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게임백과사전] e스포츠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들

흔히 스포츠를 각본없는 드라마라고 합니다. 객관적인 전력 차이가 있어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선수들의 슈퍼 플레이로 감동적인 장면들이 연출되기 때문입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잘 모르겠지만, 광란의 2002년을 경험한 세대라면 죽을 때까지 그 기억이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e스포츠 역시 스포츠인 만큼 각본없는 드라마가 자주 펼쳐집니다. 얼마전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1997 세계최강 아키라키드’가 화제가 됐고, 예전 스타크래프트 대회에서 명승부를 연출해던 선수들의 리매치, LOL 클래식 공개 기념으로 치지직에서 추억의 스타들을 초청해 진행한 LCK 레전드 매치 등의 이벤트가 연이어 개최되는 것을 보면 팬들의 추억에 자리잡은 전설의 선수, 전설의 명경기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넷플릭스에서 화제가 된 1997세계최강 아키라키드_출처 SBS
넷플릭스에서 화제가 된 1997세계최강 아키라키드_출처 SBS

그래서, e스포츠가 지금처럼 대중화될 수 있었던 기반을 만든 전설적인 경기들을 한번 뽑아봤습니다. 물론 선호하는 종목에 따라 자신이 생각하는 우선 순위가 조금씩은 달라질 수 있지만, 대부분 한번쯤은 봤거나, 들어봤을만한 전설적인 장면들입니다.

​2004년에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개최된 EVO의 '스트리트 파이터 3: 서드 스트라이크' 종목 준결승전은 스트리트파이터3를 모르는 사람들도 한번쯤 들어봤을만한 역사적인 대회로 꼽힙니다. 당시 스트리트파이터 최고 고수로 꼽히던 우메하라 다이고 선수와 저스틴 웡 선수가 맞붙어, 격투 게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전극이 펼쳐진 대회이기 때문입니다.

​스트리트파이터3는 국내 오락실을 평정했던 스트리트파이터2와 달리 국내 오락실에서는 인기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지만, 블로킹이라는 독특한 시스템이 존재했습니다. 상대의 공격을 방어하면 조금씩 체력이 줄어드는 가드 대미지를 받게 되는데, 반대로 공격 타이밍에 맞춰 가드 반대로 레버를 조작하면 공격을 완전히 무효화할 수 있는 시스템이죠.

​그런데, 저스틴 웡 선수가 조작한 춘리는 필살기(슈퍼 아츠)가 다단 히트로 많은 대미지를 주는 봉익선입니다. 당시 경기 장면을 보면 우메하라 선수가 조작하는 켄의 체력 게이지가 거의 바닥인 상태에서, 봉익선 가드 대미지만으로도 KO가 될 상황이라고 판단하고 봉익선을 발동시켰는데, 우메하라 선수가 봉익선의 모든 공격을 블로킹으로 막아내고, 반격해 역전승을 거둡니다. 특히, 마지막은 공중에서 블로킹을 성공시킨 뒤, 반대로 필살기가 연계된 슈퍼 콤보를 적중시켜 역전승을 거뒀기 때문에, 현장이 뒤집어졌습니다. 지상 콤보만으로든 역전할 수 있는 대미지가 부족했다고 판단해서 더 강한 대미지를 연계하기 위해 일부러 점프해서 블로킹을 했다고 하네요.

​단 한 대만 막아도 KO 되는 상황에서 상대의 공격 방향으로 계속 레버를 밀 수 있는 강심장과 상대의 남은 체력까지 계산해서 행동하는 침착함이 정말 놀랍네요. 두 선수는 이후 Moment 37 Reloaded 대회에서 팬서비스 개념으로 이 장면을 다시 재현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전설의 블로킹_출처 EVO 공식 유튜브
전설의 블로킹_출처 EVO 공식 유튜브

국내에서 전설의 경기라고 하면 스타크래프트를 상징하는 라이벌인 임요환 선수와 홍진호 선수가 맞붙은 EVER 스타리그 2004 4강전을 떠올릴 것 같습니다. 경기 내용 자체가 훌륭했다기보다는 세기의 라이벌전이라고 해서 많은 관심을 모았는데, 모든 이들의 예상을 깨는 충격적인 장면이 나왔기 때문이죠. 맞습니다. 바로 그 삼연벙입니다.

​당시 두 선수 모두 최고의 전성기였고, 바로 전에 펼쳐진 4강 1차전에서 박정석 선수와 최연성 선수가 5세트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기 때문에, 이 경기에 대한 기대감은 엄청났습니다. 평소 코엑스 메가스타디움 경기장에는 100여명의 팬들이 모였었는데, 이날 경기에는 1천명이 넘는 관람객이 몰렸고, 현장에 가지 못한 사람들도 치킨을 배달시키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경기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경기는 예상과 달리, 총 경기 시간 22분 42초만에 싱겁게 끝나고 맙니다. 당시 커뮤니티에 배달 주문한 치킨이 오기 전에 경기가 끝났다는 사연글이 넘쳐났고, 기자 중에는 취재하러 가는 도중에 경기가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회사로 복귀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벙커링이 굉장히 강력한 공격 방법이긴 했으나, 상대가 방어하면 뒤가 없는 전술이었는데, 홍진호 선수가 3 세트 모두 막아내지 못한 것이죠. 임요환 선수는 한번은 막을 줄 알고 여러 가지 전략을 준비해왔는데, 2번 연속 성공한 것을 보고 세 번째 세트도 동일한 전략을 사용한 것이라고 했고, 홍진호 선수는 2번이나 연속으로 했는데, 설마 3번 연속할지는 예상못했다는 답변을 했습니다.

​당시 홍진호 선수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 팬 카페에도 “전 폭풍저그가 아니라 그냥 저그였습니다”라는 말을 남겨 화제가 됐습니다.

​지금이야 두 선수 모두 웃으면서 얘기하는 과거의 추억이 됐지만, 이 경기 이후로 홍진호 선수는 “1이 2에게 3했다”라는 말과 함께 조롱의 대상이 됐고, 임요환 선수는 이렇게 욕을 먹으면서까지 결승전에 올랐지만, 결국 최연성 선수에게 패배하면서 안티팬이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경기 하나가 정말 스타크래프트 판 전체를 뒤흔든 사건입니다.

2012년에 이벤트 경기로 다시 임진록을 재현한 임요환 선수와 홍진호 선수_출처 게임동아
2012년에 이벤트 경기로 다시 임진록을 재현한 임요환 선수와 홍진호 선수_출처 게임동아

이제는 임요환 선수를 능가하는 e스포츠 최고 스타로 자리잡은 페이커 선수가 글로벌 슈퍼스타로 발돋음하게 된 역사적인 장면도 많은 팬분들이 기억하실 것 같습니다. 2013년 HOT6 LoL 챔피언스 서머 결승전 경기입니다.

​CJ블레이즈 대표 선수였던 앰비션과의 맞대결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화려하게 데뷔한 페이커는 HOT6 LoL 챔피언스 서머 결승전에서 KT와 만나서 데뷔 후 첫 우승을 차지합니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5세트입니다. 당시 LOL 경기는 5세트에 돌입하면 상대가 택한 챔피언을 알 수 없고, 같은 챔피언도 고를 수 있는 블라인드 픽 방식으로 진행됐습니다. 당시 페이커 선수도 제드를 골랐고, 상대팀 KT의 미드라이너였던 류 선수도 제드를 골라 닌자 맞대결이 펼쳐졌습니다.

​제드 챔피언 특성상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히는 궁극기 때문에 굉장히 화려한 공방이 펼쳐지는데, 두 선수 모두 제드를 골라서 눈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공방이 펼쳐진 것입니다. 막판에 류 선수가 체력이 많은 상태에서 페이커 선수의 제드를 잡기 위해 나섰는데, 페이커 선수가 불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공격을 피하고 류 선수의 제드를 잡아내 모든 LOL 커뮤니티가 폭발했습니다. 이 영상에 해외에서도 엄청나게 화제가 되면서, 지금도 어디에서는 류 선수의 제드가 또 죽고 있을 것이라면서 ‘류또죽’이라는 유행어가 탄생했습니다. 솔직히 느린 화면으로 봐도 어떻게 피하고, 반격했는지 이해가 잘 안되네요.

느린 화면으로 봐도 이해가 안되는 류또죽 장면
느린 화면으로 봐도 이해가 안되는 류또죽 장면

위에서 언급된 경기들만큼 임팩트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중꺽마’라는 말을 유행시킨 2022년 LOL 월드 챔피언십 경기도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LCK 최고 원딜로 평가를 받고 있긴 했지만, 페이커 선수에 가려있었던 데프트 선수가 당시 약세로 평가받았던 DRX 팀을 이끌고 최하위 시드부터 시작해 강팀들을 모두 꺾고 최종 우승까지 차지한 드라마 같은 대회입니다.

​당시, 데프트 선수가 직접 한 말은 아니지만, RGE전 패배 후 진행한 인터뷰가 화제가 되면서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말이 2022년 최고 유행어가 됐습니다. 2022 카타르 월드컵 등 정말 많은 곳에서 이 말이 사용됐네요. 약자가 어려운 상황을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하는 성공 스토리는 언제나 감동을 주는 것 같습니다.

DRX를 이끌고 중꺽마 신화를 만들어낸 데프트 선수_출처 데프트 선수 인스타그램
DRX를 이끌고 중꺽마 신화를 만들어낸 데프트 선수_출처 데프트 선수 인스타그램

​이외에도 44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항저우 아시안게임 스트리트파이터5 종목에 국가대표로 출전해 최고령 금메달 수상자가 된 김관우 선수나 거듭된 부진으로 이제는 퇴물이 됐다는 말까지 나왔던 페이커 선수가 극적으로 우승을 차지한 2025년 롤드컵 결승 등 드라마 같은 장면들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또 어떤 선수들이 어떤 기적같은 드라마를 연출해줄지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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