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후탐험] 고삐풀린 유부남, 집에 빠칭코를 들이다
서초구에 사는 이 모 씨는 결혼 15년차인 대기업 중견 과장이다.
결혼 전부터 20년 넘게 일에만 매달렸던 이씨는 아이들이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비로소 자신의 삶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다. 40대 중반으로 넘어오다보니 몸도 예전같지 않고, '죽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좀 더 인생을 즐겨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도 들었다.
한동안 고민하던 그는 와이프에게 진지하게 말을 걸었다. "내 방을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꾸미고 싶다."고.
와이프가 의아해하는 가운데, 그는 본격적으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어떻게 작은 일탈을 실현할까 고민하던 그는 예전에 일본에 여행갔을때 즐기던 빠칭코 기계를 생각했다. 알록달록 빛이나며 구슬이 왔다갔다 하던 빠칭코. 그게 방에 있으면 뭔가 성취감이 생길 것 같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어떤 빠칭코가 있는지 검색을 했더니 굉장히 많은 빠칭코 기기가 일본 옥션에 올라와있었다. 싼 것은 3천엔짜리도, 비싼 것은 8만엔짜리도 눈에 띄었다. 닳고 닳은 기기일수록 싼 것이겠지, 라고 생각하며 이 씨는 자신에게 맞는 빠칭코를 찾아보았다.
검색하는 시간은 즐거웠고 또 구슬 종류, 기계식이냐 자동식이냐 등 많은 공부가 이루어졌다. 알록달록한 기기가 인테리어에도 좋아 보였다. 방에 빠칭코 기계를 들여놓을 장소도 정했고, 와이프에겐 여기에 뭔가 하나 놓을 생각이니 놀라지 말라고 당부했다.
구입은 쉬웠다. 구슬 샘플을 포함해서 1만 엔(약 12만 원)을 1차로 결제하면 되었다. 2차 배송비까지 25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든다고 견적이 나왔다.
다만, 발목을 잡는 부분이 있었다. 빠칭코는 사행성 기기이기 때문에 구매대행 업체를 통할 수가 없었다. 또 직접 입금을 하고 들여올때에도 왜 들여오는지에 대해 서류를 써야했다. 이 씨는 어릴 적 추억 때문에 방에 인테리어 용품으로 올려놓고 싶다고 적었다. 외부 판매는 절대 하지 않고 사행성으로도 이용하지 않겠다는 얘기와 함께.
하지만, 역시나 처음 경험하는 부분이라 통관이 되지 않을 것 같기도 했고.. 요즘 시국이 시국이라 일본에 돈을 보내는 것도 탐탁치 않았다. 고민 끝에 이 씨는 해외 배송을 포기하고, 국내 커뮤니티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오, 찾아보니 국내에서도 중고 빠칭코 기기가 유통되고 있었다. 중고물품 판매하는 커뮤니티에서 발견한 중고품을 바로 연락하여 구입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물건이 왔다.
오! 이것이 내 인생의 첫 일탈인가. 느낌이 새로웠다.
알록달록한 빛.. 생각보다 덩치가 컸기 때문에 걱정도 되었다. "흠.. 괜한 짓을 한 건 아닌가?"
잠시 후회도 들었지만 이미 방법은 없었다. 일단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숨겨놓았다. 언젠가 와이프가 자리를 비울 때 몰래 방에 들이리라...
이튿날인 주말. 드디어 와이프가 시장을 간다며 자리를 비웠다. 재빨리 물건을 올려 방에 원래 지정했던 자리에 올려놓았다.
아 그럴듯 하다. 훌륭하다. 뿌듯하다.
서둘러 전원을 넣으려고 보다가 문든 24V AC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이게 무슨 뜻인지는 잘 몰랐지만 함부로 꽂으면 안될 것 같아서 일단 대기했다.
폭풍 검색을 했다. 잘은 모르지만 DC와 AC는 다르다. 그리고 동봉된 어댑터는 110V 였기 때문에, 열심히 찾은 끝에 AC 24V 어댑터를 구할 수 있었다. 주로 CCTV 쪽 분야에서 어댑터를 판매하고 있었다.
드디어 연결. 우우웅 소리와 함께 커다란 소리가 났다. 놀라서 재빨리 껐다.
"원래 이렇게 소리가 컸나?"
뒤편을 보고 소리를 줄였다. 하아. 다행이다. 아이들이 방에 들어오려고 하길래 괜찮다고 했다. 자리에 올려두고 다시 켜 보았다. 구슬이 마구 튕겨져 올라간다.
"아 이거지!!" "이맛이야!"
한 달 가까이 검색해서 집에 도착한 빠칭코. 훌륭해보였다. 구슬이 하염없이 튕겨져 올라가고, 재미있다. 불빛이 번쩍 번쩍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무엇보다 아이들과 와이프를 위해 쉴새없이 달려오기만 한 인생, 오롯이 나만을 위한 무언가를 했다고 생각하니 뿌듯했다. 또 인테리어로도 훌륭했다.
다만, 집에 온 와이프가 보더니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게 뭐냐고.
"별 거 아니야 하하. " 허락보다 용서가 쉽다고 하던가.. 한동안 기기를 쳐다보던 와이프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안방으로 간다. 드디어 허락을 받은 것이다. 꿈만 같다.
이렇게 하나를 들이고 나니 욕심이 나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옛날에 즐기던 레트로 게임기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슈퍼패미콤, 메가드라이브.. 등을 마구 구입했다. 빠칭코를 들인 김에 요즘 유행하는 좌식 게임기도 하나 들였고, 그 화면 좋다는 방송용 모니터도 하나 놓았다. 이제 정말 내가 원하는대로 방이 꾸며지는 것 같다.
이제 슬슬 방이 가득 찼다. 하지만 고삐 풀린 유부남의 마음은 계속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기념삼아 다트 기계도 하나 주문했다. 일주일 안에 오면 벽에 배치를 할 것이다.
더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언젠가 아이들이 커서 나가고 나면, 아주 커다란 게임기를 들이고 싶다고 다짐했다. 옛날에 오락실이나 술집에 가면 실제로 움직이는 핀볼 오락기가 있었는데. 정말 멋지고 장난 아니었는데.
"차분하게 여러가지 게임기를 들여놔야겠어..."
유부남 이씨.. 그의 덕행은 이제 시작인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