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인간의 차이, 다른 그리고 또 같은 '문명'을 만들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 턴만 더"를 되뇌고, 한 번 켜는 순간 타임머신을 탄 듯한 착각에 빠져버리는 게임이 있다. 세계 3대 악마의 게임이라 불리며 "문명 하셨습니다"라는 신조어와 게임 내에서 '패왕'에 견줄만한 모습을 보여주는 간디의 "유혈사태" 대사로 수많은 패러디를 만들어낸 시드마이어의 문명' 시리즈다.
1991년 첫 등장한 '문명'은 600만 장이라는 어마어마한 판매량을 기록하며, 전세계 시뮬레이션 게임을 즐기는 게이머를 사로 잡았다. 이후에도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꾸준히 성공을 거듭해온 '문명' 시리즈는 휴대용 게임기나 모바일게임 시장에도 진출한 것은 물론 지난 12월 2일 공개 서비스를 개시한 '문명 온라인'과 함께 온라인 시장까지 그 마수를 뻗쳤다.
시드마이어라는 세계적인 개발자가 2K라는 거대 회사와 함께 '문명'의 온라인게임을 위한 파트너로 함께한 곳은 한국 MMORPG 아버지인 송재경 대표의 엑스엘게임즈다. 물론 이면에는 사업적인 이슈와 복잡한 배경 사정도 있지만, PC 패키지 게임 시장과는 확연히 다른 온라인게임 시장이기에 한국형 MMORPG의 틀을 마련하고, 전세계 MMORPG 시장에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한 송재경 대표의 온라인게임 대한 감각을 높이 샀을 것이란 추측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시드마이어와 송재경이라는 두 거장의 만남 이후, 2010년부터 '문명온라인'을 개발해온 엑스엘게임즈는 2011년 공식적으로 '문명' IP를 활용한 온라인 MMO게임을 개발 중이라 밝혔다. 게이머들은 '문명' IP를 활용한 온라인게임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는 동시에 우려의 목소리도 냈다. 턴 기반의 시뮬레이션 게임이 온라인 MMO게임으로 변화하는 것에 대해 쉽게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성공한 게임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겠다. 2000년 등장한 코에이의 '삼국지 인터넷'은 시기상의 문제도 있었지만 턴제에 너무 매달리다 보니 시간제한이라는 개념이 생겨 게임의 깊이를 떨어뜨리는 문제를 야기했다. 이후 이를 갈아 만든 MMORPG '삼국지 온라인'은 말할 것도 없이 분명 코에이가 들추고 싶지 않은 흑역사다.
하지만 엑스엘게임즈가 '문명 온라인'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앞선 사례와 다르다. 시장의 기대와 우려가 섞인 시선에도 불구하고 엑스엘게임즈는 5년여라는 기간 동안 여러 차례의 테스트를 거치며 '문명 온라인'을 시장에 성공적으로 출시했다. 그리고 '문명 온라인'은 '문명'이 가진 다양한 국가가 치열하게 펼치는 경쟁의 재미, 기술을 개발하고 불가사의를 건설 하는 등 게이머 자신이 문명의 개척자가 되는 재미를 그대로 살려냈다. 게이머마다 개인적인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게임의 승리에서 오는 성취감은 더욱 클 수 있도록 준비했다. 혼자 플레이하는 '문명'을 넘어 게이머 모두가 함께 힘을 모아 승리로 나아가는 온라인게임다운 재미와 '문명'이라는 게임이 가진 다양한 특성이 게임 내에 그대로 녹아 있기 때문이다.
'문명 온라인'이 기존 '문명'의 재미를 게임에 고스란히 담아내면서도 온라인게임다운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개발자, 즉 시드마이어와 송재경 대표가 게임을 개발하며 무게를 둔 시선의 차이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시선 차이는 '문명 온라인'이라는 또 다른 '문명'이 탄생하는 동시에 '문명' 본연의 재미를 가진 '문명'이 탄생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시드마이어의 '문명' 시리즈는 게이머가 적어도 자신의 문명에서만큼은 전지전능한 신의 입장에서 게임을 진행한다. 게이머는 마치 신이 된 것처럼 자신의 문명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 간단한 채집 명령부터 전투, 외교까지 이 영역에는 게이머 말고는 다른 인간이 존재할 틈이 없다. 게이머를 방해하는 것은 다른 국가나 문명의 인공지능(A.I) 뿐이다. 문명 내에서 게이머를 거스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게이머는 본인의 계획과 선택에 따라 게임을 플레이 하면 된다.
하지만 '문명 온라인'은 다르다. 시드마이어의 '문명'이 전지적인 신의 관점이라면 송재경 대표의 엑스엘게임즈 '문명'은 인간, 즉 게이머 한 명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게이머는 자신이 속한 문명의 시민으로 게임을 플레이 한다. 문명 내 도시의 시장도 될 수 없으며, '문명 온라인' 내에 마련된 '점령 승리', '문화 승리', '과학 승리'의 조건을 혼자서는 절대 달성할 수 없다.
그리고 '문명 온라인'은 이미 짜인 계획이나 게임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오피니언 리더 한 두 명의 선택만으로 게임이 흘러가지 않는다. 어떤 이는 기술을 개발하며 문명의 발전을 논하고 어떤 이는 전쟁을 외치면서도, 문명이 승리할 수 있는 최선의 수를 마련하기 위해 뜻을 모아 함께 선택해 나간다. 단순히 혼자 모든 것을 선택하고 독단하는 독재자의 모습이 아니라 뜻을 모아 함께하며 이상을 만들어 나가는 우리 내 삶의 모습과 흡사하다. 개발사는 게임이라는 놀이터를 제공하고 게이머들이 게임을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송재경 대표의 개발 철학과 게임은 흥미로운 선택의 연속이라는 시드마이어의 게임에 대한 정의가 절묘하게 모두 녹아있다.
시드마이어의 '문명'과 송재경 대표의 '문명 온라인'은 전지적인 신의 시점에서 게임을 진행하느냐 아니면 한 개인의 시점에서 게임을 진행하느냐의 차이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둘의 시점 차이에도 불구하고 '문명 온라인'에는 둘 모두의 철학이 담겨 있다. 여전히 게임에는 기존의 '문명'이 가진 역사의 흐름의 한 가운데에서 선택을 이어가는 재미가 그대로 구현돼 있으며, 함께하는 재미도 있다. 신과 인간이라는 관점 차이가 또 다른 '문명' 하지만, 또 같은 '문명'을 동시에 만들어 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