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 투 남아공, 2010 피파 월드컵 사우스 아프리카
1998년, 2000년, 2002년, 2004년, 2006년, 2008년 그리고 2010년. 지금 언급한 년도들의 공통점을 한 번에 알아냈다면 당신은 EA 스포츠 게임의 마니아를 자부해도 좋다. 앞서 언급된 년도들은 굵직한 축구 이벤트가 펼쳐진 년도이며, EA 스포츠의 월드컵 시리즈 또는 유로 시리즈가 출시된 년도니까 말이다.
EA 스포츠는 지난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시작으로 2년마다 자사의 인기 축구 게임 시리즈인 '피파' 시리즈의 번외편 격이라 할 수 있는 피파 월드컵 시리즈와 유로 시리즈를 출시했다. 그리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이하 남아공) 월드컵을 1달여 남겨둔 2010년, 당연하게도 EA 스포츠의 신작 '2010 피파 월드컵 사우스 아프리카'(이하 월드컵 2010)이 출시됐다.
먼저 짚고 넘어갈 점은 이 게임을 단지 월드컵 특수만을 노리고 대충 만든 게임으로 생각한다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높은 완성도와 몇몇 부분에선 전문 리뷰어들 사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던 전작 '피파 10'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 그래픽과 사운드, 이 두 가지로 현장감을 최대화 했다
피파 시리즈의 전통적인 장점이라면 많은 경쟁작들 중에서도 당대 최고의 그래픽과 사운드를 게이머들에게 제공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경기장의 전경 묘사와 응원단은 실제와 같은 응원 효과는 이번 작품에서도 '역시 EA 스포츠'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잘 구성된 모습을 보인다.
실제 월드컵 경기가 열리지만 정작 게이머들에게는 생소한 더반의 '더반 스타디움'이나 요하네스버그의 '사커 시티 스타디움' 등의 현지 경기장을 멋지게 구현하고 있으며, 캄보디아, 스리랑카 같은 축구의 변방에 위치한 팀들의 유니폼도 완벽하게 그려내고 있어 감탄사를 자아낸다.
여기에 게임 메뉴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들 역시 아프리카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분위기의 곡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게이머를 즐겁게 한다. 또한 각 국가의 특색 있는 응원가들도 시합 내내 경기장에 울려 퍼지는 것도 장점이다.
피파 시리즈의 고질적인 단점으로 지목되던 인물 모델링 역시 한층 발전했다. '도대체 이 선수가 누구입니까?' 수준이었던 피파 08, 09 시절을 거쳐 피파 10이 '좀 닮았네' 수준을 보였다면 이번 작품은 '아! 이 선수구나!' 라는 것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의 모델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특히 시합 중간에 자주 모습을 비추는 감독들의 인물 모델링은 실물의 특징을 잘 잡아낸 모습으로 이뤄져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낼 정도다.
물론 아시아 계열의 선수들은 여전히 실물과 닮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는 점과, 일부 선수들의 경우 여전히 실물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는 등 아쉬운 점이 없지 않지만, 전작과 비교했을 때 충분한 발전을 이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 예선에서 결승까지 즐기거나, 11명 또는 1명을 조작하거나
월드컵 2010에서 즐길 수 있는 게임 모드는 크게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일반적인 싱글 플레이 모드인 '2010 피파 월드컵 모드', 하나의 선수를 선택해 한 국가의 주장이 되어 팀을 이끄는 '국가대표 주장 모드'와 '멀티 플레이 모드' 및 '캠페인 스토리 모드'가 그것이다.
'2010 피파 월드컵 모드'는 하나의 팀을 선택해서 월드컵 우승에 도전하는 모드로 일반적인 축구게임에서 흔히 즐길 수 있는 컵 모드와 큰 차이점은 없다. 하지만 월드컵 본선 무대뿐만 아니라 월드컵에 출전할 선수 명단을 임의로 조절해 월드컵 지역 조별예선부터 월드컵 본선 진출에 도전할 수도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국가대표 주장' 모드는 한 팀의 국가대표 상비군이 되어, 주장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 모드다. 전작의 'Be a pro' 모드나 유로 2008의 '캡틴 유어 컨츄리' 모드와 완전하게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 모드로, 게이머는 공격수, 미드필더, 수비수로 나뉘어지는 여러 포지션 중 하나를 선택해 해당 포지션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국가대표 주장이 되기 위해서는 경쟁자들과의 경합을 계속해서 벌여야 하기 때문에, 이들 보다 뛰어난 평점을 받아야 하며, 매 경기마다 주어지는 감독의 지시사항도 충실히 이행해야 하는 것이 해당 모드에서 주의해야 할 점이다.
또한 온라인 모드에서 즐길 수 있는 월드컵 모드를 통해 선호 국가의 인기 순위를 경쟁할 수도 있으며, '캠페인 스토리 모드'를 즐기며 과거의 명경기, 명장면을 자신의 손으로 다시 한 번 재현하는 재미를 느낄 수도 있다.
*겉모습만 보고 전작의 판박이라는 생각은 하지 말자
월드컵 2010은 전작인 피파 10의 엔진을 기본으로 만들어진 게임이다. 월드컵 2010은 기본적으로 피파 10의 엔진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기 때문에, 전작의 특징이 스킬 드리블이나 360도 드리블처럼 전작에서 호평을 받았던 특징적인 시스템은 모조리 갖추고 있다. 하지만 같은 엔진을 사용하는 게임이면서 특징적인 요소가 추가된 것이 없기 때문에 마치 '우려먹기'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게임을 잠깐이라도 즐겨본다면 이는 기우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눈으로 보기엔 같을 지도 모르지만, 게임 밸런스의 대폭적인 변화는 이 게임을 전혀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피파 시리즈의 고질적인 단점으로 지적됐던 슈팅 시 답답한 공의 궤적변화와 게이머들의 불만을 자아냈던 멍청한 골키퍼 인공지능의 향상을 꼽을 수 있다. 지나치게 묵직하게 그려지던 슛은 좀 더 가볍고 빠르게 골문으로 날아가며, 슈팅에 걸리는 준비 시간도 전작보다 짧아져 보다 시원시원하게 골을 노릴 수 있도록 변했다.
이에 반응하는 골키퍼의 반응도 사실적으로 변화했다. 일대일 상황에서도 구석을 정확히 노리고 찬 공도 가볍게 막아내는 반응 속도를 보이면서도, 뛰어나와야 할 상황에 주춤거리거나 공중에 뜬 공의 낙하 지점을 잡지 못하고 우물쭈물 하다가 실점을 하는 어이없는 장면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골키퍼의 반응 속도는 이전보다 둔화됐지만, 골문 앞 혼전 상황이나, 높게 뜬 공에 대한 적절한 위치 선정을 통해 골키퍼가 보다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일대일 상황에서의 실점 확률이 높아졌다는 것 때문에 게임이 전반적으로 다득점 게임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나올 수 있겠지만, 이런 걱정 역시 접어둬도 좋다. 수비수들의 수비 범위가 확장되어 전작에 비해 드리블로 쉽게 돌파할 수도 없으며, 어정쩡한 패스는 여지없이 차단 당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밖에도 드리블, 트래핑 모션에서 보여지는 군더더기 동작의 삭제로 캐릭터의 동작이 한 방향으로 밀린다거나 미끄러지는 느낌이 사라졌다. 이를 통해 게임의 템포가 전반적으로 빨라졌음에도 2:1 패스의 약화와 개인기, 드리블의 약화로 일방적으로 치고 달리는 식의 단순한 축구 게임을 지양한 것도 이번 작품 최고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지나치게 쉬워서 조금만 연습을 한다면 무조건 골로 연결되던 프리킥 시스템에 다양한 변수를 부여해 프리킥 성공률을 낮춘 것과, 페널티 킥 시스템에 '정확도'라는 요소를 부여해 보다 사실적인 페널티 킥의 긴장감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것도 눈에 띈다.
*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비록 그것이 단점이라 할지라도
월드컵 2010은 기본적인 뼈대는 피파 10과 그 궤를 같이 하지만, 거기에 전혀 새로운 살이 붙은 게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뼈대를 옮겨오면서 전작의 불편한 인터페이스를 그대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인터페이스의 디자인은 아프리카 특유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만 디자인적인 면에서 이뤄진 것이지, 기능적인 면에서는 여전히 불편하다. 느린 화면 전환은 물론 게임 중 팀의 포메이션을 유기적으로 변환할 수 없는 점까지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임의 전반적인 부분에 대해 수정이 이뤄졌음에도, 게이머들이 가장 개선을 바라는 부분 중 하나인 인터페이스의 개선이 이뤄지지 않은 것은 매우 아쉽다.
이는 이번 작품의 기본 골격이 피파 10과 동일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설명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제작사가 게이머들에게 자신의 사정을 이해해 주기를 강요하는 모습일 뿐, 게이머들이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이유는 되지 못한다.
또한, 한국 응원가가 갑자기 유럽 팀들의 경기 중에 울려 퍼지거나, 사운드 설정값을 수정해서 저장해도 다음에 플레이 할 때는 기본값으로 돌아가 있는 등의 소소한 버그가 여전히 남아있어 아쉬움을 남긴다.
이외에도 여전히 어시스트 랭킹을 볼 수 없다는 것과, 경기 후 리플레이 장면에서 아무리 많은 골이 들어가도 양팀 통틀어 단 3골의 장면만 보여준다는 것은 반드시 다음 작품에서는 개선해야 할 점이라 할 수 있다.
* 피파 10.5가 아니다. 2010 피파 월드컵이다.
매번 스포츠 이벤트 시즌을 맞아 출시되는 스포츠 게임들은 그 게임의 질을 떠나서 평가절한 받는 경향이 있다. 물론, 분위기에 편승해 쉽게 인기를 얻기 위해 졸속으로 제작되는 함량 미달의 게임들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분위기가 조성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와 과거의 사례들 때문에 평가절하 받게 된다면 월드컵 2010의 입장에선 매우 서운한 일일 것이다. 전작을 개선하고 월드컵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노력한 이 게임은 피파 10의 마이너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정식 시리즈라 불려야 할 훌륭한 완성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월드컵이 한달 여 앞으로 다가온 지금, 축구 팬이라면, 스포츠 게임의 팬이라면 열광할 수 밖에 없는 게임인 월드컵 2010. 이를 통해 앞으로 벌어질 축구 열기를 미리 체험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