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의 2D와 추억, 그리고 한글. 드래곤즈 크라운
매우 잠잠한 시간을 보내며 말라죽어가는 듯 했던 국내 콘솔 게임 시장이 최근 굉장히 활발해지고 있다. 라스트 오브 어스, 바이오쇼크 인피니트, GTA5 등 따로 따로 나왔으면 전부 올해의 게임 확정이라고 할만한 게임들이 한꺼번에 쏟아지고 있으며, 정식 발매되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판에 완벽 한글화까지 되어 출시되고 있어 게이머들이 환호를 보내고 있다.
특히, 시리즈 사상 최초로 한글화 발매된 GTA5는 디아블로3 왕십리 사태가 부럽지 않을만큼 긴 구매 행렬을 만들어 내 오래만에 모든 언론사에서 콘솔 게임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으며, 요즘 가장 뜨거운 방송이라고 할 수 있는 SNL코리아에서 GTA 패러디 코너를 선보이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GTA5와 발매시기가 겹쳐 크게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SCEK에서 출시한 드래곤즈 크라운도 요즘 콘솔 게임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게임이다. 과거 오락실의 추억을 되살려주는 2D 횡스크롤 액션 게임인데다, 한글화까지 됐기 때문에 발매 당일 GTA5만큼은 아니더라도 상당히 긴 구매 행렬이 이어져 관심을 받았다. 사실 몇개월 전에 일본어판이 먼저 정식 발매되어 이미 즐길 사람들은 대부분 즐긴 게임인데도 불구하고, 한글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시 구매 행렬이 이어졌다는 것은 이 게임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높은지 증명해주는 결과라 할 수 있다.
드래곤즈 크라운의 개발사는 프린세스 크라운, 오딘스피어 등의 게임을 개발했던 바닐라웨어라는 회사다. 원래부터 고품격 2D 그래픽으로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한 회사에서 만든 게임인데다가, 아직까지도 환상의 게임으로 회자되고 있는 캡콤의 던전 앤 드래곤 시리즈를 연상케 하는 게임 플레이 때문에 발매 전부터 마니아들의 관심이 집중됐다(실제로 바닐라웨어의 대표이자 이 프로젝트를 총괄한 카미타니 조지는 던전앤드래곤 타워 오브 둠의 개발에 참여했던 개발자이기도 하다).
바닐라웨어에서도 이점을 적극 활용한 마케팅을 펼쳤으며, 캡콤에서 드래곤즈 크라운 발매시기에 맞춰 던전앤드래곤 시리즈 HD 버전을 발매하는 귀여운 방해공작(?)을 펼치기도 해 더욱 화제가 되기도 했다.
드래곤즈 크라운을 구입하게 된다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장인이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오르게 만들만큼 미려한 2D 그래픽일 것이다. 바닐라웨어 자체가 이전부터 미려한 2D 그래픽으로 유명한 회사이긴 하지만, 이번 작품은 회사의 역량을 총 동원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굉장히 세련됐다. 특히, 캐릭터들은 예약판매 사은품으로 증정된 아트북에 있는 캐릭터들이 그대로 옮겨진 듯한 퀄리티로 그려져 있어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더해준다.
사람에 따라서는 비정상적인 크기를 자랑하는 여성 캐릭터의 특정 부위에 대한 반감이 있을 수는 있으나, 타 게임에서는 절대 볼 수 없을 독특한 캐릭터의 외모가 드래곤즈 크라운의 개성을 부각시켜준다는 것은 누구나 다 공감할 것이다. 필자 개인적으로도 게임에서 일반적으로 등장하는 수집요소인 갤러리 화보가 이 게임만큼 매력적으로 느껴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다만, PS3 버전의 경우 큰 화면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군데 군데 거친 부분이 보이긴 하나 집중하고 찾아봐야 할 정도로 잘 드러나지 않으며, PS VITA 버전은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하다.
태생부터 던전앤드래곤 시리즈와 비교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드래곤즈 크라운의 게임 플레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던전앤드래곤 시리즈의 그것을 떠올릴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게임을 시작하면 파이터, 아마존, 엘프, 위자드, 소서리스, 드워프 등 6개의 캐릭터 중 하나를 고르게 되며, 최대 4인이 같은 던전에 입장해 졸개들을 물리치며 전진하다가 보스전을 즐기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의 횡스크롤 액션 게임이 이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긴 하나, 드래곤즈 크라운은 플레이 도중 게이머의 선택에 따라 보스가 달라지는 던전 구조와 중간 중간 등장하는 비밀방, 약점을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지옥을 보게 되는 보스전 등 모든 부분에서 던전앤드래곤의 그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물론, 오락실이 아닌 가정에서 장시간 즐길 수 있어야 하는 게임이다보니, 던전앤드래곤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최종 보스전까지 끊임없이 스테이지가 이어졌던 던전앤드래곤과 달리 마을을 기반으로 총 9개의 던전을 반복 도전해서 캐릭터를 성장시킬 수 있으며, 일정 퀘스트를 클리어하면 던전 진행 도중 다른 길을 선택해서 더 어려운 보스를 만날 수 있게 된다. 특히, 이 게임의 최종 보스인 에인션트 드래곤을 만나기 위해서는 B루트(더 어려운 보스)를 모두 클리어해서 9개의 탈리스만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최종 보스를 만나게 되기까지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최종 보스를 클리어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던전앤드래곤 시리즈와 달리 반복 던전 플레이로 캐릭터를 성장시키고, 더 좋은 아이템을 장착시키는게 목적이다보니, 게임 플레이 자체는 콘솔 게임이라기 보다 던전앤파이터 같은 MORPG를 즐기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 게임을 어떻게 던전앤파이터 같은 게임에 비교할 수 있느냐며 입에 거품 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사실상 게임플레이의 전반적인 흐름은 다른 점은 전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오히려 오랜 기간 서비스되어 오면서 편의성을 강화한 던전앤파이터보다 훨씬 불편한 부분이 있기도 하고...
온라인 게임의 멀티플레이를 많이 연구해서 나온 듯한 드래곤즈 크라운의 멀티 플레이는 이 게임의 매력을 몇 배 올려주는 최강의 무기라고 할 수 있다. 초반에 멀티플레이 모드가 활성화되기 전에는 NPC를 데리고 다녀야 하니 답답하고 지루함이 느껴지지만 멀티플레이가 활성화된 이유에는 전혀 다른 게임을 즐기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게이트를 통해 던전에 입장할 경우 던전이 랜덤하게 선택되기 때문에 답답함을 느낄 수 있으나 자신이 던전을 선택해서 들어갈 수 있는 마구간 기능이 이를 보완하며, 같은 던전만 계속 돌게된다 하더라도 새로운 아이템을 습득하는 재미가 이를 극복하게 해준다(랜덤 던전 선택 기능은 부족한 콘텐츠와 플레이 타임을 보완하기 위해 일부러 선택한 듯 하다).
또한, 던전 클리어 이후 마을로 돌아오지 않고, 바로 다른 던전으로 들어갈 경우 중간에 간식타임(?)이 주어지며, 화면에 쌓여 있는 요리를 조리해서 먹으면 다음 스테이지를 시작할 때 공격력, 체력, 방어력 등이 향상돼 반복 플레이를 좀 더 쾌적하게 즐길 수 있게 도와준다. 음식 먹기 미니게임이라면 과거 캡콤의 천지를 먹다처럼 빨리 먹기 경쟁을 떠올릴텐데 드래곤즈 크라운의 간식타임은 음식을 만들어서 친구에게 줄 수도 있는 매우 훈훈한 시간이다.
드래곤즈크라운의 멀티플레이는 친구들과 함께 할 경우 재미가 배가 되며, 패드가 2개 있을 경우 2인 플레이도 상당한 매력을 선사한다. 단, 다른 온라인 게임과 마찬가지로 비매너, 혹은 잘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면 짜증을 불러일으킨다는 단점도 가지고 있다.
이 점이 잘 드러나는 부분은 룬마법과 보스전이다. 룬마법은 맵 곳곳에 숨겨져 있는 룬을 클릭해 활성화시키는 것으로 성공하면 게임 플레이에 도움되는 다양한 특수 효과가 발동하며, 특정 보스의 경우 룬마법을 발동해야만 쉽게 클리어할 수 있다. 즉, 룬마법과 보스 공략법을 아는 사람들과 플레이를 하면 게임의 모든 재미를 쾌적하게 즐길 수 있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과 플레이할 경우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는 얘기다. 잘 모르는 사람은 가르쳐주며 플레이하면 될 수도 있으나, 다른 게이머들과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이 없는 드래곤즈 크라운에서는 상당히 곤란한 문제다.
또한, 화려한 그래픽은 혼자 할 때는 장점이지만 멀티플레이에서는 곤란함을 더한다. 4명의 캐릭터들이 스킬을 사용할 때마다 화려한 이펙트가 난무하다보니 잠깐 시선을 놓치면 자신의 캐릭터가 어디 있는지 파악하기가 상당히 힘들다. 아군이 사용한 마법과 적이 사용한 마법을 구분하지 못하고, 보스 몬스터의 강력한 마법 속으로 돌진하는 아군을 보다보면 저절로 한숨이 나올 수 밖에 없다.
멀티 플레이가 주가 되는 게임인 만큼 사람으로 인한 즐거움이나 스트레스는 이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문제이고, 그것을 즐길 수 있다면 이 게임은 상당한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게임이다. 흔히 말하는 대작의 범주로 올리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만 던전앤드래곤 시리즈의 추억을 아직 잊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어떤 대작보다 더한 즐거움을 줄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깔끔한 한글로 인해 스토리나 게임 중간 힌트를 쉽게 이해할 수 있으니 금상첨화. 누구에게나 완벽한 게임은 아니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환상적인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게임. 드래곤즈 크라운은 그런 게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