱅가드의 보조와 블랙잭의 지원을 등에 업은 각가지 무기들을 꾸려 벡타 행성과 헬간 행성을 종횡무진 활보하는 것 뿐. 적절한 터치 스크린 활용 덕분에 거치형 안 부러운 인터페이스와 조작 편의성이 탄생했으므로 최소한 기계 탓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킬존 머시너리의 싱글플레이, 잘 만들긴 했는데 잡으라는 게이머의 마음 대신 발목을 잡는 부분이 몇 있다. 시작부터 1GB가 넘는 패치 파일로 저용량 메모리 스틱을 사용하는 게이머들의 마음을 흔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벤트 진행 플래그가 제 때 발동하지 않아 처음 미션을 진행하는 게이머가 헤매게 만들고, 특정 위치해서 근접 공격 모션을 생략해버리는 문제(라고는 해도 암살자 판정이 아닌 이상 빈틈을 줄여줘서 일장일단이 있다), 벽 끼임 문제, 멈춤 증상 같이 잘 즐기다가도 맥 풀리게 만들 때가 있다. 또한 부가 콘텐츠도 습득 자금을 사용하여 장비를 해금하기나 무공 카드 수집 등 투자 시간 및 노력 대비 부실한 것들이 대부분이라 플레이 의의를 보상에서 찾는 게이머들에게도 만족감을 주기 힘들다.
이런 싱글 플레이의 일장일단을 겪으면 자연스럽게 멀티플레이로 관심이 옮겨간다. 정해진 시나리오에 따라 장비 운용이나 플레이 스타일에 한계가 있는 나 홀로 세계에서 벗어나 싱글 플레이에서 모은 무기들과 뱅가드로 무장하여 전 세계 게이머들과 전쟁을 벌일 수 있다(어찌보면 싱글 플레이는 멀티 플레이를 대비한 연습 스테이지라고 할 수 있다). 멀티플레이를 선호하는 게이머들이라면 기대 해도 좋다. 동시에 각오도 해야 한다. 개인전인 용병전, 단체전인 게릴라전, 페이즈에 따라 미션을 수행하여 점수를 겨루는 전장 이 세 가지 모드가 각자의 개성적인 플레이 감각을 선사하여 킬존 머시너리의 플레이 시간을 하염없이 뺏으려 할 테니 말이다. NAT1 타입 기준으로 참가 인원도 넉넉하겠다 한 번 맛들이면 자제력 없이 그만두기 곤란할 정도.
그럼 멀티플레이는 지상낙원 환경에 FPS 장르의 끝판왕이냐. 쾌적한 온라인 환경, 무기와 뱅가드의 조합 속에서 피어나는 수만 가지 플레이 스타일, 고수는 고수대로 초보는 초보대로 대활약 펼칠 수 있는 공방 구조를 가져도 완벽할 순 없었다. 참가 인원 8명 제한과 6개의 맵이 문제일까? 거치형 FPS와 비교해서 이런 규모의 제한이 발생하여도 질리지 않는다는 게 킬존 머시너리 멀티플레이의 장점이다. 무작위로 필드에서 제공하는 뱅가드? 오히려 자칫 패턴화로 전락할 수 있는 공방 양상의 활력소 역할을 해준다. 문제는 싱글플레이에서 이미 경험한 그것들이 사람 대 사람 사이에서 바뀌어 버리는, 이른바 밸런스란 녀석이다.
싱글플레이에선 스테이지 설정과 능동적인 AI로 게이머의 플레이 스타일이나 장비를 어느 정도 유도했는데(또한 어떤 장비 조합이든 재미와 난이도가 공평하다면야 밸런스를 조절할 필요가 없겠고) 게임 규칙과 맵 구조만으로 개입하기 역부족인 멀티플레이에선 보다 고효율, 저난이도 플레이가 만연하여 불공평한 양상이 펼쳐진다. 이러한 대세를 자신만의 플레이로 극복하거나 대세에 편승하여 활약한다면야 좋겠지만 승자가 있으면 패자가 있는 법. 당하는 입장에선 몰라서 당하나 알고도 당하나 손 쓸 도리가 없기 십상이라 플레이가 재미있다 쳐도 오래갈 수가 없다. 그리고 이런 박탈감을 극복하지 못 한 게이머들이 멀티플레이에서 발을 뺀다면 킬존 머시너리의 멀티플레이는 재미있고 매력적인데도 할 사람만 하는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한 위험이 크다.
돌이켜보면 킬존 머시너리는 PS VITA 라인업의 현주소다. 기기의 성능을 십분 활용하여 여타 휴대용 기기에선 엄두를 못 내는 빵빵한 그래픽과 사운드 퍼포먼스, 성능만큼이나 돋보이는 조작 편의성과 이어지는 몰입도, 객관적으로 평가했을 때 중간 이상은 물론이고 최소한 돈 값 하는 완성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잡히기 좋은 몇 가지 단점(체크포인트 설정은 있으면서 게이머가 임의로 재시작 하려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거나), 기기를 가진 게이머에겐 추천작이나 기기가 없는 게이머에겐 시큰둥한 이야기, 거치형에도 가능한 플레이 경험. 다양한 라인업을 가진 PS VITA의 준수한 작품들이 그들만의 리그처럼 알려지는 비극의 이유가 킬존 머시너리에서 그대로 나타났다는 이야기다. 물론 PS VITA용 게임 전부가 그렇단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 둘 씩 PS VITA의 경쟁력을 책임지는 명작들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에 킬존 머시너리가 못 끼는 것 뿐이지.
거창한 설명 다 빼면 '뻔하다' 한 마디로 요약할 수도 있다. 적이 아군으로, 아군이 적으로 뒤바뀌는 싱글플레이의 용병 일대기가 뻔한 사망플래그, 뻔한 복선, 뻔한 왕도 일색이라 게이머의 예상 범위 안인 것처럼 킬존 머시너리를 비롯한 상당수 작품들이 이러이러한 장점과~ 이러이러한 단점이~ 그래서 ~다 란 결론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다. 즉, 앞서 거치형 작품들이 구현한 틀과 대동소이. 거치형 FPS들의 장점들만 따와 휴대용에서 구현한 점이 킬존 머시너리의 장점인 동시에 한계다. 몇 몇 게임은 장르나 게임 특성상 거치형보다 휴대용이 더 어울려 흥하기도 하나 일단 FPS는 흔들리는 버스에서 조준하기 힘들고, 걸어 다니면서 쏘기 힘들고, 이동하면서 멀티플레이 하기 힘들어 휴대용이라는 것이 장점이 되지 못한다. 그러니 뻔한 장점과 뻔한 플레이 감각 속에서 예상 범위만으로 충분한 게이머들에게 어필하고 끝나버린다.
그래서 킬존 머시너리를 플레이하는 내내 복잡미묘한 심정이었다. 참 잘 만들었는데 이 장점을 색다른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재미있게 잘 즐기는 와중에도 앞서 등장한 FPS가 떠오르고 PS VITA용 작품들 중 단연 손꼽히는 추천작 임에도 이 게임이 있으니 PS VITA를 사도 좋다고 선뜻 말하기 힘든 이 안타까운 줄타기. 이리저리 치이면서 비교 당할 대상들은 많고 눈은 높아진 게이머들의 시선에 쪼이는 이 게임에게 광명을 찾아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확실한 건 킬존 머시너리 만한 게임을 인정해주지 않으면 여기서 더 발전한 게임은 나오기 힘들단 사실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