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돌아왔다. 배트맨 아캄 시티
지금까지 여러 매체를 통해 수많은 슈퍼 히어로들이 등장했고 여전히 새 슈퍼 히어로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 슈퍼 히어로 홍수 속에서 수 십 년 동안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는 자들이 있다. 슈퍼 히어로들의 대표이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슈퍼맨을 비롯하여 스파이더맨, 그린랜턴, 캡틴 아메리카, 토르처럼 말이다. 그리고 슈퍼 히어로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슈퍼맨과 어깨를 겨루는 자가 있다. 슈퍼맨과 같은 시대에 태어나 동급의 평가 속에서 똑같이 사랑을 받고 같은 수준으로 활약하나 너무나 다른, 슈퍼 히어로계의 그림자 배트맨이다. 슈퍼맨이 낮이라면 배트맨은 밤이라 불릴 정도로 배트맨은 대부분 음지에서 활동한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 받는 영웅이란 요소와 모순적일 수밖에 없지만, 배트맨은 이 모순을 안은 채 수 십 년에 걸쳐 활약하는 수완을 보였고 이렇게 쌓은 개성과 매력이 지금의 배트맨을 만들었다. 물론 여러 팬들의 사랑과 명작들의 뒷받침도 한 몫 했고.


배트맨: 아캄 시티(이하 아캄 시티)의 전작 배트맨: 아캄 어사일럼(이하 어사일럼)은 바로 저런 배트맨의 특징과 개성을 게임이기에 표현 가능한 모습으로 승화시켜서 엄청난 호평을 받았다. 비록 발매 당시엔 경쟁 게임들이 너무 쟁쟁했기에(언차티드2,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2, 어쌔신 크리드2 등) 상대적으로 주목을 못 받았지만, 게임을 직접 해본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어사일럼처럼 배트맨의 개성을 훌륭하게 살리면서 매우 재미있기까지 한 명작 게임이 여태까지 없었단 사실을. 그것도 처음부터 새로 시작한 게임으로서 말이다. 게임을 즐긴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끝날 리 없는 배트맨의 활약상을 기다렸고 어사일럼 발매로부터 2년 후, 드디어 배트맨이 돌아왔다.




어사일럼의 작중 무대인 아캄 수용소 안에서 악당들의 음모를 막았던 배트맨이 이젠 고담시의 범죄자만을 모아 놓은 격리 지역 아캄 시티에 들어가 그곳에서 펼쳐지는 각종 악행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게임에서의 활동 영역이 (스토리 진행상 막힌 곳을 제외하고)오픈월드로 이루어져있어 게이머는 실제 도시를 돌아다니는 느낌을 받는다. 아캄 시티의 넓이만큼이나 해야 할 일도 산더미다. 메인 스토리는 기본이오, 스토리 진행에 따라 생기는 사이드 미션에 수집품과 특정 조건을 만족하는 도전 과제까지 요구하니 게임을 하다가 막막한 심정이 들 때가 간혹 생긴다. 그렇다고 이 콘텐츠들을 무시하자니 게임의 재미를 포기하는 동시에 수월한 게임 진행을 위한 새로운 도구 활용법이나 신체 능력 업그레이드에 필요한 경험치 입수가 힘들어지므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메인 스토리와 함께 다양한 콘텐츠를 만난다. 오픈월드형 게임이 자랑하는 높은 자유도에 쏟아지는 콘텐츠가 만나면 자칫 게임의 방향성이 흐려져 몰입하기가 힘들다. 더욱이 아캄 시티는 버튼 설명 하나 없는 매뉴얼에 최소한의 정보만 제공하는 안내 문구 등 게이머에게 은근히 불친절하다. 만약 제대로 수습할 방도가 없는 게임이라면 엉망진창 망가져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준수한 퀄리티의 한글화와 아캄 시티의 치밀한 게임 구조가 만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세계 최고의 명탐정
****슈퍼 히어로란 간판을 달았지만, 배트맨은 슈퍼한 힘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반대로 신체의 한계를 뛰어난 지혜로 채우는 지적인 영웅이다. 그래서 배트맨의 모든 행동은 탐정모드를 통한 조사, 탐문, 추리에서 시작한다. 아캄 시티에서 배트맨이 사소한 실마리를 놓치지 않고 이것을 따라 사건의 진상에 도달하는 모습은 세계 최고의 명탐정이란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 그리고 이 배트맨의 면모를 게이머가 직접 체험한다. 간편한 조작만으로 배트맨과 함께 새 정보를 도출하다보면 어느새 자기가 직접 배트맨이 되어 추리하고 정보를 모은 느낌까지 든다. 그만큼 직관적이고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단, 조작만 간편하지 게이머가 앞으로 직접 나서야 할 탐정 노릇은 녹록치 않다. 꼭 필요한 정보만 짧게 보여주기 때문에 진행의 상당 부분을 게이머의 머리 회전이 맡아야 한다. 한글화 덕분에 웨인 테크를 비롯하여 게임 곳곳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지만, 그 단서들을 조합해서 각종 도구들을 응용해 게임 진행의 실마리로 만드는 건 결국 게이머 자신이다. 이 특징은 비단 메인 스토리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게임 전체가 게이머의 사고능력을 요구하며 이 수준이 점점 높아진다. 그러면서도 무리한 발상을 요구하진 않아 도전 심리를 자극한다. 게이머의 실력을 시험하는 모범적인 당근과 채찍이다. 물론 가장 큰 당근은 이 과정을 매우 흥미롭게 꾸민 아캄 시티란 게임 그 자체이다.


이렇게 아캄 시티를 진행하여 게임의 엔딩에 도달할 때면 게이머는 또 한 명의 배트맨으로 성장해 있다. 아캄 시티는 엔딩에서 게임이 끝나지 않고 엔딩 이후의 상황으로 남은 사이드 미션을 하거나 레벨업 요소를 이어가서 새로 본편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에 게이머의 실력 향상은 허투루 끝나지 않는다. 특히 엔딩 이후에 가장 많이 맞닥뜨릴 진짜 최종 보스 리들러를 쫓아가면서 그동안의 성과가 제 몫을 톡톡히 해낸다. 세계 최고의 명탐정을 향한 여정이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밤을 지배하는 다크 나이트
배트맨은 슈퍼맨이 아니다. 아무리 최첨단 장비들로 무장했다한들 집단구타, 몽둥이찜질, 날카로운 흉기, 자비심 없는 화기에 안전할 순 없다. 그럼에도 범죄자들이 배트맨을 두려워하는 이유란 간단하다. 공포를 심어주니까. 배트맨은 미지에서 오는 공포를 최대한 활용한다. 기상천외한 장소에서 갑자기 나타나 적을 제압하거나 일격이탈로 동료들을 하나, 하나 줄여가면서 극도의 불안을 유발하는 그 모습은 이미 싸움이 아니라 사냥이다. 아캄 시티는 어사일럼에서 호평을 받았던 테이크 다운이 더 다양해지면서 활용해야 할 상황도 같이 늘어났다. 달리 말하면 정면승부로 대응하기 힘든 경우가 많아졌단 이야기다. 적을 제압하는 경우의 수가 다양하기 때문에 정답은 없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게이머가 처음부터 끝까지 상황에 따라 직접 전략을 짜도록 요구하기 때문에 예시는 있을지언정 가이드라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잠입이나 암살을 주제로 한 게임 경험이 없다면 아캄 시티에서 여러 시행착오를 겪을 것이다. 영화처럼 테이크 다운 후에 적들에게 들키지 않는 경우가 좀처럼 많지 않아 적들을 자기 손아귀에 두기가 힘든 점이 시행착오를 더 부추긴다.


하지만, 여기서 잊지 말자. 배트맨은 암습만으로 다크 나이트란 이명을 얻은 게 아니다. 우수한 신체 능력과 풍부한 전투 경험으로 직접 악당들을 소탕하는 일 또한 배트맨의 주특기다. 테이크 다운보다 위험부담이 높아서 그렇지 아캄 시티에서 배트맨이 직접 나서는 싸움은 테이크 다운과 정 반대의 성격이면서도 게임의 재미를 책임지는 기둥 중 하나다. 간단한 조작으로 효율적인 전투를 유도하여 짜릿함을 선사하는 전투 시스템에 한 번 빠져들면 벗어나기가 힘들다. 연출, 효과음, 조작감 어느 하나 부족한 점을 찾기 힘들며(두 버튼을 동시에 누르는 스페셜 콤보 발동 방법은 개인차가 있을 듯) 갖가지 전투 기술들과 도구들을 사용하여 게이머 자신만의 전투를 이끌어가는 쾌감이 매우 뛰어나다. 특정 조건이나 사용법이 필요한 기술들의 경우 직접 튜토리얼 표기가 나오도록 지정할 수 있어 몸에 익숙해질 때까지 많은 도움을 준다(그래서 튜토리얼 표시 가능한 기술이 딱 하나란 점은 너무나 아쉽다).


그리고 아캄 시티에선 앞의 두 싸움과 전혀 다른 싸움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보스전이다. 아캄 시티에서 벌어지는 보스전들은 마냥 숨으면서 싸워서도 무조건 달려들고 봐서도 안 된다. 소위 말하는 유명 악당들의 전투력은 상상 이상이기 때문에 상대마다 독자적인 공략법이 필요하다. 물론 이 공략법조차 게이머의 몫. 플레이 와중에 짤막하게 나오는 힌트를 발판 삼아 직접 보스 위에 군림해야 한다. 덕분에 보스전 초반엔 시행착오를 겪느라 바쁘다. 하지만, 보스전에 적응해가면서 보스전 특유의 기믹과 다양한 전략이 통하는 전투를 겪다보면 초반에 생겼던 불만이 사라지는 대신 보스전만의 재미에 흠뻑 빠진다. 보스전에서 겪는 시행착오 자체가 앞서 활용했던 게임 테크닉의 발전형이기 때문에 부조리를 느끼긴 힘들다. 게임에서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줬으니 게이머만 잘 하면 문제될 일이 없으니까. 쉽지는 않되 게이머가 핑계를 내밀지 못 하게 만드는 이 밸런스가 아캄 시티의 전투 시스템을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우리~ 자기! On↘ ly→ you↗♪~
슈퍼 히어로의 맞은편엔 항상 악당들이 있다. 배트맨도 예외가 아닌데 이 악당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배트맨이 있었다 할 정도로 개성 많고 매력적이기까지 한 악당들이 배트맨을 상대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배트맨의 영원한 애증관계로 남을 미치광이 악당 조커는 영화, 애니메이션, 소설, 만화 가리지 않고 대활약을 펼치면서 세계 제일의 악당이란 평가까지 받기도 한다. 이미 어사일럼에서 조커를 비롯하여 역대 배트맨 작품에서 등장한 유수의 악당들이 총출동해 배트맨과 함께한 바, 더욱 규모가 커진 아캄 시티에선 전작보다 훨씬 더 많은 악당들이 게임에서 활보한다. 당연히 아캄 시티의 상황은 악화일로. 때문에 배트맨과 게이머는 더 고생할 수밖에 없으나 배트맨 팬들은 전혀 힘들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팬들은 배트맨의 활약만큼이나 그가 상대할 악당들의 활약들까지 바랐으니까. 아캄 시티는 이 바람에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충분히 화답해주었다. 비단 악당들뿐일까, 배트맨의 조력자들도 직간접적으로 등장하여 게이머와 함께한다. 이러한 등장 캐릭터들이 과거 배트맨 작품들의 오마주를 선보이고 많은 팬들이 바라는 전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까지 하니 아캄 시티가 아니라 배트맨 올스타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게임의 이해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전작과의 연계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전작을 경험한 게이머에겐 감회가 새롭다.




한편 게임과 함께 제공하는 캣우먼 DLC는 아캄 시티가 선사하는 새로운 재미를 자랑한다. 캣우먼이 본편에서 적게 등장하고 배트맨과 따로 활동하던 시간을 담은 사이드 시나리오가 짧은 건 확실히 아쉬운 요소다. 그러나 캣우먼만의 개성이 아캄 시티의 시스템에 완벽하게 녹아들어 간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서로를 흉내 낼 수 없는 배트맨과 캣우먼을 아캄 시티란 큰 무대에 같이 올려놓기란 쉽지 않다. 이 난제를 해결해 엔딩 이후 배트맨과 캣우먼을 교대로 조작 가능하도록 한 아캄 시티의 노력은 게임의 재미와 캐릭터 경쟁력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쾌거로 보상받았다. 도전 모드용 DLC로 제공 예정인 나이트 윙, 로빈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상대적으로 배트맨 작품을 만나기가 힘든 국내라 해서 아캄 시티에서 등장하는 설정과 스토리에 고생하진 않는다. 바로 우수한 한글화 퀄리티로 인해 등장인물 해설과 설정을 자세하게 명시한 배트컴퓨터 데이터를 전부 알아볼 수 있기 때문. 작품마다 크고 작은 설정 차이가 생기는 미국 코믹스 특성상 어설픈 배경지식을 알기 보단 아무런 배경 지식 없이 배트컴퓨터 데이터만 읽은 게이머가 게임을 더 쉽게 이해 할 수 있을 정도. 자칫 흘려듣기 쉬운 대화들에서 나오는 깨알 같은 재미들 또한 한글화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 새삼 깨닫게 해준다.
나는 배트맨이다
캐릭터 게임을 평가할 때 캐릭터를 배제하고 평가해야 한단 주장이 있다. 그러나 캐릭터가 있기에 나올 수 있는 캐릭터 게임에서 캐릭터를 배제하는 건 게임의 뿌리를 자르고 평가하잔 주장과 같다. 배트맨 게임인 아캄 시티 또한 배트맨을 빼고 평가할 순 없다. 그리고 설령 배트맨을 빼고 평가하더라도 아캄 시티는 돋보이는 액션성, 치밀한 두뇌 싸움, 긴장감 넘치는 잠입 요소 등 흠잡을 데가 없는 걸작이다. 이런 걸작 게임이 물 흐르는 듯이 흘러가는 스토리를 높은 몰입도와 함께 보여주고 넘치는 즐길 거리와 도전 과제를 준비했으며 게이머의 자유로운 선택권까지 보장하니 다른 게임이 보면 옆에서 치사하다고 불평할 수준이다. 성격이 다른 여러 요소들이 한 데 어우러져도 결코 지루하지 않다는 점에서 더더욱. 이런 게임이 배트맨을 만나 아캄 시티가 되었다. 그러니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과 배트맨을 좋아하는 사람 모두에게 찬사를 받는 건 당연하다. 이것이 아캄 시티가 앞으로 꾸준히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거란 확신이 드는 이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