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실 야구의 대명사 신야구. 499, 482, 학다리 기억하시나요?
[게임동아 김남규 기자] "오락실에서 자주 즐겼던 야구 게임은?" 이라는 질문을 받으면 아마 대부분 이 게임이라는 답변이 나올 것 같습니다. 데이터이스트에서 1988년에 출시한 오락실용 야구 게임 스타디움 히어로로 국내에서는 신야구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게임이죠. 그 당시 한판에 50원 하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9회까지 경기를 즐기려면 200원이라는 거금이 필요해서 많은 부담이 됐지만, 그래도 친구와 불꽃 튀는 대결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에 항상 줄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사실 칠 수 없는 마구와 맞았다 하면 넘어가는 말도 안되는 괴력의 타자들이 난무하는 실제 야구와는 거리가 있는 게임이었지만, 추억이라는게 참 신기합니다. 실제 야구와 착각할 정도로 환상적인 모습을 선보이는 더쇼보다 더 짜릿한 손맛이 있었던 게임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구장 선택. 돔 전문가인 누군가가 생각나죠? 홈런이 난무하는…
이 게임은 당시 NPB의 초상권을 획득하지 못해 팀과 선수들이 전부 가명으로 등장하고, 만화에서 등장했던 가상의 선수들까지 스페셜 선수로 등장합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대부분 일본어를 아예 몰랐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냥 게임에서 유일하게 읽을 수 있는 숫자인 타율과 방어율로 선수를 구분했으니까요. 최고의 홈런 타자는 499. 499를 뺏기면 482 이런 식으로요.
만화에만 등장했던 가상의 선수들도 많고, 실제 선수들도 워낙 오래전 선수들이라 요즘 세대들은 잘 모르겠지만, 이 게임에 등장했던 스페셜 선수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정말 화려합니다.
스페셜 선수 목록.
게임 내 최고 홈런타자로 꼽혔던 499, 금발 머리를 휘날리는 뚱뚱한 파워 타자는 지금도 전설의 홈런 타자로 기억되고 있는 베이브 루스를 모델로 만든 캐릭터입니다. 게임 내에서는 루스라는 이름으로 나옵니다. 1914년 볼티모어팀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 베이브 루스는 보스턴 레드삭스, 뉴욕 양키스 등에서 투수와 타자로 활약하면서 왼손 투수로 통산 94승 46패, 방어율 2.25를 기록하고, 타자로는 22시즌 동안 714개의 홈런을 기록한 전설의 홈런왕입니다. 특히, 보스턴 구단주가 1918년에 베이브 루스를 뉴욕 양키스에 헐값에 팔아버리고 나서 커트 실링의 핏빛 양말 사건이 있었던 2004년 이전까지 86년간 우승을 못하게 만든 밤비노의 저주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게임속 베이브 루스와 실제 사진(출저- 베이브루스 공식 홈페이지)
499 다음으로 인기가 있었던 선수들은 대부분 만화 거인의 별에서 등장했던 가상의 선수들입니다. 한국으로 따지자면 독고탁이나 까치 같은 캐릭터들이라고 할 수 있죠. 흑인으로 묘사된 482는 암스트롱 오즈마, 470은 주인공이었던 히나가타, 474는 히나가타의 라이벌인 호시 휴마의 아버지 호시 잇테츠, 450이라고 불린 안경 쓴 뚱뚱한 선수는 사몬 호사쿠가 모델입니다. 키다리에 홈런예고 포즈로 유명한 410은 애니메이션 사무라이 자이언츠에 등장한 마유츠키 히카루라는데 그 작품을 아시는 분이 거의 없을 것 같네요.
암스트롱 오즈마 / 히나가타
호시 잇테츠 / 사몬 호사쿠
학다리라는 독특한 자세 때문에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 355는 왕정치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오 사다하루 선수가 모델입니다. 게임 내 이름은 오우상이라고 나옵니다. 대만 출신인 왕정치 선수는 외다리 타법으로 유명한 일본의 전설적인 타자로 은퇴할 때까지 통산 868 홈런을 쳐서 미국 행크 애런의 755홈런을 뛰어 넘었습니다. 미국은 구장 차이를 감안해야 한다며 이 기록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이지만요. 아무튼 왕정치 선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9년 연속 우승을 이끌어서 그가 사용했던 등번호인 1번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영구 결번 중 하나입니다.
학다리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왕정치 선수와 실제 타격 모습 (출처 왕정치 박물관 홈페이지)
스페셜 투수들은 칠 수 없는 마구를 던지기는 하지만 일정 횟수 이상 던지면 마구가 사라지기 때문에 고르는 경우가 많지 않아서 잘 모르실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마구이기 때문에 실존 선수보다는 거인의 별 호시 휴마처럼 만화 캐릭터들이 대부분인데요, 그 중에 유일하게 실존 선수가 한명 있습니다. 게임에서 사와무라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반응하기 힘든 강속구를 던지는 키다리 투수 사와무라 에이지입니다. 사와무라 에이지는 미국의 사이영상처럼 그 해 가장 압도적인 투수에게 수여되는 사와무라상의 주인공입니다. 고교생 시절에 미국 메이저리그 올스타와의 친선 경기에서 베이브 루스, 루 게릭 같은 선수들에게 삼진을 빼앗아 유명해졌고, 이후 일본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첫 노히트노런을 기록하고, 그 다음해에 24승을 거둬 MVP를 차지했습니다. 당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징집되어 선수 생활을 길게 하지 못했고, 세번째 징집 때 전사했기 때문에 통산 기록이 엄청난 것은 아니지만, 워낙 드라마틱한 선수 생활을 했기 때문인지 전설로 남아있네요. 참고로 사와무라상의 수상조건은 25경기 이상 등판, 15승 이상, 완투 10경기 이상, 200이닝 이상 투구, 평균 자책점 2.50 이하, 탈삼진 150개 이상입니다. 조건이 몇 개 부족하더라도 수상자로 뽑히기도 하지만, 아예 수상자가 없을 때도 있다고 합니다.
거인의 별 히우마 / 사와무라 에이지
각 구단별로는 당시 현역 선수들과 레전드 선수들이 섞여 있습니다. 구단명이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G, 한신 타이거즈는 T처럼 가명으로 등장하긴 하지만, 일본 프로야구를 베이스로 만들어진 게임이니까요. 가장 명문 구단이라고 할 수 있는 요미우리 자이언츠(G)팀을 보면 3번 타자 하라 타츠노리, 대타로 나가시마 시게오, 카와카미 테츠하루 등이 보이네요. 하라 타츠노리는 이승엽 선수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활약하던 시절 감독으로 한국에 잘 알려진 선수이고, 나가시마 시게오와 카와카미 테츠하루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영구 결번으로 꼽힌 선수들입니다. 나가시마 시게오는 타격왕 6회, 홈런왕 2회, 타점왕 5회 등 뛰어난 성적을 거둬 미스터 자이언츠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요미우리 사상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인정받고 있으며, 카와카미 테츠하루는 선수 시절 뛰어난 선구안을 바탕으로 타격의 신이라 불렸고,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을 맡은 후로는 9년 연속 일본 시리즈 우승 등 말도 안되는 기록을 세운 것으로 유명합니다.
세이부 라이온즈(L)팀에는 기요하라 카즈히로가 4번 타자로 나옵니다. 일본에서 통산 525홈런을 기록한 유명 선수인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쿠와타 마스미 선수와 친구이자 라이벌 관계를 형성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아다치 미츠루의 인기 작품인 H2에 나오는 두 주인공이 기요하라와 쿠와타의 관계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얘기가 많네요. G팀 투수를 보면 후와타라는 선수가 나오는데 이 선수가 쿠와타 마스미인 것 같습니다.
한신 타이거즈(T)팀을 게임 내 최강팀답게 유명한 선수들이 참 많이 나옵니다(사실 개발자 중에 한신 골수팬이 있었는지 당시 실제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팀에 비해 T팀의 능력치가 대단히 좋았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선수는 파스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3번 타자 랜디 바스입니다(게임의 특성상 외모로는 베이브 루스와 구별이 안됩니다. 똑 같은 금발의 뚱뚱한 파워 타자이거든요). 이 선수는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최강의 용병이라 불리는 선수로, 불과 5시즌만에 202 홈런을 기록하고, 95년도 한신 타이거즈가 우승을 차지했을 때 왕정치의 55 홈런에 불과 한 개 모자란 54홈런으로 센트럴리그 최초의 외국인 홈런왕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이 때 왕정치 선수의 기록을 깨지 못하게 하려고 견제가 심했다고 하네요. 재미있는 것은 이 선수도 베이브 루스처럼 저주에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1985년에 팬들이 한신의 첫 우승을 기념하게 위해 선수와 닮은 사람들을 도톤보리 강에 던지며 놀았는데, 랜디 바스는 닮은 외국인을 찾을 수가 없어서 근처 KFC 할아버지 인형을 강에 던졌다네요. 그 후로 저주가 걸렸는지 30년이 넘은 지금까지 우승을 못하고 있습니다.
랜디 바스. 겉 모습은 루스와 구별하기 힘들다
지금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로 변한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즈(W) 팀에는 우리나라 삼성 라이온즈에서도 에이스로 활약했던 니아루 히사오(김일융) 선수가 나오고, 됴코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변한 코쿠테츠 스왈로즈(S)팀에는 재일교포 출신인 가네다 마사이치(김경홍)가 등장합니다. 김일융 선수는 한국 삼성으로 이적한 후에 전후기 통합우승을 차지한 1985년에 25승을 거두며 김시진 선수와 공동 다승왕을 차지한 것으로 유명하고, 김경홍 선수는 통산 400승과 14년 연속 20승이라는 절대 깨지지 않을 기록들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제는 오릭스 버팔로즈로 바뀐 한큐 브레이브스(B) 팀에는 후쿠모토 유타카 선수가 1번 타자로 등장하고, 닛폼햄 파이터즈(F) 팀에는 하리모토 이사오(장훈) 선수가 대타로 등장합니다. 후쿠모토 유타카 선수는 일본을 대표하는 1번 타자로 13년 연속 도루왕을 차지하고, 1984년에 세계 최초로 통산 도루 1000개를 돌파해 나중에 리키 핸더슨이 기록 갱신하기 전까지 세계 최고의 도루왕으로 꼽혔다고 합니다. 왕정치 선수의 홈런 기록은 인정하지 않으려던 미국도 후쿠모토 유타카 선수의 기록은 인정했다고 하네요. 구장 크기는 달라도 루와 루 사이의 거리는 같으니까요.
한국계인 장훈 선수는 통산 타율 0.319, 3085안타, 504홈런, 319 도루라는 엄청난 기록이 말해주듯 일본 야구를 대표하는 타자입니다. 지금이야 스즈키 이치로 선수가 유명하지만, 이전까지 일본을 대표하는 안타 제조기는 장훈 선수였다고 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원래 오른손 잡이였지만 어린시절 화상으로 인해 오른손을 쓰지 못하게 된 상태에서 이런 기록을 달성했다는 것입니다.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심하던 시절에, 더구나 치명적인 장애까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노력으로 이를 극복하고 일본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에 오른 선수가 됐으니 정말 대단합니다. 때문에 일본 스포츠 선수 출신으로 유일하게 대한민국 문화 훈장을 받았다고 합니다.
게임 속 장훈의 모습 / 한국 프로야구 시구자로 나선 장훈(출처- 스포츠동아)
당시에는 키다리, 뚱뚱보, 작은 애, 평균, 이렇게만 구분했지 선수 개개인은 잘 모르고 플레이하셨을텐데요, 이렇게 선수들에 대한 얘기를 다시 들으니 옛날에 플레이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지 않나요? 벌써 20년도 넘은 게임이긴 하지만, 여전히 재미있습니다. 다시 해보시면 그 어떤 최신 게임보다 더 즐거움을 느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