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준의 게임히스토리] 고담의 수호자 다크나이트, 그 오랜 게임의 역사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작가들의 손 끝에서 탄생한 미국 코믹스(만화) 속 히어로들 중 오랜 시간 꾸준히 전세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정의의 아이콘이 된 캐릭터가 있다. 바로 다크히어로의 상징이자, 매 번 반복되는 리부트 속에서도 그 위엄을 잃지 않고 있는 고담 시의 수호자 배트맨이 그 주인공이다.
어떤 작가가 작품을 그리느냐에 따라 캐릭터의 설정과 생김새 그리고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는 미국 코믹스의 특성상 하나의 캐릭터가 오랜 시간 동안 인기를 누리는 것은 드문 일이다. 하지만 배트맨은 처음 모습을 드러낸 1939년 이후 매번 새롭게 탄생되고 재해석되며, DC 코믹스의 간판 히어로로 자리잡고 있다.(여담이지만 라이벌 마블 코믹스의 간판은 스파이더맨)
배트맨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은 바로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정체성이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총격에 사망한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본 브루스 웨인이 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범죄와 싸우겠다는 결의를 다짐하고, 낮에는 '바람둥이 백만장자', 밤에는 밤의 기사(다크나이트) 배트맨으로 활약하며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서는 다크히어로의 모습을 유감없이 선사한다.
특히, 우연히 슈퍼파워를 가지게 되거나 태생적으로 강한 다른 영웅들과는 달리 과연 사람 사는 곳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범죄가 넘처나는 고담시에서 오로지 '인간'으로써 악당(빌런)들과 맞써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물론 '돈'이라는 초인적인 무기로 '뱃신'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단순한 악당이 아닌 독특한 악행을 저지르는 악당들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목숨을 담보로 하는 수수께끼를 선보이는 '리들러', 외모가 다르다는 이유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거물 '펭귄', 명석한 두뇌와 약물을 통해 신체를 강하게 만드는 '베인' 등 초능력이 아닌 다양한 방식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악당들이 등장해 배트맨을 곤경에 처하게 한다.
특히, 배트맨의 숙적이자 역대 최고의 악당 부분에서 부동의 1위로 손꼽히는 '조커'는 언제나 웃는 얼굴로 파괴와 살인을 일삼으며 배트맨과 위험한 게임을 즐기는 사이코패스의 모습을 선보여 이후 등장하는 수 많은 캐릭터들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정의를 위한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생기는 인간적인 고뇌와 선과 악을 오가는 정체성 그리고 막강한 재력을 통해 등장하는 수 많은 장비과 매력적인 악당들까지 배트맨은 단순히 코믹스 속 영웅으로 남기에는 아까운 캐릭터였고, 곧 다양한 영화와 애니메이션 심지어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재 창조되어 많은 인기를 얻기도 했다.
이중 영화로 창조된 배트맨은 1980~90년대 '팀 버튼' 그리고 2000년대 다크나이트 시리즈의 '크리스토퍼 놀란' 등 세계적인 감독의 연출로 각색되어 '영웅 그 이상'을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재탄생하기에 이른다.(영웅을 소재로 한 영화가 오락성이 아닌 작품성으로 인정받은 사례는 극히 드물다)
이 같은 모습은 게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양한 장비를 사용하며 악당을 상대하는 배트맨은 초능력을 지닌 다른 영웅들보다 캐릭터화시키기 좋은 소재였고, 범상치 않은 능력을 지닌 매력적인 악당들 역시 다양한 패턴을 지닌 보스 캐릭터로 등장시킬 수 있어 배트맨은 오래전부터 다양한 장르의 게임으로 등장해 게이머들에게 색다른 매력을 선보였다.
배트맨이 최초로 등장한 게임은 바로 1986년 2세대 게임기로 불리는 '암스트라드 CPC'와 8비트 컴퓨터 'MSX'로 출시된 '배트맨'이었다. 배트맨의 사이드킥(조수) 로빈이 조커에게 납치당하자 이를 찾아 나서는 모험을 다루고 있는 '배트맨'은 방과 방사이를 오가며 단서를 찾고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일종의 어드벤처 장르의 게임이었다. 특히, 이 게임은 다양한 혁신적인 방식을 도입한 게임이기도 했는데, 단순히 좌우 혹은 위아래로 움직이던 기존의 게임 플레이에서 벗어나 사선으로 이동할 수 있었으며, 게임 중간 자동으로 저장되는 '체크 포인트' 시스템을 최초로 도입한 게임이었다. 지금의 게임에서 흔히 사용되는 체크 포인트 시스템의 조상님 격인 게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첫 작품 이후 배트맨을 소재로 한 게임은 큰 전환기를 맞게 된다. 바로 '팀 버튼' 감독의 영화 '배트맨'이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팀 버튼 특유의 '성인동화' 식으로 해석된 배트맨은 영웅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며 큰 흥행을 거뒀고, 이런 인기를 등에 업고 등장한 게임이 바로 1989년 패미컴(북미명 NES) 버전으로 발매된 '배트맨 더 무비'였다.
영화의 주인공 마이클 키튼이 캐릭터로 등장하는 '배트맨 더 무비'는 갈고리, 배터랑 등의 무기와 도구를 통해 적을 처치해 나가는 횡스크롤 액션 게임이었다. 아울러 게임 중간 등장하는 배트카를 활용한 액션 그리고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갈 때 들리는 낮은 저음의 'I'm BATMAN' 대사는 게임의 흥미를 더해주기도 했다.(이 게임은 유난히 한국 게이머들에게도 친숙한데, 바로 한 에뮬레이터의 기본 게임롬으로 수록되어 있어 많은 이들이 '배트맨'이라는 이름에 이끌려 플레이해보기도 했기 때문)
'배트맨 더 무비'는 큰 성공은 거두지는 못했지만, 액션 장르로서의 배트맨 게임에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이후 배트맨의 판권을 지닌 일본의 제작사들이 앞다투어 배트맨을 소재로 한 게임을 선보이게 된다. 하지만 영화의 인기를 등에 업고 등장한 게임들은 완성도가 낮을 수 밖에 었었고, 닌자가 배트맨과 대결한다는 '황당무계한' 소재의 게임이 등장하는 등 그야말로 찍어내기 수준에 불과한 작품들이 쏟아지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전환 시킨 것이 바로 1991년 패미컴(NES)으로 등장한 '배트맨: 조커의 귀환'이었다. 기존의 앞으로 나가기 식의 액션 횡스크롤 장르에 갈고리총, 배터랑 등을 활용한 퍼즐을 도입한 '배트맨: 조커의 귀환'은 뛰어난 레벨 디자인과 극악한 난이도의 스테이지 구성 그리고 원작의 악당들을 중간 보스로 등장시켜 게임의 몰입도를 더하기도 했다.(실제로 이 게임은 북미 게이머들에게 NES로 등장한 게임 중 BEST로 선정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특히, 이전 게임에서 단순히 최종보스로만 등장하던 조커를 게임 전면에 내세워 그 특유의 광기와 배트맨에 대한 집착을 잘 표현해내 게이머와 원작 팬들의 지지를 함께 얻어내기도 했다. 때문에 '배트맨: 조커의 귀환'은 배트맨 게임 중 처음으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둠과 동시에 게임성을 인정받은 최초의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큰 성공을 거둔 '배트맨: 조커의 귀환' 이후 배트맨 소재의 게임은 단순히 영화의 인기를 등에 엎은 시기성 게임이 아닌 원작 코믹스에 기반을 둔 게임으로 탈바꿈하여 등장하기 했고, 1994년 세가에서 선보인 액션 게임 '배트맨 & 로빈의 모험'을 통해 배트맨은 게임 캐릭터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원작 코믹스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게임 배경과 배트맨과 로빈을 오가며 펼쳐지는 액션 플레이 그리고 다양한 패턴의 보스전까지 '배트맨 & 로빈의 모험'는 그야말로 완성도 높은 오락실 액션 게임으로 탈바꿈했고, 원작 팬들뿐만 아니라 게임성에 이끌린 게이머들에게도 큰 호평을 받았다.
2000년 밀레니엄과 함께 다가온 3D의 시대. 폭풍처럼 불어닥치던 3D 바람을 영웅을 소재로 한 게임들도 피해갈 수 없었고, 이에 다양한 장르의 게임들이 3D로 탈바꿈하여 출시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2000년대 초 등장한 히어로 소재의 게임들은 그야말로 형편없는 수준의 게임성을 선보이며 연이어 게이머들을 실망시켰다.(역대 최악의 게임으로 꼽히는 닌텐도64의 슈퍼맨과 아쿠아맨도 바로 이때 등장했다) 배트맨 소재의 게임도 이와 마찬가지로 몇몇 작품을 통해 게이머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러던 2001년 등장한 '배트맨: 밴전스'는 '영웅 소재의 게임은 수준이 떨어진다'는 편견을 깨트리며 배트맨 게임에 다시 한 번 활력을 불어넣었다. 유비소프트에서 개발하여 Xbox와 플레이스테이션2(PS2)으로 등장한 이 게임은 거대한 도시 고담에서 벌어지는 악당들의 음모를 분쇄하는 모험을 다룬 수준 높은 시나리오를 다루고 있는 것은 물론, 애니메이션의 성우들을 대거 등장시켜 게임의 몰입도를 높였다.
때문에 '배트맨: 밴전스'는 불편한 조작과 산재한 버그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시나리오로 좋은 반응을 얻었으며, 이후 등장하는 배트맨 게임에 유명 성우가 등장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이는 2008년 출시된 '레고:배트맨'에도 그대로 적용됐으며, 레고 게임 특유의 익살스러운 게임성과 함께 저연령층도 쉽게 몰입할 수 있는 게임성을 선보이며 레고 게임 시리즈 중에서도 손꼽히는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리고 2009년 배트맨의 게임뿐만 아니라 원작 코믹스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게임이 출시되니 이 게임이 바로 바로 락스테디 스튜디오에서 개발한 '배트맨: 아캄 어사일럼'이다. 조커를 비롯한 배트맨과 오랜 악연을 지닌 악당들이 대거 출현한 '배트맨: 아캄 어사일럼'은 악당들을 수용한 아캄 수용소에서 벌어진 사건을 해결하고, 조커의 음모를 분쇄하는 모험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이 게임은 배트맨의 능력을 그야말로 100% 선보인 게임이기도 하다. 하나의 증거를 통해 전반적인 사건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 갈고리 총과 배터랑을 통해 상대를 기절시키고, 폭팔젤 등의 도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며, 거대한 홀에서 장식과 은폐기구를 통해 단숨해 상대를 제압하는 능력까지 만화에서나 등장하는 배트맨의 능력을 유감없이 게임 속에 구현해 놓았다.
특히, 단순한 조작을 통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전투는 배트맨 아캄 시리즈를 명작의 반열에 오르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기도 했다. '프리 플로우 시스템'으로 불리는 액션으로 진행되는 전투는 적들에게 공격을 가하다 적이 공격할 경우 카운터 버튼으로 역습을 가할 수 있는 것은 물론, XX, XXY 등의 스킬 콤보를 제공하여 단조로움을 피했으며, 후반부에 등장하는 칼이나 방패 혹은 방탄조끼를 입은 적들도 콤보를 통해 처치할 수 있는 등 게이머의 능력에 따라 단 한 번의 끊김도 없이 적을 처치하는 쾌감을 제공한다. 또한, 매 전투나 게임이 진행될수록 해제할 수 있는 다양한 부가 스킬은 게임의 흥미를 돋우어주기 충분할 정도로 호평을 받았다.
여기에 '킬러크록', '포이즌 아이비', '할리 퀸' 등 메인 악당들과의 보스전과 수용소 곳곳에서 만나는 여러 악당들과 펼쳐지는 사이드 퀘스트 그리고 총 200가지가 넘는 트로피를 모아야 하는 악당 '리들러'와의 승부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콘텐츠를 지닌 '배트맨: 아캄 어사일럼'은 역사상 최고의 히어로 게임으로 평가받으며 상업적인 성공과 평단의 호평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이후 2011년 출시된 '배트맨: 아캄 시티'는 배트맨의 활약을 수용소에서 아캄 지역으로 옮겨놔 오픈월드 게임으로 게임의 볼륨을 높였으며, 초창기 배트맨의 모습을 다룬 '배트맨: 아캄 오리진'은 많은 버그로 비평을 받기는 했지만, 배트맨으로 활동을 결심한 '브루스 웨인'의 초보 배트맨의 모습이 흥미롭게 그려지기도 했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배트맨 아캄 시리즈'는 그 뛰어난 게임성에도 언제나 '2인자'로 머물러 게임계의 대표적인 '콩라인'으로 꼽힌다는 점이다.
혁신적인 시스템을 선보인 1편 '배트맨: 아캄 어사일럼'은 '끝이 존재하는 것이 유일한 단점'이라는 게임 역사의 획을 그은 너티독의 '언차티드2'에게 밀려 2위를 기록했고, 2편인 '배트맨: 아캄 시티'는 2011년 '앨더스크롤: 스카이림'과 '포탈2'라는 괴수급 게임 격돌에 밀려 간신히 '올해의 히어로' 상을 수상하는 데 그쳤다. 설상가상 2013년에 출시된 '배트맨: 아캄 오리진'은 전설의 명작으로 등극한 '라스트오브어스'와 온갖 세계 신기록을 갈아치우며 전후무후한 성공을 거둔 락스타게임즈의 'GTA5'가 맞붙은 역대급 올해의 게임 싸움에 희생양이 돼야만 했다.
그리고 2015년 전세계 수 많은 게이머들을 열광케한 배트맨 아캄 시리즈의 완결편 '배트맨: 아캄나이트'가 출시를 앞두고 있다. 조커가 죽은 뒤의 고담 시를 다룬 '배트맨: 아캄나이트'는 새로운 슈트와 시리즈 최초로 배트카가 등장해 게이머들을 흥분시키고 있으며, 지난 주 막을 내린 E3 2015에서도 최고의 게임으로 손꼽히기도 했다. 하지만, 7년만에 돌아온 베데스다의 명작 게임 시리즈 '폴아웃4'와 전세계에 FPS 바람을 불러온 Xbox 진영의 수호신 헤일로 시리즈의 신작 '헤일로5: 가디언스'가 등장을 예고하고 있는 상황. 과연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배트맨: 아캄나이트'가 과연 '콩라인'을 벗어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