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과학의 인간찬가. 슈타인즈 게이트

다량의 텍스트와 이것을 묘사하는 스탠딩 CG 및 이벤트 CG가 플레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요즘 세간엔 '비주얼 노벨'이라고도 부르는 텍스트 게임의 경우 우리나라에서는 오랜 역사를 가진 동시에 거의 빛을 보지 못 한 모순적인 장르다. CG를 도트로 찍던 초창기 PC통신 시절부터 알 사람은 다 알던 성인용 게임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갔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음지에서 성행한 불법 게임 이용. 그사이 간간히 양지로 고개를 내밀던 텍스트 게임은 처참한 흥행 성적으로 대한민국 게임 시장에서는 자취를 감추기 일쑤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다시는 안 올 것 같은 PS2 황금기 때조차 EVE Burst Error나 진구지 사부로 시리즈인 Innocent Black와 KIND OF BLUE, 시라츄 탐험부 같은 텍스트 게임들은 한글화 퀄리티와 관계없이 맥을 못 추었고. 그러다가 이윽고 전성기가 끝나 대한민국 콘솔 시장은 한글화는 고사하고 정식 발매부터 걱정해야 하는 현실에 이르렀는데 이 타이밍에 텍스트 게임이 정식 발매, 그것도 디지털터치에서 현지화까지 발표하여 좌중을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진짜 열렸다. 텍스트 게임의 새 지평을 연 '운명석의 문' 슈타인즈 게이트가.

슈타인즈 게이트 스크린샷
슈타인즈 게이트 스크린샷

Steins;Gate(슈타인즈 게이트. 이하 슈타게)는 2009년 10월 XBOX360용으로 처음 선보인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이다. 발매 후 대중적인 인기와 전문가들의 평가 모두 높은 점수를 받았고 이를 바탕으로 소설, 애니메이션, 극장판, 라디오, 드라마CD 등 다방면 미디어 믹스 전개와 PC, PSP, PS3, PS VITA, IOS, 안드로이드 등등 팬, 안티 할 것 없이 혀를 내두르는 무차별 이식 폭격을 펼쳐 제작사 5pb.의 철밥통으로 자리 잡았다(공동 개발한 니트로 플러스의 경우 유통, 홍보 및 일부 시나리오에 협력하여 그다지 부각되지 않는다). 저 행보 중 PS3용 이식은 2012년 5월 PS VITA용 이식은 2013년 3월이 이루어졌으며, 이번에 정식 발매한 PS3용, PS VITA용 슈타게 역시 이것을 기반으로 현지화 작업을 거쳤다.

단순히 비교하면 늑장 발매처럼 보이지만 애초에 대한민국에 들어올 가망이 없었던 작품인 만큼(현지화 하면 67만장 사겠단 허세가 괜히 나왔겠는가) 여기에 대해선 누구도 불평할 수 없다. 정식 발매에 앞서 슈타게 애니메이션이 애니플러스를 통해 국내 전파를 탔고 IOS용 슈타게가 현지화를 거쳐 소개되었는데 전자는 원작과 비교하여 자비 없는 편집이, 후자는 그래픽은 방치하고 텍스트만 현지화를 마친 미완성이란 문제점이 있으니 슈타게를 제대로 경험할 수 있는 귀한 기회인 이번 PS3, PS VITA용 정식 발매는 정말 감지덕지해야 할 일이다.

슈타인즈 게이트 스크린샷
슈타인즈 게이트 스크린샷

본편을 살펴보자면 일단 장르가 장르이다 보니 CG와 스토리에 많이 의존하기에 슈타게가 어떤 게임인지 적으려 해도 스토리 누설이 걸리지, 스크린샷 올리려니 그럴듯한 이벤트 CG는 중요 누설이 되기 십상이라 매우 난감하다. 모 산수유 제품 광고처럼 "이거 참 좋은데 뭐라 표현할 방법이 없네". 다만 명심해야 할 점은 슈타게가 내용을 미리 알아버린다고 재미가 팍 식어버리는 반전에 치중한 작품이 절대 아니란 사실이다. 누설은 어디까지나 최대 기대치일 뿐. 누설 정도에 재미가 사라진다면 발매 후 4년이 지나도록 게이머들 입에 오르내리겠는가. 슈타게를 시작하는 게이머들이 "5장까지만 어떻게든 진행하라.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중에서 게임의 절반인 발단이 지루해서 그렇지 나머지는 일사천리다"란 말을 심심치 않게 듣는 이유이다.

슈타인즈 게이트 스크린샷
슈타인즈 게이트 스크린샷

그리고 슈타게를 시작하는데 있어 진짜 장벽은 대한민국에서는 너무나 생소한 캐릭터 개성들이다. 서브컬처라고 설명하기엔 너무나 좁고 깊은 이른바 '이 바닥'에서 온갖 캐릭터들을 다 만나 내성 내지는 내공이 쌓인 게이머, 이미 애니메이션이나 입소문을 통해 얘들이 어떤 캐릭터라든가 왜 이러는지 대충 파악 끝난 게이머가 아니라면 게임 시작 후 나타나는 캐릭터들의 언행에 기겁하기 쉽다. 각자 사정이나 설정이 있다지만 아무 준비 없는 게이머가 3인칭+입버릇을 구사하는 히로인이나 공상허언 내지는 과대망상 환자처럼 보이는 주인공, 스테레오 타입 오타쿠, 성호르몬 장애가 있는 남고생, 의존증이 심각한 독신 여성, 컨셉종자 메이드를 좋아할 수 있을까? 그래서 한글 텍스트 게임이란 정보와 그럴 듯한 패키지 문구만 보고 슈타게를 시작했다가 30분 감상, 2시간 감상 딱지 붙이며 혹평하는 게이머가 나타나는 건 대한민국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본다.

슈타인즈 게이트 스크린샷
슈타인즈 게이트 스크린샷

대신 우여곡절 끝에 5장까지 마무리하고 절반까지 달려오면 그 다음은 일사천리. 터닝 포인트의 시작이다. 슈타게의 청소년 이용불가 게임 등급, 선정성, 폭력성 마크가 이때부터 본색을 드러내 게임의 분위기를 180도 바꾸기 때문. 아키하바라에서 작고 이상한 발명 서클을 이끌던 대학생이 세상을 상대로 세계급 규모의 음모가 들끓는 혼돈의 미래를 막기 위해 처절하게 발악하고 고군분투하며 조금씩이지만 분명히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과 그 과정들은 5장까지 게이머가 봐왔던 그 캐릭터 맞나 싶을 정도다. 그렇다고 캐릭터가 무너져 개연성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5장까지 조금씩 물밑에서 쌓이던 복선과 암시들이 빅뱅을 터트린 결과라 게이머는 홀린 듯이 나머지 스토리를 따라잡기 위해 전력질주 할 수밖에 없다. 여기부터가 스토리의 진짜 핵심이라 더는 적을 수 없지만 주인공의 고뇌, 선택과 희생, 결실에 이르기 까지 일련의 과정이 게이머를 실망시키지 않는다고 자신한다.

슈타인즈 게이트 스크린샷
슈타인즈 게이트 스크린샷

슈타게의 핵심 시스템인 '폰 트리거' 역시 이러한 슈타게의 분위기를 잘 반영하고 있다. 폰 트리거는 게임 진행 중 휴대폰 사용에 따라 스토리 분기가 발생하거나 게임 내용에 변화가 생기는 시스템으로 텍스트 읽는 것을 제외하고는 게이머가 조작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치이다. 이 폰 트리거는 스토리에서 반드시 사용하는 D메일을 제외 하고도 여러 번 사용할 수 있는데 5장까지의 경우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거나 일상에서의 소통을 주로 다루는 반면에 5장 이후로는 긴급 통신이나 스토리 안에서 매우 중요한 장치로 활용된다. 실질적인 역할 또한 구분되어 있어 5장까지는 휴대폰에 사용 가능한 벽지, 벨소리 획득과 트로피 달성에 쓰는 게 대부분이고 5장 이후로는 엔딩을 결정하거나 특정 루트 진입을 위한 사전 준비(이건 5장 이전에서도 꾸준히 준비해야 하지만)를 위해 사용한다. 여타 텍스트 게임처럼 단순히 화면에 나타나는 선택지를 고르는 방식을 멀리하고 게임 안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휴대폰'이란 장치를 통해 필수 기능부터 소일거리까지 다방면으로 활용하여 게임의 몰입도를 높였단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답문을 보낼 때 한 번 키워드를 선택하여 답장 내용을 확인하면 뒤로 물릴 수 없는 점은 좀 아쉽지만.

슈타인즈 게이트 스크린샷
슈타인즈 게이트 스크린샷

한편 현지화를 거친 작품인 만큼 그 퀄리티에 대해 걱정이 많은 게이머들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그동안 현지화 역사들을 보면 복불복이 많았으니 그 노이로제도 당연지사. 그러나 슈타게에는 어울리지 않는 걱정이다. 모자란 번역이나 오타는 보이지 않을 뿐더러 CG로 등장하는 활자들과 게임 안에서 이용하는 사이트의 활자까지 전부 한글로 나오기 때문에 언어 문제로 슈타게를 즐기지 못 하는 불상사란 있을 수 없다. 단순히 내용을 옮긴 것만이 아니라 용어 설명인 TIPS 내용 중 우리나라에서 쓰지 않거나 이해하기 힘든 일본의 인터넷 은어는 적당한 우리나라 인터넷 용어로 바꾸어 이해를 돕고 있어 현지화를 위해 디지털터치가 얼마나 성의를 가지고 준비했는지 알 수 있다. 오히려 2009년 당시 아키하바를 중심으로 유행했거나 이전부터 전통적으로 다루던 패러디 소재나 '과학 어드벤처 시리즈'라 하여 세계관을 공유하는(슈타게는 해당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이다) 전작 '카오스 헤드 시리즈' 관련 소재들이 이해를 방해하고 있으며 이 부분은 현지화 가지고 감당할 수 없는 문제이니 어쩔 수 없다. 기동전사 건담이나 스타워즈, 메탈 기어 솔리드처럼 일본에서 유명한 패러디 소재도 대한민국에서는 생소한 내용인데 팬티 아니라 우기는 모 애니메이션이나 카오스 헤드 시리즈의 주요 사건까지 전부 포섭하지 못 한 것에 불만을 품는 건 부조리한 처사다.

슈타인즈 게이트 스크린샷
슈타인즈 게이트 스크린샷

슈타게를 비판하고 싶으면 차라리 퍼포먼스에 대해 걸고넘어지는 것이 타당하다. PS3용 슈타게의 경우 데이터 인스톨이 없기 때문에 음성이나 CG 데이터를 디스크로부터 읽어 오기까지의 아주 짧은 딜레이 발생은 물론이오, 이미 읽은 내용이나 지루한 부분을 넘기기 위해서 강제 스킵 기능이라도 사용하는 날엔 데이터를 읽기 위해 나이트클럽 DJ마냥 가차 없이 디스크를 긁어대는 PS3의 소음을 영접할 수 있다. 제품 보증기간이 남은 게이머면 몰라도 처음 발매한 CECH-L00 모델이나 CECH-2000 모델처럼 제품 보증기간은 이미 끝나고 렌즈 수명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의 게이머로선 렌즈 수명 문제 때문에 BD 영화 하나 돌리기 겁나는 마당에 이만한 공포가 따로 없다. 그래서 렌즈 걱정 없이 어디서나 즐길 수 있는 PS VITA용 슈타게가 PS3보다 더 끌릴 수밖에 없다. PS VITA의 화면 크기 문제로 글씨가 PS3용보다 잘 안 보인다는 문제가 제기되곤 하는데 기계 수명을 깎는 문제에 비할까.

슈타인즈 게이트 스크린샷
슈타인즈 게이트 스크린샷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타게는 PS3, PS VITA가 있다면 반드시 추천하고 싶은 명작이다. 즉, PS3 게이머에게는 기계 수명이란 리스크를 감안하더라도 플레이 할 가치가 있다는 이야기다. 4년 넘는 시간을 뛰어 넘어 현지화란 투자까지 거치고 정식발매가 이루어진 그 이유를 직접 확인해 보고 싶지 않은가. 특히 텍스트 게임을 그저 강제 스킵으로 트로피 따는 용으로만 취급하는 게이머들이에겐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다. 슈타게를 하자. 두 번 하자.

슈타인즈 게이트 스크린샷
슈타인즈 게이트 스크린샷

게임동아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Creative commons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의견은 IT동아(게임동아) 페이스북에서 덧글 또는 메신저로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