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로 재현된 90년대 J-RPG의 열기, 파이날 판타지 시리즈
롤플레잉게임을 분류할 때 흔히들 서양식 RPG와 동양식 알피지, 통칭 J-RPG로 구분하고는 한다. 자유도를 강조하기 보다는 다양한 성격을 지닌 캐릭터와 제공되는 스토리를 따라 선형적으로 진행되는 특성을 지닌 J-RPG는 특히 1980~90년대에 게이머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다양한 J-RPG가 인기를 얻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두각을 드러낸 것은 단연 현 스퀘어에닉스의 전신인 스퀘어와 에닉스의 파이날 판타지 시리즈와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였다. 드래곤 퀘스트는 일본의 국민게임이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로 일본 내에서 큰 인기를 얻었으며, 파이날 판타지는 일본은 물론 북미 시장에서도 높은 인지도를 확보하며 J-RPG의 대명사가 됐다.
최근 국내 모바일게임 시장에는 1980~90년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파이날 판타지 시리즈가 다시 한 번 조명을 받으며 모바일게임 시장에 불고 있는 레트로 열기에 힘을 싣고 있다. 슈퍼패미컴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파이날 판타지6가 최근 iOS와 안드로이드 버전으로 국내 시장에 정식으로 출시되며 당시의 향수를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파이날 판타지6가 출시되면서 국내 모바일게임 시장에는 2D 그래픽으로 출시됐던 파이날 판타지의 정규 시리즈가 모두 출시된 상황. 과거를 기억하는 레트로 마니아들에게는 다시 한 번 향수를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셈이고, 당시를 기억하지 못 하는 이들은 최신 기술로 새롭게 변화한 고전 명작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셈이다.
지금이야 J-RPG의 대명사가 된 파이날 판타지 시리즈지만 처음부터 큰 인기를 얻었던 것은 아니다. 1987년에 발매된 파이날 판타지1은 1986년에 발매된 드래곤 퀘스트를 다분히 의식한 작품으로 큰 인기를 얻지는 못 했다. 다만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드래곤 퀘스트의 스토리 진행과 전투와는 달리 3인칭 시점, 사이드뷰를 채택한 시리즈의 정통을 만들었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그리고 또 하나. 파이날 판타지 시리즈를 떠올리면 연상되는 몽환적인 테마 음악은 파이날 판타지1부터 사용됐다. 우에마츠 노부오가 작곡한 이 곡은 오랜 시간에 걸쳐 시리즈가 진행됨에도 파이날 판타지 시리즈를 대표하는 곡이 됐다.
파이날 판타지2는 1편보다 발전된 시스템을 갖추고 1988년에 출시됐다. 게임이 시작하자마자 주인공 전원이 사망하는 당시 게이머들에게는 충격적인 오프닝으로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다. 또 하나, 파이날 판타지2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아주 높은 난이도로, 이 때문에 게이머들은 반복 전투를 하며 캐릭터의 레벨을 높이는 데 주력해야 했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RPG의 기본 개념이라 할 수 있는 레벨 시스템이 없는 대신 숙련도 시스템이 도입됐다. 흥미로운 것은 게이머의 행동 하나하나가 캐릭터의 스탯과 연동이 된다는 점으로, 게이머가 물리 공격을 선택하면 캐릭터의 힘이 높아지고, 마법을 활용하면 주문력이 올라가는 식이었다. 이를 활용해 자기 자신에게 공격을 퍼부어서, 공격력과 체력을 동시에 높이는 자학적인 플레이를 하는 이들도 많았다.
파이날 판타지1, 2가 시리즈의 기초를 다지는 역할을 했다면, 파이날 판타지3는 그 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990년에 출시된 이 작품은 기존 두 작품보다 더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며 게이머들에게 파이날 판타지의 존재를 알린 작품이다. 까다로운 숙련도 시스템 대신 누구에게나 익숙한 레벨 시스템이 도입됐으며, 패미컴의 성능을 최대한 활용한 그래픽도 인상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파이날 판타지3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단연 ‘잡 체인지’ 시스템이다. 플레이 중에 획득하는 다양한 직업을 자유롭게 바꿔가면서 게임을 즐길 수 있으며, 각각의 직업은 자신만의 특징적인 기술을 갖추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또한 이런 기술은 단순하게 ‘이런 것도 있다’는 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던전을 클리어 하기 위해서는 특정 기술을 반드시 사용하도록 유도하는 특징도 있었다.
1991년에 출시된 파이날 판타지4는 슈퍼패미컴으로 출시된 최초의 파이날 판타지 시리즈다. 8비트에서 16비트로 플랫폼이 바뀐 만큼 빼어난 그래픽을 과시한 게임으로, 시리즈 최초로 액티브 타임 배틀 시스템이 도입된 것이 특징이다.
액티브 타임 배틀은 턴제 전투에서도 RTS에서 느낄 수 있는 긴박함을 전달하기 위해 개발된 시스템으로, 아이템을 선택하고 캐릭터의 동작을 선택하는 와중에도 실시간으로 시간이 흘러 적들의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플레이 경험을 선보였다. 느긋하게 행동을 선택하다가 자칫하면 전멸할 수도 있는 여지를 준 이 시스템은 당시 게이머들에게 획기적이라는 반응을 이끌어 내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또한 시리즈 최초로 캐릭터마다 고정된 직업이 정해지기도 했으며, 난이도가 무척이나 높았던 것으로 악명 높은 시리즈이기도 하다. 너무나 어려운 난이도 때문에 게임의 난이도를 낮춘 ‘이지 타입’이 별도로 발매될 정도였으니, 게임의 난이도를 추론할 수 있다.
이듬해에는 파이날 판타지5가 출시됐다. 역대 최고의 파이날 판타지 시리즈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지목되는 이 작품은, 3편의 ‘잡 체인지’ 시스템을 가다듬어서 부활시킨 작품이다. 전작의 액티브 배틀 시스템은 5편에도 활용 됐으며, 전작보다 유머러스한 이벤트가 많이 발생했던 시리즈이기도 하다.
시스템적인 요소 이외에도 파이날 판타지5는 시리즈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파이날 판타지 시리즈의 아버지라 하는 사카구치 히로노부가 개발자로 참가한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며, 처음으로 300만 장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리즈를 기점으로 전세계 판매량에서 파이날 판타지는 드래곤 퀘스트를 추월했다.
1994년에 발매된 파이날 판타지6는 2D 그래픽으로 개발된 최후의 파이날 판타지 시리즈이며, 슈퍼 패미컴의 성능이 완벽하게 사용된 게임이다. 게임 중반에 맞이하게 되는 오페라 이벤트나 마대륙 이벤트는 지금까지도 게이머들 사이에서 회자될 정도로 충격적인 연출을 자랑했다.
게임의 스토리를 풀어가는 방식도 화제가 됐다. 파이날 판타지6에는 다양한 개성을 지닌 캐릭터들이 존재하지만, 주인공이 따로 없이 이야기가 진행된다. 모두가 각자의 이야기를 지니고, 그 이야기를 풀어가는 와중에 게이머들은 엔딩을 향할 수 있었다. 때문에 자신이 애정을 가진 캐릭터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게이머들이 많았고, “진정한 파이날 판타지6의 주인공은 누구냐”는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던 시리즈다.
마석을 활용해 모든 캐릭터가 다양한 마법을 배울 수 있어 게이머의 입맛대로 캐릭터를 육성할 수 있어 여러 차례 플레이를 유도하기도 했다.
숨겨진 이벤트가 상당히 많으며, 자유도 역시 당시 게임들의 수준을 생각하면 제법 높은 편이다. 게이머의 판단에 따라 동료를 희생시킬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동료를 거의 모으지 않고 엔딩을 볼 수도 있다. 이에 따라서 엔딩이 달라지는 멀티 엔딩 요소를 차용했다는 것도 당시에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가격에 얽힌 흥미로운 에피소드도 있다. 파이날 판타지6는 발매 당시 11,400엔의 가격으로 출시됐다. 게임 역사를 통틀어 파격적인 정도로 높은 소프트웨어 가격을 자랑했고, 때문에 많은 이들이 게임 출시 전에 반발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또한 기존의 파이날 판타지 시리즈와 사뭇 다른 느낌을 전달하면서 시리즈가 발전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 작품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전통적인 판타지 세계관이 아닌 스팀 펑크가 접목된 세계관을 차용한 덕분에 전통적인 J-RPG에 익숙한 이들이 적응하지 못 하기도 했다. 이러한 세계관은 추후 플레이스테이션으로 발매된 파이날 판타지7에도 이어졌기에, 일각에서는 파이날 판타지 시리즈를 6, 7편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