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지는 건 순간이다. 영웅전설 섬의 궤적
근 30년 가까이 RPG 시리즈를 제작하면서 정통파 RPG 제작사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일본의 게임제작사 FALCOM(이하 팔콤). 이 팔콤이 1984년 드래곤 슬레이어 시리즈, 1987년 Ys 시리즈, 1990년 브랜디쉬 시리즈 등 여러 작품을 전개하다 2004년부터는 ‘영웅전설6 천공의 궤적’을 시작으로 세계관을 공유하는 일명 궤적 시리즈를 전개하고 있는데 10년 넘게 진행된 전적에 비해 우리나라에선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PC로 발매한 천공의 궤적은 2006년 (이마저 지금은 사라진)아루온에서 온라인 서비스를 진행했으나 2010년에 발매한 ‘영웅전설 제로의 궤적’부터는 PC에서 PSP 등 콘솔로 기종을 바꾸며 정식발매 없이는 국내에 소개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팔콤과 멀어지던 대한민국 시장에 변화가 찾아온 것은 2012년. 제로의 궤적의 추가 이식 작품인 PS VITA용 ‘영웅전설 제로의 궤적 에볼루션’이 정식발매로 들어온 것이다. 선인들은 여타 사정 다 떠나서 팔콤 작품이 다시 대한민국 시장에 들어온 것에 의의가 있다 여겼으니 그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아 2014년, 궤적 시리즈의 최신작 ‘영웅전설 섬의 궤적’(이하 섬궤)가 현지화까지 거쳐 정식발매가 성사되기에 이르렀다.
섬궤가 10년 넘게 이어진 시리즈의 최신작, 앞서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작품만 5개가 나왔다는 사실에 겁먹을 필요가 없다. 비록 같은 세계관이긴 하나 ‘에르보니아 제국’이란 주요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독립적인 이야기가 대부분이라 섬궤로 궤적 시리즈를 시작하는데 문제가 없다. 물론 섬궤 이전 시계열에서 벌어진 전작, 비슷한 시계열에서 벌어진 다른 장소를 무대로 한 전작이 스토리와 설정에 영향을 주기는 하나 플레이하는데 필요한 내용은 게임의 잔재미인 서적, NPC와의 대화, 이벤트에서의 설명 등으로 충분히 풀어주고 있다. 오히려 섬궤를 하고 있자면 과연 시리즈 전작에서는 어떤 스토리가 펼쳐졌을까 호기심을 유발하니 궤적 시리즈라는 연대기를 입문하기 딱 좋다.
이런 장점을 가질 수 있는 건 팔콤이 섬궤 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장치에 이야기를 배정한 정성에 기인한다. 일개 수집품과 간판부터 게임 안 세상의 문화를 담아내는 설명, 설정, 소설 등이 준비되어 있고 말 한마디 건네고 끝날 NPC조차 각자의 배경, 성격, 위치가 확고할뿐더러 플레이 하면서 점점 진도가 나가는 변화를 보여줘 사람 사는 세상을 담아냈다는 느낌을 준다. 여기에 사관학교 재학생인 주인공 일행들이 특별실습 명목으로 에르보니아 제국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지역 주민들을 만나고 함께하며 때로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모습에서 게이머는 어느새 게임 안 세상을 살펴보게 된다. 주인공 일행의 궤적을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게임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정성이 주연 캐릭터들에 이르러선 그 정성이 남달라 캐릭터 매력이 대폭발한다. 일단 큰 틀에서 보면 주연 캐릭터들의 독특함은 떨어지는 편이다. 자기 출신을 몰라 고민하는 청소년부터 어른들의 계급갈등에 휘말려 반목하는 관계, 인정 없는 부모님에 대한 반발과 가정 붕괴, 확고한 자아끼리의 충돌 등등 흔하다면 흔한 소재들이 대부분. 그러나 이것들이 앞서 설명한 것처럼 완성된 세계 안에서 펼쳐지기 시작하면 고작 게임 안에서의 이벤트가 아니라, 남 일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 흔히 볼 수 있는 갈등처럼 혹은 게이머 자신이 겪는 갈등으로 치환되기 쉬워진다. 여기에 현실이 아니기에 가능한 노력, 우정, 승리 공식에 세상의 부조리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청춘들의 패기를 보고 있자면 이 맛에 RPG 이벤트를 해결한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자유행동이 가능할 때 인연 포인트를 소비하여 볼 수 있는 해당 캐릭터와의 인연 이벤트에서 그 캐릭터의 사생활과 본모습의 일부를 엿볼 수 있어 이렇게 감정이입한 캐릭터와의 이벤트에선 그 재미가 더욱 깊어진다. 그렇다고 게임이 시종일관 숨이 막히는 클라이막스의 연속은 아니라 중간 중간 게이머가 직접 해볼 수 있는 미니게임과 서브 퀘스트로 한 숨 돌리며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부분 역시 준비되어 있다.
게이머가 직접 마주할 시스템 쪽도 고민하거나 계산할 구석이 거의 없어 캐릭터와 이벤트에 집중하도록 설계되어있다. 가령 이전 시리즈에서 속성 값 합산 및 조합에 따라 캐릭터의 능력, 기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아이템 ‘쿼츠’의 경우 단순히 능력을 올려주거나 기술을 추가하는 수준으로 간소화 되었고(덕분에 쿼츠에 영향을 받는 ‘아츠’ 중심 전투 캐릭터들이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전투가 없는 필드에선 이벤트 마크와 캐릭터 위치가 표시되는 숏컷의 지도를 보고 바로 이동이 가능다거나 전투가 가능한 필드에선 지나갔던 길이 미니맵으로 나타나고 보물상자나 특정 오브젝트가 나타나면 액티브 보이스(A 보이스)로 알려주는 등 게이머에게 주는 부담을 덜어주려는 노력이 상당하다. 트로피나 특전을 얻기 위해 필요한 수집 요소의 난이도 또한 낮아졌으니 이런 종류의 반복 작업이 고역인 게이머에겐 희소식일 것이다.
그러나 머리로 고생할 구석이 없다 하여 게임의 난이도가 낮다는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게임의 난이도는 상당한 편. 생각 없이 대충 게임을 하다간 서장부터 게임오버 화면 보기 딱 좋다. 당장 전투부터 필드에서 적의 뒤를 공격하여 기절 발동, 그 상태로 접촉하여 전투 시작 전 혜택을 얻은 다음 자기 버프-적의 약점 파악 및 유효한 아츠와 크래프트(캐릭터 고유기)를 사용하는 일련의 정석 플레이, 조건을 만족하여 추격타나 대신 방어로 활용이 가능한 전술 링크 시스템을 적극 활용, 위험하다 싶을 땐 재빨리 필살기에 해당하는 S크래프트로 끼어들어(S-BREAK 시스템) 전멸을 방지하기까지 게이머가 배워야 할 내용이 좀 많다. 전투가 아닌 이벤트나 퀘스트라고 다르지 않아 정답인 선택지를 골라 AP를 착실히 모아야 각 장이 끝나고 받는 평가 및 특전을 노려야 게임이 조금이라도 더 쉬워지며 이를 위해선 숨겨진 퀘스트를 찾기 위해 필드를 열심히 돌아다녀야 하다 보니 좋으나 싫으나 섬궤라는 작품에 점점 해박해지는 자신을 볼 수 있다.
여기까지 살펴보면 섬궤는 속이 꽉 찬 명품 RPG란 평가가 잘 어울린다. 속이 꽉 찼단 말 자체엔 자신할 수 있으나 겉이라고 해야 하나, 게임의 퍼포먼스 부분에선 아쉬운 구석이 너무 많다. 우선 그래픽. 풀 3D와 360도 프리 카메라를 채용하면서 더욱 정교해진 필드와 자유롭게 조작 가능한 카메라 기능으로 광대한 세계를 더욱 풍부하게 표현하였다 호언장담을 했는데 2D를 고집하던 궤적 시리즈가 섬궤에 와서 처음으로 3D에 입성한 것 자체야 장족의 발전이나 앞서 풀 3D를 채용한 다른 회사의 RPG와 비교하면 초라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단순이 모델링의 퀄리티만 떨어진다면 모르겠는데 다수의 이벤트에서 2D 시절부터 자주 사용한 묘사 방법인 아이콘과 표정 변화를 답습하면서 전투 연출마저 움직이는데 의의를 두고 나머지는 이펙트와 컷인 일러스트로 무마해야 하는 중소기업스러운 조치가 다수라 보는 게이머로 하여금 안타깝기까지 하다.
그러다보니 이런 그래픽을 보여주면서 무슨 로딩이 이렇게 자주, 오래 나타나는가 하는 불평을 피할 수 없다. 발매 직후 일본판에서 발견된 10초 이상의 로딩과 구동이 멈추는 버그 등의 문제는 대부분 사라졌으나 그래도 PS3 기준으로 전투 전후의 짧은 로딩은 0.5초~1.5초, 넓은 장소로 이동할 땐 2~3초의 로딩이 나타난다. 로딩이 없을 때조차 이벤트 영상을 빨리감기하면 배경만 있는 장면이 아닌 한 움직임이 뚝뚝 끊기며 그래픽 처리 능력의 한계를 나타낼 때가 많다. PS3가 황혼기에 접어들고 PS4가 대두되는 시점에서 다른 회사들이 PS3용 게임에 개발 노하우를 총동원하여 기기 성능을 끌어올리고 있는데 섬궤는 이제 PS3 초기 시절의 걸음마를 때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게임 안쪽으로도 아주 완벽하진 않아서 각자의 캐릭터가 가진 갈등 요소를 대부분 해결하고 에르보니아 제국의 갈등 요소를 마주하면서 본격적으로 스케일을 키워가는, 발단을 지나 전개가 막 끝나고 이제 위기로 진입할 시점에서 엔딩 스탭롤이 나타나 ‘섬궤2를 기대해주세요.’이러니 미리 숙지하지 않는 게이머에겐 문자 그대로 충격과 공포가 따로 없다. 결국 이런저런 장단점을 가리고 나면 명품 RPG란 이름이 아깝지 않는 완벽한 구석이라곤 사운드 부분밖에 남지 않는다. 우치야마 코우키, 호리에 유이, 시라이시 료코, 이세 마리야, 하야미 사오리 등 유명 성우진이 풀 보이스에 가까운 비중으로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은 물론이오, 게임 회사 팔콤을 음반회사 팔콤으로 만드는데 1등 공신인 믿음과 신뢰의 OST들이 게이머의 귀를 호강시켜준다. 양이면 양, 질이면 질, 타이밍이면 타이밍, 분위기면 분위기 게임에서 소리가 맡은 역할을 120% 소화하고 있다. 일본에선 PS3용 게임 본편보다 OST가 더 잘 팔려 인터넷 쇼핑몰에서 게임의 할인율이 OST의 할인율보다 2배 이상이라니 말 다했다.
정리하면 섬궤는 겉모습에 연연하지 않고 속 내용이 중요한 게이머들에게 추천하는 RPG이다. 특히 속 내용이 중요한 RPG에서 현지화는 대한민국 게이머에겐 축복과 같은 혜택. 섬궤와 섬궤2만으로도 올 한 해는 게임 가지고 고민할 일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