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스토리] 엔씨소프트 연대기 1화 : 엔씨소프트의 탄생과 리니지
[게임동아에서는 2015년을 맞이하여 게임 기업의 탄생부터 성숙기까지 더한 연대기형 특집 '기업스토리'를 진행합니다. 첫 번째로 선정된
회사는 엔씨소프트로, 엔씨소프트의 과거와 현재를 비롯하여 정치, 인사, 경제 등 가능한 폭넓은 분야를 토대로 다루어볼 계획입니다.
- 기사 내 대화는 당시의 상황을 유추해 각색한 것으로 현실과 다소 다른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
"게임 개발을 중점적으로 해나가려고 합니다. 우리 회사가 더 빠르게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 게임이 꼭 필요합니다. 저희에게 '리니지'를 넘겨주십시오."
"이미 마리텔레콤과 얘기가 진행중입니다. 곤란해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게임 사업, 꼭 한 번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김택진 이사가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김택진 이사에게 손을 잡히고 독촉받는 아이네트 허진호 대표의 이마에는 구슬땀이 흘렀다.
장고의 시간.. 결국 허진호 대표는 김택진 이사의 손을 들고 '리니지'를 엔씨소프트에 넘겨주는데 동의했다. 김택진 대표와 '리니지'의 전설이 시작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엔씨소프트. 엔씨소프트를 태생부터 게임 개발사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초창기의 엔씨소프트는 인터넷과 관련된 외주를 받는 조그만 하청업체 였다.
1997년 3월에 설립된 엔씨소프트는 국내 최초로 100퍼센트 순수 인터넷 기반의 네츠고 서비스를 안정적으로 구축하는데 성공하면서 해당 분야에서 실력있는 회사로 조금씩 입지를 굳혀가고 있었다.
네츠고 성공의 포트폴리오를 바탕으로 데이콤, SK, KCC, 금호 등 유수 기업들로부터 일을 의뢰받으면서 엔씨소프트는 조금씩 성장해가기 시작했고, 크진 않았지만 자금이 탄탄한 회사로 발전해가는 모습을 보였다. 규모는 작았지만 장부를 써서 자유롭게 식사를 하게 하는 등 직원을 생각하는 회사라는 평가도 이어졌다.
하지만 당시의 김택진 이사에게 이러한 외주 하청업체의 매출 구조는 시장의 환경에 너무 의존적이었고, 언제든 쉽게 부스러질 수 있는 연약한 구조로 느껴질 뿐이었다.
"무언가 자신만의 콘텐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경쟁력 있는 무언가를 판매해서 안정적으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결심하던 그에게 불현듯 게임이라는 콘텐츠가 눈에 들어왔다. 1985년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한 이후 청계천과 세운상가를 돌며 쌓은 컴퓨터의 내부 구조와 작동 원리, 그리고 유닉스 소스로 개발된 텍스처 게임 '넥텍'에 빠져 게임에 대한 관심을 쌓아갔던 그에게 '게임'이란 꼭 도전해야 할 콘텐츠로 여겨졌다.
여기에 당시에 불어닥친 '스타크래프트'의 열풍은 더욱 그를 자극하는 요소였다.
"'리니지'를 마리텔레콤으로 넘긴다고요? 그게 정말입니까?"
평소 친하게 지내던 아이네트 측 인사가 갑자기 그에게 '리니지' 개발을 포기하고 마리텔레콤으로 넘기겠다고 한 것이 첫 번째 계기였다.
이 얘기를 들은 김택진 이사는 눈이 번쩍 띄었다. 회사에는 자금에 여유가 있었고, 그토록 해보고 싶었던 게임을 손에 넣을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내가 졌네. '리니지' 가져가게."
오랜 협상 끝에 김택진 이사는 '리니지'의 개발자들을 인수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게임 개발의 노선을 본격화하자며 사내에 있는 11명의 창립멤버들을 설득했고, 새로운 대표로 취임했다.
당시에 '리니지' 개발을 총괄하던 이는 송재경 씨로, 송 씨는 천재 개발자라 불리우며 '리니지'를 책임지는 든든한 아군이었다. 김택진 대표의 대학교 시절부터 술친구였던 그와 한배를 타면서 엔씨소프트의 게임 사업은 시작의 돛을 올리며 항해를 시작했다. 엔씨소프트 창립 이전에 현대전자를 함께 다녔던 현재의 배재현 부사장도 이 시절부터 게임사업에 뛰어는 핵심 인재였다.
하지만 사이버 세상의 창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천재 개발자 송재경 씨와 당시 네트워크 기술의 1인자로 불리우던 김택진 대표였지만 개발은 녹록치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리니지'가 추가 투자를 받지 못하면서 회사 상황이 급속도로 어려워졌다. 이에 김택진 대표는 자신의 집을 담보로 은행 대출을 받았으며 개발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그돈으로 직원들 상여금을 주는 등 비장의 승부수를 던졌다.
'리니지'의 과금 노선도 중요 문제였다. 당시에는 하이텔이나 천리안과 같은 PC통신의 서비스 내에 소속되어 부가사용료를 받는 것이 일상화되었었는데, 김택진 대표는 통신 수익금의 30%를 내라는 PC통신사들의 정책에 큰 불만을 가졌고 우후죽순 생겨나는 PC방에 주목하며 과감히 PC 인터넷 기반으로 과금체계를 선회했다.
출시 후 이 선택이 '신의 한수'였다는 것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리니지가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김택진 대표님 대성공입니다!"
1998년 9월 '리니지'가 완성 단계에 접어들고 1차 테스트를 시작하면서 국내 게임 시장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리니지'의 폭발적인 반응이 이어지면서 국내 최초로 동시접속자 500명을 달성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PC방에서 특히 큰 인기를 누렸다.
이렇게 '리니지'의 인기는 단순히 게임의 인기 외에도 많은 시사할 점들을 남겼다.
특히 과금 부분은 주목할만한 것이었다. 김택진 대표는 과금 부분에 큰 고민을 했는데, '리니지'를 한 달에 30시간 이상의 개인 사용자에게 2만9천7백원의 정액을 내도록 했고 PC방에도 회선당 4만4천원에서 6만6천원의 월 정액을 부과하는 정책을 만들었다.
이는 20년 가까이 되어가는 현재까지도 국내 PC 온라인 게임의 과금 형태로 자리잡았으며, 국내 게임 개발사의 수익 모델을 새로 만드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라 평가받고 있다.
또 당시에 PC방의 매출이 전체의 70%를 넘어가는 상황을 볼 때 '리니지'가 '스타크래프트'와 함께 대표적인 국민게임으로 불리우는데 전혀 무리가 없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사진 : 2004 게임대상 사진 (참고용))
"1999 대한민국 게임대상은 '리니지'"
대한민국 게임대상시상식 자리에서 김택진 대표가 트로피를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 힘찬 빵빠레와 함께 각종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국내 PC 온라인 게임의 개화기를 맞이하던 시절, '리니지'는 그렇게 전설의 서막을 열고 있었다.
- 2부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