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나한테 ‘빨간약’을 먹이는 게임이 있다? AI 시대의 창작을 묻는 ‘EULA ~2026 인류 창작 보고서~’
세상에는 신선한 아이디어로 무장한 인디게임이 많다. 하지만 이용자에게 직접 ‘빨간약’을 건네는 게임은 또 처음인 듯하다. 바로 인디게임팀 MoEater가 개발한 비주얼 노벨 ‘EULA ~2026 인류 창작 보고서~(이하 EULA)’ 이야기다.
‘빨간약’은 영화 ‘매트릭스’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가상이나 거짓 속에 머무는 파란약 대신, 불편하더라도 피할 수 없는 진실을 마주하는 빨간약을 선택한다는 의미다. 오늘날 인터넷과 서브컬처 문화에서는 캐릭터의 실제 얼굴이나 나이, 과거 활동처럼 몰랐던 현실 정보를 알게 되는 상황까지 뜻이 확장됐다.

그렇다면 게임이 이용자에게 어떻게 빨간약을 먹인다는 것일까. 그 비밀은 ‘EULA’의 독특한 모드 전환 시스템에 있다.
이용자는 플레이 도중 언제든 ‘오가닉(Organic)’과 ‘AI’ 두 모드를 오갈 수 있다. Tab 키나 화면의 버튼을 누르면 오가닉 모드에서는 사람이 직접 그린 그림이, AI 모드에서는 생성형 AI를 활용한 이미지가 나타난다.
단순히 그림만 바뀌는 것도 아니다. 대사와 이야기의 관점, 일부 전개와 루트까지 달라진다. 같은 장면을 두 가지 방식으로 번갈아 보다 보면 어떤 선택이 옳은지 자신도 모르게 고민하게 된다.


이러한 기믹에 맞춰 이야기 역시 묵직한 주제를 다룬다.
주인공 주아는 아직 이름을 알리지 못한 일러스트레이터다. 손목은 아프고, 어렵게 완성한 그림을 올려도 좀처럼 반응이 없다. 그러던 중 친구에게 AI 이미지 생성 서비스 ‘험블AI(HumbleAI)’를 추천받는다.
주아는 자신의 능력만으로 어려움을 이겨낼지, AI가 제공하는 편리함을 받아들일지 갈등한다. 게임은 그 과정을 통해 ‘부상으로 직접 그림을 그리기 어려운 상황에서 AI의 도움을 받는 것은 잘못된 일인가’, ‘AI를 완전한 해악으로 규정한다면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사람은 이미지 형태의 창작을 시도할 수 없는가’, ‘일부 작업에 AI를 활용하고 나머지를 사람의 손으로 완성했다면 그것은 인간의 창작물인가, AI의 창작물인가’ 등 생성형 AI와 창작을 둘러싼 여러 질문을 던진다.


모두 생성형 AI 시대를 살아가며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질문이다. 특히 그래픽 직군에 몸담고 있다면 주아가 겪는 고민과 불안에 공감할 만한 장면이 적지 않다.
다행히 주제만큼 분위기까지 무겁지는 않다. 인터넷 밈과 서브컬처식 농담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자칫 딱딱해질 수 있는 논쟁을 비교적 가볍게 풀어낸다. 덕분에 부담 없이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다. 오히려 인터넷과 서브컬처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이용자는 게임 특유의 호흡과 농담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할 수 있으리라 본다.

스토리와 별개로 UI와 UX의 완성도도 인상적이다.
이 게임에서는 마우스 휠을 아래로 굴리는 것만으로 대사를 빠르게 넘길 수 있다. 비주얼 노벨에서는 문장이 한 글자씩 출력되는 연출 때문에 다음 내용을 곧바로 읽지 못하고 기다려야 할 때가 많다. 반면 ‘EULA’는 자신의 독서 속도에 맞춰 대사를 빠르게 확인할 수 있어 상당히 편했다.
대사를 너무 빨리 넘겼다면 휠을 위로 올려 이전 대화도 곧바로 확인할 수 있다. 사소해 보이지만 읽는 속도가 빠른 이용자에게는 체감이 큰 기능이다. 다른 비주얼 노벨에도 보편화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다회차 플레이를 고려한 장치도 돋보인다. ‘EULA’는 오가닉과 AI 모드에 따라 이야기의 내용이 달라지므로 이미 읽은 대사를 빠르게 넘기는 일이 많다. 이때 중요한 모드 전환 지점을 무심코 지나치지 않도록 주요 분기에서는 스크립트를 여러 차례 넘겨야 다음 장면으로 진행된다. 실제 플레이 방식을 충분히 고민한 설계가 눈에 띈다. 개발일지를 통해 게임을 차근차근 고도화해 온 과정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러한 노력이 현재 버전의 완성도에 잘 녹아든 듯하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가장 크게 체감된 부분은 저장 방식이다.
게임은 여러 개의 세이브 슬롯과 빠른 저장을 지원하지만, 주기적 자동 저장 기능은 제공하지 않는다. 중요한 분기마다 세이브를 깜빡하면 상당히 많은 부분을 다시 플레이해야 할 수 있다. 모든 장면을 기록하는 복잡한 자동 저장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장 최근의 주요 분기점이 자동으로 갱신되는 전용 슬롯이 있었다면 부담이 줄었을 듯하다.
요약하자면, ‘EULA’는 생성형 AI라는 논쟁적인 소재를 정면으로 다룬 비주얼 노벨이다. AI를 무조건 옹호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이에 대한 판단을 이용자에게 맡긴다.

그래서 기존에 AI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든, 플레이 내내 한쪽의 주장을 강요받는다는 거부감은 크지 않을 듯하다. AI에 긍정적이었다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를 발견할 수 있고, 부정적이었다면 반대편에서 제기하는 질문과 마주할 수 있다. 특히 AI의 영향을 직접 체감하고 있는 그래픽 직군 종사자라면 더욱 공감하며 플레이할 수 있을 것 같다.
게임을 마친 뒤에도 어느 모드가 더 옳았는지 명쾌한 정답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정답을 알려주는 대신 오래 생각할 질문을 남기는 것 자체가 ‘EULA’가 보여주려 한 인간 창작의 한 모습일지도 모른다.