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학력자 게임 덕후는 ‘덕질’하는 법도 다르다 [게임 인더스트리]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좋아하는 캐릭터의 굿즈를 모으거나, 코스프레를 하고, 팬아트를 그리는 것이 대표적인데요. 그런데 박사학위를 받은 교수부터 대학원에서 전문 분야를 연구하는 연구자까지, 학문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 중에는 아무나 따라 할 수 없는 특별한 방법으로 ‘덕질’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이 연구해 새롭게 밝혀낸 생물에 좋아하는 게임 캐릭터의 이름을 붙여버리는 것입니다.

생물학에서는 새로운 종을 발견하면 기존 종과 무엇이 다른지 정식으로 기술하고 학명을 부여합니다. 이때 학명에 관한 규칙만 지킨다면 신종을 기술한 연구자가 직접 이름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이나 지명, 신화, 대중문화 등에서 이름을 가져오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게임을 좋아하는 연구자들은 이 흔치 않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죠.
특히 이런 사례가 유난히 많은 게임이 바로 ‘포켓몬스터’입니다.
2020년 호주국립대학교 박사과정 연구자였던 윈 샤오와 이스턴 뉴멕시코대학교 곤충학 교수 대런 A. 폴록은 호주에서 발견된 딱정벌레 신종 3종에 각각 ‘Binburrum articuno’, ‘Binburrum zapdos’, ‘Binburrum moltres’라는 학명을 붙였습니다.

이름만 봐도 어디에서 가져왔는지 눈치챌 수 있는데요. 영어판 포켓몬스터에서 Articuno는 프리져, Zapdos는 썬더, Moltres는 파이어를 뜻합니다. 1세대 전설의 새 포켓몬 3마리의 이름을 신종 딱정벌레 세 종에 세트로 붙여버린 것입니다.
이스턴 뉴멕시코대학교가 공개한 설명에 따르면 샤오는 어린 시절 포켓몬 트레이너가 되는 것을 꿈꿨다고 합니다. 여기에 연구한 딱정벌레 표본들이 매우 희귀하다는 점에서 ‘전설의 포켓몬’을 떠올려 이름을 제안했고, 폴록 역시 이를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앞으로 발견되는 다른 종에도 포켓몬의 이름을 붙일 가능성이 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리자몽도 현실 생물의 학명이 된 적이 있습니다.

요크대학교 석사과정에서 칠레에 서식하는 벌을 연구한 스펜서 K. 몽크턴은 2016년 8종의 신종을 발표했고, 그중 하나에 ‘Chilicola charizard’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Charizard는 리자몽의 영어 이름입니다.
논문에서는 이 벌이 리자몽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이름을 붙였다고 설명했는데요. 특히 보존 과정에서 표본의 노란 무늬가 주황색으로 변한 모습도 이름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줬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2021년에는 예제 린과 슈창 리가 신종 거미에 ‘Alistra pikachu’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거미의 몸 색깔이 노란색이라 피카츄가 떠올랐기 때문인데요. 포켓몬의 팬층이 워낙 넓다 보니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이처럼 포켓몬에서 이름을 가져온 사례가 유독 많이 나오는 모양입니다.
물론 포켓몬 팬들만 이런 특권을 누린 것은 아닙니다.
2020년 리카르도 안토니오 곤살베스와 안토니오 도밍고스 브레스코비트는 브라질 거미속 ‘Epicratinus’를 재검토하면서 무려 11종의 신종을 한꺼번에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연구자들의 취향이 심상치 않습니다.
‘Epicratinus pikachu’는 포켓몬스터의 피카츄, ‘Epicratinus zelda’는 젤다의 전설의 젤다 공주에서 이름을 가져왔습니다. ‘Epicratinus zangief’와 ‘Epicratinus ehonda’는 스트리트 파이터의 장기에프와 E. 혼다, ‘Epicratinus omegarugal’은 더 킹 오브 파이터즈의 오메가 루갈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단순히 좋아하는 캐릭터의 이름을 가져다 붙인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Epicratinus pikachu’는 암컷 생식기의 형태가 피카츄의 얼굴을 닮았다는 이유로 이름이 붙었고, ‘Epicratinus zelda’는 신체 구조가 젤다의 전설에 등장하는 하이랄의 상징을 연상시킨다는 데서 이름을 가져왔습니다.
다른 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Epicratinus ehonda’는 신체 구조가 서로 맞붙은 두 스모 선수를 연상시켜 E. 혼다의 이름이 붙었고, ‘Epicratinus zangief’는 수컷의 구조 일부가 옛 소련 국기에 그려진 낫을 닮아 소련 출신 캐릭터 장기에프에서 이름을 가져왔습니다. ‘Epicratinus omegarugal’ 역시 암컷의 구조가 그리스 문자 오메가(Ω)를 닮았다는 점에서 오메가 루갈의 이름이 붙었죠.
거미의 신체 구조를 보면서 피카츄와 젤다, 장기에프 등을 떠올렸다는 것부터 생각의 흐름이 심상치 않은데요. 연구자들이 상당한 게임 덕후였을지도 모르겠네요.
거미에 게임 캐릭터의 이름을 붙인 사례를 조금 더 찾아보면 ‘젤다의 전설’을 한층 깊게 파고든 연구자들도 등장합니다.

2023년 쿤 위, 웨인 P. 매디슨, 준샤 장은 깡충거미속 ‘Orcevia’를 재분류하면서 15종(이후 16종)의 신종을 발표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Orcevia yahaha’와 ‘Orcevia bokoblin’이라는 범상치 않은 이름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Yahaha’는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에서 숨어 있는 코로그를 발견했을 때 등장하는 특유의 표현에서 가져왔는데요. 이름을 붙인 이유도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코로그가 나무나 덤불, 바위 등 곳곳에 숨어 있는 것처럼 ‘Orcevia’ 표본을 찾아 수집하는 과정이 게임 속에서 코로그를 찾아다니는 것과 비슷했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Orcevia bokoblin’은 같은 게임의 대표 몬스터 보코블린에서 이름을 가져왔습니다. 마스터 모드에서 보코블린이 은색과 금색 개체로 등장하는 것처럼 새로 발견된 거미 수컷에게도 두 가지 색 변이가 나타난다는 점을 연결해 이름을 지었다고 하죠.
한편, 게임 캐릭터의 이름이 특정 생물의 학명을 넘어 현대 과학에서 널리 사용되는 용어로 자리 잡은 사례도 있습니다.
생명과학이나 의학 논문을 보다 보면 ‘Sonic hedgehog’, 줄여서 SHH라는 이름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SHH 유전자와 이 유전자가 만드는 Sonic hedgehog 신호 단백질은 배아가 발달하는 과정에서 팔다리와 중추신경계 등 여러 조직이 형성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93년 로버트 D. 리들, 랜디 L. 존슨, 에드 라우퍼, 클리프 태빈 등이 관련 연구를 국제학술지 ‘Cell’에 발표하면서부터입니다.
그리고 ‘Sonic’이라는 이름을 제안한 사람이 당시 태빈 연구실의 박사후연구원이었던 로버트 D. 리들인데요.
연구진은 원래 고슴도치의 종류에서 이름을 가져오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는데, 리들이 게임 잡지 뒤편에 실린 세가의 ‘소닉 더 헤지혹’ 광고를 보고 ‘Sonic hedgehog’라는 이름을 제안했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는 발생학은 물론 암 연구에서도 ‘Sonic hedgehog pathway’라는 표현이 널리 사용되는데요. 1990년대 연구실에서 게임 캐릭터를 보고 지은 이름 하나가 수십 년 뒤 전 세계 연구자들이 사용하는 전문 용어가 되어버렸다니 신기하네요.
이렇듯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연구 결과에 자신이 좋아하는 게임 캐릭터의 이름을 남기는 건 전문 분야에서 실제 연구 성과를 내야만 할 수 있는, 그야말로 연구자만의 특별한 ‘덕질’인 것 같은데요.
확실히 고학력자 게임덕후는 덕질하는 법도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